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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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주로 공상을 자주하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놀았다. 밖에 나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거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무엇을 하기보다 혼자서 고물고물 놀거나 생각하기를 더 즐긴 것이다. 아마도 오빠들과 너무나 터울이 져서 일찍이 아주 어려서부터 습관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학창시절 나는 한편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렸지만 한 편으로는 정적인 나만의 시간을 즐겨하며 혼자 있어도 전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그것을 환경적으로 즐겨서 그랬는지는 정확하게 장담할 수 없다. 학창시절 가끔씩 나는 내 인생에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절대적인 꼭 한사람에 대한 동경을 절실하게 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사람을 잘 만나기 위해 무엇을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지는 잘 몰랐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내 주변은 대부분 평범했고, 그저 그렇게 성장하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을 만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생활을 하며 가꾸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저 막연히 생각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불행이라거나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방어기전 따위는 내게 전혀 없었다. 의심도 해보지 않을 만큼 어리석은 자신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살면서 무슨 절박한 문제 같은 것이 내 환경에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고 또한 아주 최상주의 목표지향 따위도 없었으며, 남과 경쟁 상태에 있거나 하지 않아 더욱 그렇게 맹탕이었던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나의 청년 시절은 흘러갔다. 그러다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을 만나 평범하게 살면 되는 것이려니 하고서.
그때 나는 사람이 무언지 몰랐다.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나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 알고 있었다. 진국을 만나고 싶었고 그것이 쉽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 말하기 거북하다. 나는 맹목적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안목이 부족한 결과를 낳았으니까. 그러니 조금 혹은 아주 어렴풋이나마 그리 알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와 살면서 혹은 이혼하면서 나는 그가 정말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는 나와 사는 동안에 장차 사업을 해야 하겠다는 거의 강박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딴에는 당시로서 약간 희소가치가 있는 기술사라는 자격증을 획득한 상태에다 거의 20여년 가까이 중견급 업체의 한 직장에서 경력을 쌓은 현장 경험이 있으니 자신은 기술을 담보하고 돈 많은 전주를 물색해서 사업을 일으켜야만 생계와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계속해서 부모 형제의 생계를 건사해야 하는데다가 늦장가에 아이가 무려 셋이나 딸리게 되니 짐이 되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입버릇처럼 그리 되뇌곤 했던 것이다. 왜 아니 그렇겠나. 남들은 한시름 놓고 인생의 덧없음을 논할 때 자기는 신혼에다가 발걸음을 겨우 떼는 아이와 고작 유치원에나 보내야 할 아이가 있을 뿐이니 그의 삶에 휴식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이 결혼의 편안함도 잠시 그를 바라보는 혹만 주렁주렁 달린 채 짐 덩이만 끼고 앉아 날로 부풀어가는 형상이었으니까 말이다.
월급쟁이 생활로는 도저히 현실의 벽을 깰 수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늘 시들한 깨 바가지를 굴려서는 도저히 변화가 없으니 한 번이라도 제대로 수박이 통째로 굴러야 한다고 염불처럼 외우고 다니며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여야 하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두텁고 탄탄하게 바탕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어려운 일이니 물주들을 쫒아 사업을 일으키려 여기저기 동분서주하기보다 조그맣게 라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도록 모색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상대의 성정을 알기에 차마 미리 입 밖에 낼 수야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이들만 어느 정도 크고 나면 가족끼리 무엇을 하는 것도 괜찮다 싶었으나, 그는 그러한 일은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었고 별로 크게 남지 않을 사업들에 대해서는 성에 차지도 않는 듯했다. 수중에 자신의 돈은 얼마간도 그다지 없는 사람이 공사 발주 한번 하면 그 공사 대금이 수백억 수천억 하는 것에 비유하니 그게 바로 빛 좋은 개살구로 말짱 허황된 일이지만 간덩이는 크게 부풀어 있었던 것이 아니겠나. 하지만 그 세계에 오래 물이 들어 있는 사람들은 물론 사람 나름이기는 하겠지만, 합리적 이중적 시선의 이성적 감각과 적절한 균형감을 유지하기가 오히려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가끔씩 오는 손님이더라도 왕건이가 걸려서 농짝이나 자동차를 파는 것과 노점상에서 단돈 천 원, 이천 원짜리를 하루 종일 발발 떨며 파는 것에 비유해 보기도 하면서,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로서는 어찌할 줄 모르기도 한 것이다. 더구나 주말이고 퇴근시간이고도 전혀 일정치 않은데다가 연일 밤늦도록 술에 쪄들다시피 하여 들어오는 그를 보면 걱정이 절로 되고는 하였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사고들이 완전하게 부합되지 않는 성격차를 보였다고 해도 만약 우리의 내적인 관계, 지칭하여 잠자리라고 하는 예의 그 속궁합이 잘 맞았더라면 우리가 좀 더 의견차를 좁힐 수 있었을 것인가? 그의 말처럼 내가 여니 여자들처럼 사랑을 맹목으로 갈망했던 것일까? Sex에 환장했으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만족해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물론 우리의 성관계는 그다지 황홀하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일종의 고통에 가깝기도 했다. 맞지 않는 것인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인지 일방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편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내 몸의 일부가 유독 약한 것인지 상대가 조절을 잘 못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이 아빠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그림 같은 매혹적인 느낌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생겼고 그러므로 그것 때문에 못살 일은 없다고 생각되었다면 너무 단순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일까.
