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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6일 08시 40분 등록
2000년초, 관세청에서 수출입 업체를 위한 100대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일선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규제와 불편한 사항을 개선하기 위하여 전국 세관에 걸쳐 대규모로 추진되었다. 각 실 국의 업무분장에 따라 단위 업무를 나누고, 민원인, 관련 업계에 느끼는 규제를 모두 철폐한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그 동안 업계로부터 들어온 건의사항과 민원, 그리고 제안으로 제기되었던 업무들이 대상이 되었다. 1단계 규제의 확인 작업이 끝나고, 정리된 문제에 대한 제목과 일련번호를 부여하였고, 문제점과 현황, 그리고 대책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대책을 가지고 각 분야별로 직원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규정 개정에 따른 준비사항을 의논하고, 해당 규제가 없어진 후의 사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등을 논의하였다. 또 개선 대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아이디어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문제점으로 대두된 것이 바로 민원인과 관련업계, 그리고 기업들의 반응이었다. 공무원들이 업무상 접한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와 대책은 좋았으나, 실제 기업인들이 느끼는 애로사항이 아니라면 전시행정의 표본이 될 터였다. 세미나를 마친 후, 그 다음날부터 각 과제별 해당 기업들의 방문이 이루어졌다.

기업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업체들의 명단을 만들고 해당 업무의 담당자와 통화를 해본 결과 공무원들의 방문을 기피하였다. 전화를 걸어서 방문한다는 의사표시를 하면 “왜 꼭 우리 회사를 방문하려고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업체도 있었고, 불경기로 회사 문을 닫으니 와도 볼 것이 없다고 말해주는 기업도 있었다. 사무실을 이전하여 방문이 어렵다고 하는 등 갖은 핑계로 직원들의 방문을 피하는 눈치였다.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이유를 알아보니, 바로 옛날의 직원들의 잘못된 전력 때문이었다. 세관직원이 회사에 방문하면 잘 해야 본전이고, 행여 위법한 사실이 나오면 벌금을 내야하는 등 업무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 나름대로 접대를 해야 하는 등 갖가지 문제가 많았다. 결국 담당자에게 이번 방문은 조사나 감사 업무가 아닌,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파악한다고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고, 면담자도 담당자만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한 후에 이루어졌다.

입사 초기에 몇 몇 기업체를 직장 상사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회사 앞에 도착을 하면 수위 아저씨가 안내를 하였고, 직접 사장실로 들어갔다. 가끔 부사장이나 부회장이 나오면 양해를 구하였다. 내심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였지만, 실제 방문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우선 세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몰랐다. 수출이나 수입이 그냥 관세사를 통하여 자동으로 처리가 되는 줄 알았다고 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간 애로사항에 해당 업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안건만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 좀 서먹서먹하였으나, 방문 목적이 업체들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뜻을 알았는지 대화가 순조롭게 되었고, 방문한 목적을 끝낼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이 여론을 수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또 관세행정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세관 업무가 기업하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질 만큼 투명하고 신속하게 처리된다는 것이 직접 보았다. 수출입업체 지원대책은 어느 대책 보다도 현실적이고 수출입 업체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론도 좋았고, 결과도 좋아 성공적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일선 세관에서는 기업들의 업무담당자들과 정기적인 간담회를 세관에서 개최하고 있다. 애로사항이나 업무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고, 세관에서도 업체들의 현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목민심서에 여론수렴과 관련해서 항통이라는 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목민심서에 보면 항통(缿筩)이라는 말이 나온다. 항통이란 자기병이나 죽통의 아가리를 굳게 봉하고 비벼 꼰 종이 토막을 겨우 집어넣을 수는 있으나, 도로 꺼내지는 못하게 작은 구멍을 하나만을 낸 것이다. 항통을 작은 면에는 한두 개, 큰 면에는 서너 개 정도를 보내어 모든 마을에 전해 돌리게 하되, 한 마을마다 2,3일 정도 두었다가 거두어들인다. 수령의 정사에서 잘못을 지적하면 주저없이 고칠 것이요, 민폐를 고해오면 단연코 개혁할 것이요, 사사로운 원한으로 무고하는 것도 모름지기 살펴야 할 것이다. 항통은 목민관이 간악한 아전들의 이목을 가리는 부분을 없애고 직접 백성들의 애로사항을 들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제5부 이전(吏典) 6조, 5. 물정을 살핌, 163p)


항통과 업체 방문은 방법이나 목적은 다르지만, 현장의 생생한 소리를 여과 없이 들여야 한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였다. 종전에 대부분 업무는 정부기관이 먼저였다. 업체들보다는 공무원이 더 쉽게 일을 하였고, 공무원과 기업인들이 이견이 있을 때, 공무원 편이었다. 다산선생이 살던 시기보다 지금은 여론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도구가 많다. 하지만 편리한 도구가 여론을 편리하게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이다. 공무원의 시각에서 민원인의 시각으로 관점이 변화하는 그 지점이 변화와 혁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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