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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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우리나라 영화배우 중에「문희」라는 여배우가 있다. 그녀는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하면서도 짙은 눈썹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착한 인상으로 잘 생겼다. 그렇다고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해 보이거나 백치미가 느껴지는 타입은 아니다. 현존하는 인물인데다가 우리나라 굴지의 가문에 사모님이라서 언급하기에는 조금 뭣한 면이 없지 않지만 유년시절 나는 그녀를 가장 좋아했고, 그 감정은 마흔의 중년을 넘어선 지금에도 변함이 없으니 잠깐 거론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그녀는 인기가 너무 좋아서 다른 배우들보다 빨리 자취를 감추었고, 막강한 뒤 배경 때문인지 스캔들과 가십에도 별로 오르지 않았으며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우아하고 세련된 품위를 유지하고 사는 듯하다. 마치 그녀 이름의 藝名예명 덕이라도 톡톡히 보는 듯이 말이다.
당시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는 우리나라 영화사에도 길이 남아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것이 있다. 그때의 그녀의 인기라니. 온 장안을 강타하는 폭발적인 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당시에도 여배우 트로이카가 있었고 그 위세는 매우 당당했지만 나는 그 중에서 단연 문희라는 영화배우를 제일 먼저 꼽곤 하였었다. 그때에 사촌 언니들이나 이웃 집 언니들은 나보고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어보곤 했던 기억이 나니까 말이다. 그러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외쳐댈 정도였다. 그녀의 호소력 깊은 눈물 연기를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쬐만한 어린 아이인 내 가슴도 마구 저며 오는 듯 엉엉 울어재꼈던 것이다.
그 영화가 시내를 돌고 돌아 마침내 우리 동네 극장에까지 상영되어진다는 홍보가 다음 프로로 영화간판에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로 주변은 미리부터 술렁이고 개봉하는 날에는 만원사례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서울 인구가 요즘 같이 많지는 않아 행정 구역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속해 있을 때, 우리 동네 대림 시장 옆「대림극장」이라는 영화관에서 당시 60원을 내고 들어가면 눈물콧물 다 흘리며 보던 영화이다. 하지만 그 돈도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는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는지 그때에도 초대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얻은 것을 가지고 아마도 요행이 그 영화를 어린 내가 볼 수 있었고, 키가 큰 내가 표를 내지 않고 끼어 들어가기 위해 옆집 언니(아이들 세째 고모)의 등에 업혀서 자는 척하고 들어간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생각하니까 나와는 14살이나 차이가 나는 우리 큰오빠와 옆집 언니가 둘의 공식적인 데이트(?)를 하지는 못하고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는 척하며 사소하게 데이트를 즐겼거나 해서 나는 자주 따라 나서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옆집 아주머니가 가실 때에도 따라가고 나중에 오빠가 옆집 언니와 갈 때에도 또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영화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렇게 여러 번 쫒아가서 보았고 아무리 봐도 전혀 질리기는커녕 볼 때 마다 어린 내 가슴을 몹시도 서럽게 하여 무척이나 울면서 본 기억이 난다. 속으로 어렴풋이 영화배우에 대한 동경과 꿈도 키워가면서.