뭐 완전히 만족스럽거나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야 있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가면 해결 될 줄 알았다. 그러한 친밀감으로 인해 서로의 신뢰 관계가 깊어질 수 있었다면야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러한 문제를 들어 가정을 파기할 만큼의 욕심도 호기심도 없었다. 다만 무언가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찜찜한 구석들이 그것 때문인가 의심을 할 뿐 그 문제가 생활 전반을 흔들어야 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 그가 나의 밤을 황홀하게 이끌어주었거나 내가 그러한 상대자였다면 만사가 O.K가 되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격 트러블은 성적 트러블이라고들 곧잘 인식하고 서슴없이 진단하여 말을 한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정말 그럴까? 서로에게 밤의 흥분이 아침까지도 이어질 수 있을까? 환한 대낮에도 밤의 만족감 때문에 그저 무엇을 원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우스갯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이럴 때 매 맞는 여자가 삶을 지속하는 이유가 그래도 남편과의 밤일에 만족해하기 때문이라는 말들을 흔히들 하곤 한다. 요즘에는 맞고 사는 남자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는데 그럼 그들도 그러한가?
나는 결혼이 성의 만족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것까지도 만족스러울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 가운데는 그것이 기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바람이 나고 급기야 가정을 파탄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많이 보았다. 너무 좋은 것을 지속하여 느끼고 유지하려는 탐심이 오히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집안을 문제로 이끌어 가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상대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쉽게 말해 배우자로 생각하느냐 아니냐 하는 관념이 더 큰 사고의 기본 틀이 된다는 것이다. 그 바탕이 없으면 문제는 문제를 낳고 갈수록 태산같이 맞지 않는 부분들만 확대되고 전개되는 양상이 펼쳐지게 돼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불감증을 호소하는 것 같아 그건 아니라는 말도 하고 넘어가야겠다. 내 언어로 표현하자면 친밀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사랑이란 섹스에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하고 싶음이다.
만약에 사랑의 요소 가운데 성애가 차지하는 부분이 그토록 중요한 테마라면 온전히 가정을 지키고 꾸려갈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나. 모든 생명은 생로병사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 나면 죽고 그 안에 병이 들거나 쇠약해 지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도중에 사고라도 겹치는 불운을 겪게 되면 그럼 결혼 생활을 도중하차 해버리고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서로의 입장이 반대 상황으로 될 때에도 역시나 합당하다고 여겨지겠는가. 나는 사랑이라는 것 친밀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마치 플라토닉 한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 같다고 빈정대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나는 5년 결혼 생활하고 10년 이상 헤어져 홀로 지내보았지만 사랑의 친밀감이란 성적 만족감에 국한됨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상이라고 하는 생각이 아직도 바뀌지 않는다. 사랑의 탄탄한 고리는 신뢰다. 상대를 바라보는 연민 바로 우리말의 측은지심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없는 그것이 부족한 사랑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 같다.
