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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8일 14시 29분 등록

교복과 여관, 또는 여관과 교복, 어울리려야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나는 중고등학교 6년 내내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과 함께 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부산에서 팔 학군이라 불리는 교육의 중심지에 있었다. 반면에 우리 집은 학교에서 버스로 한 시간을 가고 또 삼십 분을 더 걸어야 하는 변두리에 있었다. 우리 가족은 외진 동네 낡은 여관 건물 한 귀퉁이에 세 들어 살았다.


왜 하필 여관이었을까? 80년대 노동 운동을 하셨던 아버지는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엄마의 쌈짓돈을 맡아 사업을 하던 외삼촌의 사업이 망한 터였다. 우리 가족은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다가 도시에서 마지막 거주지로 여관 건물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찍 시골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공부 잘 하는 딸들을 위해 부모님은 도시에서의 삶을 조금 더 연장했다. 어찌됐건, 가장 민감한 시기, 이른 아침 여관 건물에서 나와, 늦은 밤 여관 건물로 들어가는 일은 너무나 끔찍했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내 사춘기 영혼을 사로잡은 첫 시집이다. 소년원 출신, 중졸의 학력, 여호와의 증인 신도 등 시인 장정일의 이력은 마치 교복과 여관의 조합처럼 시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중졸의 학력이 중학생이던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대한민국이라는 학벌사회에서 중졸의 시인은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살아있는 시의 문장이 좋았다.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교복과 여관의 시기, 그의 시를 읽으며 나도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세고
몇 개 전주 너머의 너의 방이 별보다 밝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었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 씨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 장정일 '석유를 사러' 중에서'-


한 편의 시를 가슴에 품고 중학생은 시인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 삶에 난관 같은 건 없으면 좋겠어.

시인: 난관을 모면하기 위해 무언가 시도하는 건 가슴 벅찬 일이야.

나: 배가 고픈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시인: 내일 굶주린다 해도 오늘을 따뜻하게 보내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해.

나: 도대체 꿈이란 게 뭘까?

시인: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는 일이지.

나: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시인: 걸어, 거센 바람이 네 등을 후려치더라도 계속. 반짝이는 별을 보며 끝없이 걷는 거야.


그때 시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지금도 기억한다. 일상이 온통 모순으로 가득했던 나의 십대,  매일 밤 시가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었기에, 매일 아침을 ‘붉은 해로 솟아나는’ 희망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시인 장정일이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삼중당 문고를 읽었던 것처럼, 나는 반짝이는 별 같은 책을 한 권 한 권 찾아 읽었다. 그리하여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다.


***

가족처방전 -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상담 요청 메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답장을 보내드릴게요.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번주는 가족처방전을 대신해 자유학년제 인문독서 연재를 보내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정은 드림 (toniek@naver.com)

IP *.202.114.135

프로필 이미지
2019.02.21 08:32:51 *.102.1.189

시인이 한줄 한줄 정성스럽게 지은 시가 우리들에게 힘이 되는 이유인것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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