대양영화사 정소영 감독의 이 영화 내용은 현숙한 조강지처가 있는 중후한 중년의 유부남(의사, 신영균)을 사랑한 여자(유치원 교사, 문희)가 서로의 애틋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정실이 아닌 관계로 그 스스로가 아들(김정훈)의 장래를 위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전처(전계연)에게 맡기고 떠나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을 그렸다. 한 여인의 恨과 못내 가슴 아픈 母情을 다루는 슬픈 영화였다. 비가 오는 날에 아들과 떨어지는 그녀의 울부짖음의 장면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애절함으로 연기를 썩도 잘하여 문희씨는 눈물 연기의 여왕이라 불리어 지기도 했었다. 또한 당시 아역배우였던 아들 역의 김정훈의 귀엽고도 슬픈 연기는 더욱 애간장을 녹이는 듯 했으며 이 영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사상 멜로영화의 극치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후 영화는 시리즈로 몇 편의 후속타를 날리기도 할 정도로 대단한 기염을 토했으며, 지금까지도 멜로영화의 상징으로 영화사에 회자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예능인이나 특히 영화배우들은 본명을 잘 쓰지 않고 가령 신비한 역사 속의 신화나 설화, 문학 작품 등에서 이름을 따오거나 하는 예가 많은데 이 배우의 경우에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보각국사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라는 귀한 작품과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인물 김유신이라는 장군이 나오는데 문희라는 인물은 바로 김유신의 여동생인 것이다. 설화에 의하면 원래 남다른 총기가 있는 문희는 언니 보희가 꾼 꿈을 사서 큰 인물이 된다. 그 꿈은 서쪽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고 보니 글쎄 서울 성안을 가득 채우더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언니에게 그 꿈을 산 영특한 문희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고 설화는 전한다.
위의 두 역사책에서 설화를 한 대목 접한 김에 문명왕후 문희에 대해 살펴보면, 신라 태종무열왕의 비(妃)로서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성은 김(金)이다. 이름은 문희(文姬)라 하고,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딸이자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인물과 지혜가 뛰어나 언니 보희(寶姬)의 꿈을 사서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법민(法敏: 문무왕)을 비롯하여, 인문(仁問)ㆍ문왕(文王)ㆍ노차(老且)ㆍ지경(智鏡)ㆍ개원(愷元) 등을 낳아 다복했음과 영웅의 신화적 당위성이 재미있게 가미되어 전해지는 작품 속 역사적 인물이다.
배우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아름다운 자태만큼이나 큰 복을 누리라고 예명을 좋은 것으로 골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이 종합예술이니만큼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주연배우의 역할이란 영화사의 사활을 좌우할 것이니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을 수 없을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문희라는 배우는 그녀의 연기 재능만큼이나 예명도 걸맞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삼국유사를 접하면서 새삼 옛 추억과 함께 다시 떠올라 기억의 한 장면을 더듬어 보았다.
요즘에는 흔히들 부르기 편한 이름을 짓고는 하는데 작명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아니지만 이왕에 이름을 지을 바에는 신중하게 정성들여 짓는 편이 아무래도 좋을 성싶다. 은연중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또 행운이 그리 빌어질지 누가 아는가. 영화배우 문희씨처럼.
언제 초아선생님께도 여쭈어보아야겠다.^^
IP *.70.72.121
당시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는 우리나라 영화사에도 길이 남아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것이 있다. 그때의 그녀의 인기라니. 온 장안을 강타하는 폭발적인 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당시에도 여배우 트로이카가 있었고 그 위세는 매우 당당했지만 나는 그 중에서 단연 문희라는 영화배우를 제일 먼저 꼽곤 하였었다. 그때에 사촌 언니들이나 이웃 집 언니들은 나보고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어보곤 했던 기억이 나니까 말이다. 그러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외쳐댈 정도였다. 그녀의 호소력 깊은 눈물 연기를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쬐만한 어린 아이인 내 가슴도 마구 저며 오는 듯 엉엉 울어재꼈던 것이다.
그 영화가 시내를 돌고 돌아 마침내 우리 동네 극장에까지 상영되어진다는 홍보가 다음 프로로 영화간판에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로 주변은 미리부터 술렁이고 개봉하는 날에는 만원사례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서울 인구가 요즘 같이 많지는 않아 행정 구역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속해 있을 때, 우리 동네 대림 시장 옆「대림극장」이라는 영화관에서 당시 60원을 내고 들어가면 눈물콧물 다 흘리며 보던 영화이다. 하지만 그 돈도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는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는지 그때에도 초대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군가에게 얻은 것을 가지고 아마도 요행이 그 영화를 어린 내가 볼 수 있었고, 키가 큰 내가 표를 내지 않고 끼어 들어가기 위해 옆집 언니(아이들 세째 고모)의 등에 업혀서 자는 척하고 들어간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생각하니까 나와는 14살이나 차이가 나는 우리 큰오빠와 옆집 언니가 둘의 공식적인 데이트(?)를 하지는 못하고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는 척하며 사소하게 데이트를 즐겼거나 해서 나는 자주 따라 나서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옆집 아주머니가 가실 때에도 따라가고 나중에 오빠가 옆집 언니와 갈 때에도 또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영화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렇게 여러 번 쫒아가서 보았고 아무리 봐도 전혀 질리기는커녕 볼 때 마다 어린 내 가슴을 몹시도 서럽게 하여 무척이나 울면서 본 기억이 난다. 속으로 어렴풋이 영화배우에 대한 동경과 꿈도 키워가면서.