상대를 구속하겠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인간의 운명은 약속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인간이 철이 들면서 타고난 천성에 자기 의지 요소를 결합하여 운명을 결정짓고 살아가게 되는 것은 이 약속이 근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날 싫어졌다고 뻔뻔스럽게 들이대며 배 째라 하는 식의 안하무인 생활 태도로는 애시에 누구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토록 무책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변명의 여지없이 내 경우에 나도 그랬고 그 사람도 그랬으며 그 가족 모두가 합세해 그러했다. 마땅히 성인들이야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니 당연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거짓 진실과 허위로 날조하여 조장된 생활 속에서 개인사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보통의 현실일 것인가. 이러한 자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부모이고 형제니까 당연 공경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억측과, 어린아이들이야 자신들이 계획하고 원하는 방향대로 키워지고 키우면 그만이라는 섣부른 논리를 내세움은 천부당만부당 한 괴변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게 키워서 그 공치사는 또 얼마나 어떻게 해댈 것인가. 늙은 부모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사지육신이 멀쩡한 겨우 두 살 터울을 가지고 평생을 지배하려 드는 누이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내 머리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납득할 필요도 없지만은 내 아이가 있음에야 살아있는 것이 가시방석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이년의 업보인 것이다.
또한 나는 웃기는 경험 가운데 하나로 결혼 전에 배우자감을 소개받거나 하면 어떤 사람 가운데는 성적 관계를 은근슬쩍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그것을 먼저 전제로 요구하려 드는 이들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이 문란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 받아온 나로서는 타협이 이루어질 수 없는 부분이어서 일언지하에 차라리 교제를 끊어버리는 편을 선택했다. 나는 내게 무슨 흠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렇게 자보고 선택하기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다는 심리가 상대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 아닐까 일단 의심부터 가져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런 표시도 뭐도 안 나는 지들 몸과 여자 몸은 다른데 그때 가서 이유를 달면 기껏 뭐 주고 욕먹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반론을 펼 것이다. 서로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고. 합의 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나는 이 부분에서 그게 서로 간에 정당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물주가 여자들을 심히 불공평하고 자학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와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보니 만약 그게 그렇게 양자 중 어느 한 사람에게 무지하게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아직도 나 같으면 그 여자의 순결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처리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해서 여전히 망설여 질 것 같다. 따라서 나는 남자의 동정도 여자들의 순결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어떻게 어떤 관계를 맺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평생의 습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지기도 한다. 마치 운전할 때의 습관처럼 말이지. 이것도 운전이라면 운행이요 한순간 여행이라면 여행일 것이다.
한때 나는 내 결혼의 불협화음이 성적 불만족의 사유도 어느 정도는 동반하는 것일까를 두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연년생 셋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그 흔하게 유행하는 예쁜이 수술이란 것을 받아나 볼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이다. 몸에 칼 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면서도 말이다. 사랑을 지키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도 별별 생각을 다 해본 것이다. 또한 언젠가는 그가 나로 하여금 그러한 생각으로 주눅이 들게 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내 내가 병원을 찾아 갔을 때 시시한 개인 병원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의사는 내게 물었다. “혹시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수술을 요하십니까?”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네”라고 짧고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고 만약 그런 문제라면 시술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자신의 견해를 소상히 밝혀 주는 것이었다.
수술을 한다고 해도 대게는 6개월이면 원상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둘의 마음과 정신상태의 문제이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핵심을 짚어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연년생 세 아이를 낳은 여자의 고충을 담당의사가 측은하게 생각해서 더욱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다. 한마디로 여자 쪽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셋 모두를 생기는 대로 자연분만을 한 여자가 이혼을 쉽게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경험상 아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이는 내가 합의 이혼 서류를 낼 때의 담당 검사의 질문 장면과도 매우 흡사하였다. 검사는 나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듯 하면서 위자료는 합의 하였는지를 묻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매우 당혹해 했다.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사람처럼.) 논리에 너무나 합당한 의사의 충고를 듣고 사랑받아 보려는 의지를 접고 수술을 철회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을 문제로 삼는다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결심을 한편으로 굳히면서 진찰실을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의사의 거짓 없는 설명은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무조건 시술을 부추기며 돈만 벌려는 병원이 아니었고 사기를 치는 의사가 아니어서 나는 그 의사를 지금도 존경한다. 후에 어느 병원으로 옮겨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심을 팔아 의술을 행하지 않고 인술을 행하는 그 의사는 나로 하여금 고통스럽지만 타인을 위해 내 이성과 몸을 맡기는 여자가 아니라, 내 의지로 살아가고 홀로서야 함을 인지시킨 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그와 이혼 후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다른 부서의 과들을 지켜보니 의외로 그러한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서 정말 놀랐다. 심지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수술을 셀 수 없을 만치 많이 시술하고 받는 것이었다. 우연한 검진을 위하여 부인과를 내방하는 특히 4~50대 중년 여성의 경우에도 의사의 권유에 미혹되어 해당 분야 시술을 입원한 김에 예닐곱 가지를 한꺼번에 겹쳐서 시술해 대는 것이 보통이어서 너무나 놀라웠다. 일시적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술결과에 대부분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노화에 대한 그리고 자신들의 상태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이를 무턱대고 학원에 보내는 학부모가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학원비를 내는 것으로 아이의 공부가 해결된다고 믿고 만족스러워할 때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입에도 담지 못했고 또 특수 계층의 경우에만 대부분 행해지곤 하는 시술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성형이 보편화 되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한 경우가 되었으며 남편들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쌍수로 반긴다고들 하니 의술의 힘과 인간의 의욕이 잘 맞아 떨어지는 시대가 아닌가 한다. 요즘에는 심야 성인 프로에 전문의들이 나와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심지어 체위까지도 공공연하게 거론하는가 하면 어느 모임 단체에서는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고 그려보거나 상대의 것을 그리면서 서로 간에 격의 없는 친밀감을 표시하고 나누며 도울 수 있도록 하는 탐색도 논의가 되고 또한 많이 생겨나곤 하는 것을 보면, 성이라는 것이 그리 감추고 쉬쉬할 것만은 분명 아닌 세대와 세태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은 아니리라.
순결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가 그 가치를 알고 인정해 줄때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혼이라는 상황을 겪으면서 더군다나 딸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순결 교육도 중요하지만 만약에 내 딸도 결혼 후에 이러한 갈등에 괴로워하고 끝내는 파경에 이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망가진 나보다 딸아이의 장래를 더 먼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려서 학교 등에서 순결 교육을 받을 때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거나 하게 되면 받아들이지 않고 죽기를 무릅쓰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해야 한다고 사고가 굳어져 있었다. 그건 애 저녁에 남녀 교제에서조차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서 교제하는 사람들로부터 가끔은 목석같다는 빈축을 사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고지식하게 생각할 게 뭬 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나의 사고는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내 딸 아이를 생각하면서는 성에 개방적인 어미가 되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막말로 자보고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생산한 후에 파탄에 이르는 것보다는 혼전에 순결이 지켜지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맞추려고 노력해 보는 것도 중요하겠다 싶은 생각에 이르기까지 할 정도로 상처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연애의 시간이 길었다거나 동거 따위를 거쳤다고 해서 백년해로하고 잘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도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보다 신뢰이고 어쩌면 운명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이 운이라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잘 되는 경우는 일이 순조롭게 이어가고 재수가 없고 안 되려고 할 때에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기도 하니 이 노릇을 대체 어떻게 해갈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잘 살아낸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 표시내지 않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만한 것 안 격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하지만 이런 심사가 내 경우만도 아닌 것을 안다. 나도 겨우 인생에서 이런 일이나 겪으며 갈등하고 애달아하는 삶이 못내 창피하고 굴욕감에 젖어들기도 했다. 너무도 자존심이 상하여 그 치욕과 비참함에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기까지도 했었다.