대양영화사 정소영 감독의 이 영화 내용은 현숙한 조강지처가 있는 중후한 중년의 유부남(의사, 신영균)을 사랑한 여자(유치원 교사, 문희)가 서로의 애틋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정실이 아닌 관계로 그 스스로가 아들(김정훈)의 장래를 위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전처(전계연)에게 맡기고 떠나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을 그렸다. 한 여인의 恨과 못내 가슴 아픈 母情을 다루는 슬픈 영화였다. 비가 오는 날에 아들과 떨어지는 그녀의 울부짖음의 장면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애절함으로 연기를 썩도 잘하여 문희씨는 눈물 연기의 여왕이라 불리어 지기도 했었다. 또한 당시 아역배우였던 아들 역의 김정훈의 귀엽고도 슬픈 연기는 더욱 애간장을 녹이는 듯 했으며 이 영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사상 멜로영화의 극치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후 영화는 시리즈로 몇 편의 후속타를 날리기도 할 정도로 대단한 기염을 토했으며, 지금까지도 멜로영화의 상징으로 영화사에 회자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예능인이나 특히 영화배우들은 본명을 잘 쓰지 않고 가령 신비한 역사 속의 신화나 설화, 문학 작품 등에서 이름을 따오거나 하는 예가 많은데 이 배우의 경우에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보각국사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라는 귀한 작품과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인물 김유신이라는 장군이 나오는데 문희라는 인물은 바로 김유신의 여동생인 것이다. 설화에 의하면 원래 남다른 총기가 있는 문희는 언니 보희가 꾼 꿈을 사서 큰 인물이 된다. 그 꿈은 서쪽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고 보니 글쎄 서울 성안을 가득 채우더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언니에게 그 꿈을 산 영특한 문희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고 설화는 전한다.
위의 두 역사책에서 설화를 한 대목 접한 김에 문명왕후 문희에 대해 살펴보면, 신라 태종무열왕의 비(妃)로서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성은 김(金)이다. 이름은 문희(文姬)라 하고,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딸이자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인물과 지혜가 뛰어나 언니 보희(寶姬)의 꿈을 사서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법민(法敏: 문무왕)을 비롯하여, 인문(仁問)ㆍ문왕(文王)ㆍ노차(老且)ㆍ지경(智鏡)ㆍ개원(愷元) 등을 낳아 다복했음과 영웅의 신화적 당위성이 재미있게 가미되어 전해지는 작품 속 역사적 인물이다.
배우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아름다운 자태만큼이나 큰 복을 누리라고 예명을 좋은 것으로 골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이 종합예술이니만큼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주연배우의 역할이란 영화사의 사활을 좌우할 것이니 아무렇게나 이름을 지을 수 없을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문희라는 배우는 그녀의 연기 재능만큼이나 예명도 걸맞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삼국유사를 접하면서 새삼 옛 추억과 함께 다시 떠올라 기억의 한 장면을 더듬어 보았다.
요즘에는 흔히들 부르기 편한 이름을 짓고는 하는데 작명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아니지만 이왕에 이름을 지을 바에는 신중하게 정성들여 짓는 편이 아무래도 좋을 성싶다. 은연중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또 행운이 그리 빌어질지 누가 아는가. 영화배우 문희씨처럼.
언제 초아선생님께도 여쭈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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