다른 것은 모두 차치하고라도 내 딸이나 며느리도 이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살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또 내 경우를 빌어 자신들을 하소연해오는 이들도 적지 않음이 사실이다. 어느 이에게는 용기가 되고 어느 사람에게는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아무 쓸모가 없어도 좋다. 나는 그랬고 그렇게 느껴졌으며 그러한 숱한 갈등 속에 답답했다. 이해받고자 함이 아니라 내 안에 묵은 찌꺼기의 나를 털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울러서 아이들에게 꼭 한마디 남기고 싶다. 재능이 있어서 글을 잘 쓰는 것도 좋겠지만 비록 그런 행운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계속해서 쓰다보면 모여지고 그동안에 닦여지고 하듯이 남녀 간의 사랑도 노력하고 맞추어보고 하는 적극적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한 가운데 서로가 편하게 잘 맞는 동지를 찾아내야 불행을 최대한 줄일 수 있고 원래의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상처를 가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모쪼록 자신들이 소중한 만큼 상대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치우치지 않는 상식과 교양을 가지고 상대와의 교제와 선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자신에게 적합한 좋은 사람을 가지기 위한 노력도 아주 공들여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삶에 대해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스스로의 인생과 가정의 평화를 돕는 길이 되는 것이란 걸 경험과 체험으로 말하고 싶다. 아무리 복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그 복을 지니기 위한 성실한 노력을 준비하고 지켜가지 못하면 잃어버리게 될 수 있고, 그 상처는 인생에서 커다란 오점과 함께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 더구나 그것을 대를 이어 뻗치게 해서는 정말로 안 된다는 것을 간곡히 말하고 싶다. 나는 비록 기쁨보다 눈물을 더 많이 흘렸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부의 말을 남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IP *.70.72.121
그때 나는 사람이 무언지 몰랐다.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나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 알고 있었다. 진국을 만나고 싶었고 그것이 쉽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 말하기 거북하다. 나는 맹목적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안목이 부족한 결과를 낳았으니까. 그러니 조금 혹은 아주 어렴풋이나마 그리 알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와 살면서 혹은 이혼하면서 나는 그가 정말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매우 궁금하였다. 그는 나와 사는 동안에 장차 사업을 해야 하겠다는 거의 강박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딴에는 당시로서 약간 희소가치가 있는 기술사라는 자격증을 획득한 상태에다 거의 20여년 가까이 중견급 업체의 한 직장에서 경력을 쌓은 현장 경험이 있으니 자신은 기술을 담보하고 돈 많은 전주를 물색해서 사업을 일으켜야만 생계와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계속해서 부모 형제의 생계를 건사해야 하는데다가 늦장가에 아이가 무려 셋이나 딸리게 되니 짐이 되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입버릇처럼 그리 되뇌곤 했던 것이다. 왜 아니 그렇겠나. 남들은 한시름 놓고 인생의 덧없음을 논할 때 자기는 신혼에다가 발걸음을 겨우 떼는 아이와 고작 유치원에나 보내야 할 아이가 있을 뿐이니 그의 삶에 휴식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이 결혼의 편안함도 잠시 그를 바라보는 혹만 주렁주렁 달린 채 짐 덩이만 끼고 앉아 날로 부풀어가는 형상이었으니까 말이다.
월급쟁이 생활로는 도저히 현실의 벽을 깰 수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늘 시들한 깨 바가지를 굴려서는 도저히 변화가 없으니 한 번이라도 제대로 수박이 통째로 굴러야 한다고 염불처럼 외우고 다니며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여야 하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두텁고 탄탄하게 바탕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어려운 일이니 물주들을 쫒아 사업을 일으키려 여기저기 동분서주하기보다 조그맣게 라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도록 모색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상대의 성정을 알기에 차마 미리 입 밖에 낼 수야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이들만 어느 정도 크고 나면 가족끼리 무엇을 하는 것도 괜찮다 싶었으나, 그는 그러한 일은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었고 별로 크게 남지 않을 사업들에 대해서는 성에 차지도 않는 듯했다. 수중에 자신의 돈은 얼마간도 그다지 없는 사람이 공사 발주 한번 하면 그 공사 대금이 수백억 수천억 하는 것에 비유하니 그게 바로 빛 좋은 개살구로 말짱 허황된 일이지만 간덩이는 크게 부풀어 있었던 것이 아니겠나. 하지만 그 세계에 오래 물이 들어 있는 사람들은 물론 사람 나름이기는 하겠지만, 합리적 이중적 시선의 이성적 감각과 적절한 균형감을 유지하기가 오히려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가끔씩 오는 손님이더라도 왕건이가 걸려서 농짝이나 자동차를 파는 것과 노점상에서 단돈 천 원, 이천 원짜리를 하루 종일 발발 떨며 파는 것에 비유해 보기도 하면서,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로서는 어찌할 줄 모르기도 한 것이다. 더구나 주말이고 퇴근시간이고도 전혀 일정치 않은데다가 연일 밤늦도록 술에 쪄들다시피 하여 들어오는 그를 보면 걱정이 절로 되고는 하였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사고들이 완전하게 부합되지 않는 성격차를 보였다고 해도 만약 우리의 내적인 관계, 지칭하여 잠자리라고 하는 예의 그 속궁합이 잘 맞았더라면 우리가 좀 더 의견차를 좁힐 수 있었을 것인가? 그의 말처럼 내가 여니 여자들처럼 사랑을 맹목으로 갈망했던 것일까? Sex에 환장했으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만족해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물론 우리의 성관계는 그다지 황홀하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일종의 고통에 가깝기도 했다. 맞지 않는 것인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인지 일방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편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내 몸의 일부가 유독 약한 것인지 상대가 조절을 잘 못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아이 아빠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그림 같은 매혹적인 느낌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생겼고 그러므로 그것 때문에 못살 일은 없다고 생각되었다면 너무 단순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일까.
뭐 완전히 만족스럽거나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야 있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가면 해결 될 줄 알았다. 그러한 친밀감으로 인해 서로의 신뢰 관계가 깊어질 수 있었다면야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러한 문제를 들어 가정을 파기할 만큼의 욕심도 호기심도 없었다. 다만 무언가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찜찜한 구석들이 그것 때문인가 의심을 할 뿐 그 문제가 생활 전반을 흔들어야 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 그가 나의 밤을 황홀하게 이끌어주었거나 내가 그러한 상대자였다면 만사가 O.K가 되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격 트러블은 성적 트러블이라고들 곧잘 인식하고 서슴없이 진단하여 말을 한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정말 그럴까? 서로에게 밤의 흥분이 아침까지도 이어질 수 있을까? 환한 대낮에도 밤의 만족감 때문에 그저 무엇을 원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우스갯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이럴 때 매 맞는 여자가 삶을 지속하는 이유가 그래도 남편과의 밤일에 만족해하기 때문이라는 말들을 흔히들 하곤 한다. 요즘에는 맞고 사는 남자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는데 그럼 그들도 그러한가?
나는 결혼이 성의 만족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것까지도 만족스러울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 가운데는 그것이 기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바람이 나고 급기야 가정을 파탄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많이 보았다. 너무 좋은 것을 지속하여 느끼고 유지하려는 탐심이 오히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집안을 문제로 이끌어 가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말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상대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쉽게 말해 배우자로 생각하느냐 아니냐 하는 관념이 더 큰 사고의 기본 틀이 된다는 것이다. 그 바탕이 없으면 문제는 문제를 낳고 갈수록 태산같이 맞지 않는 부분들만 확대되고 전개되는 양상이 펼쳐지게 돼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불감증을 호소하는 것 같아 그건 아니라는 말도 하고 넘어가야겠다. 내 언어로 표현하자면 친밀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사랑이란 섹스에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하고 싶음이다.
만약에 사랑의 요소 가운데 성애가 차지하는 부분이 그토록 중요한 테마라면 온전히 가정을 지키고 꾸려갈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나. 모든 생명은 생로병사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 나면 죽고 그 안에 병이 들거나 쇠약해 지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도중에 사고라도 겹치는 불운을 겪게 되면 그럼 결혼 생활을 도중하차 해버리고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서로의 입장이 반대 상황으로 될 때에도 역시나 합당하다고 여겨지겠는가. 나는 사랑이라는 것 친밀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마치 플라토닉 한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 같다고 빈정대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나는 5년 결혼 생활하고 10년 이상 헤어져 홀로 지내보았지만 사랑의 친밀감이란 성적 만족감에 국한됨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이상이라고 하는 생각이 아직도 바뀌지 않는다. 사랑의 탄탄한 고리는 신뢰다. 상대를 바라보는 연민 바로 우리말의 측은지심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없는 그것이 부족한 사랑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 같다.
상대를 구속하겠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인간의 운명은 약속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인간이 철이 들면서 타고난 천성에 자기 의지 요소를 결합하여 운명을 결정짓고 살아가게 되는 것은 이 약속이 근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날 싫어졌다고 뻔뻔스럽게 들이대며 배 째라 하는 식의 안하무인 생활 태도로는 애시에 누구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토록 무책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변명의 여지없이 내 경우에 나도 그랬고 그 사람도 그랬으며 그 가족 모두가 합세해 그러했다. 마땅히 성인들이야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니 당연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거짓 진실과 허위로 날조하여 조장된 생활 속에서 개인사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보통의 현실일 것인가. 이러한 자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부모이고 형제니까 당연 공경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억측과, 어린아이들이야 자신들이 계획하고 원하는 방향대로 키워지고 키우면 그만이라는 섣부른 논리를 내세움은 천부당만부당 한 괴변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게 키워서 그 공치사는 또 얼마나 어떻게 해댈 것인가. 늙은 부모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사지육신이 멀쩡한 겨우 두 살 터울을 가지고 평생을 지배하려 드는 누이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내 머리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납득할 필요도 없지만은 내 아이가 있음에야 살아있는 것이 가시방석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이년의 업보인 것이다.
또한 나는 웃기는 경험 가운데 하나로 결혼 전에 배우자감을 소개받거나 하면 어떤 사람 가운데는 성적 관계를 은근슬쩍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그것을 먼저 전제로 요구하려 드는 이들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이 문란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 받아온 나로서는 타협이 이루어질 수 없는 부분이어서 일언지하에 차라리 교제를 끊어버리는 편을 선택했다. 나는 내게 무슨 흠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렇게 자보고 선택하기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다는 심리가 상대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 아닐까 일단 의심부터 가져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런 표시도 뭐도 안 나는 지들 몸과 여자 몸은 다른데 그때 가서 이유를 달면 기껏 뭐 주고 욕먹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반론을 펼 것이다. 서로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고. 합의 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나는 이 부분에서 그게 서로 간에 정당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물주가 여자들을 심히 불공평하고 자학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와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보니 만약 그게 그렇게 양자 중 어느 한 사람에게 무지하게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아직도 나 같으면 그 여자의 순결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처리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해서 여전히 망설여 질 것 같다. 따라서 나는 남자의 동정도 여자들의 순결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어떻게 어떤 관계를 맺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평생의 습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지기도 한다. 마치 운전할 때의 습관처럼 말이지. 이것도 운전이라면 운행이요 한순간 여행이라면 여행일 것이다.
한때 나는 내 결혼의 불협화음이 성적 불만족의 사유도 어느 정도는 동반하는 것일까를 두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연년생 셋째 아이를 낳고 나서는 그 흔하게 유행하는 예쁜이 수술이란 것을 받아나 볼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이다. 몸에 칼 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면서도 말이다. 사랑을 지키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도 별별 생각을 다 해본 것이다. 또한 언젠가는 그가 나로 하여금 그러한 생각으로 주눅이 들게 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내 내가 병원을 찾아 갔을 때 시시한 개인 병원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의사는 내게 물었다. “혹시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수술을 요하십니까?”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네”라고 짧고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내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고 만약 그런 문제라면 시술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자신의 견해를 소상히 밝혀 주는 것이었다.
수술을 한다고 해도 대게는 6개월이면 원상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둘의 마음과 정신상태의 문제이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핵심을 짚어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연년생 세 아이를 낳은 여자의 고충을 담당의사가 측은하게 생각해서 더욱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다. 한마디로 여자 쪽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셋 모두를 생기는 대로 자연분만을 한 여자가 이혼을 쉽게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경험상 아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이는 내가 합의 이혼 서류를 낼 때의 담당 검사의 질문 장면과도 매우 흡사하였다. 검사는 나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듯 하면서 위자료는 합의 하였는지를 묻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매우 당혹해 했다.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사람처럼.) 논리에 너무나 합당한 의사의 충고를 듣고 사랑받아 보려는 의지를 접고 수술을 철회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을 문제로 삼는다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결심을 한편으로 굳히면서 진찰실을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의사의 거짓 없는 설명은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무조건 시술을 부추기며 돈만 벌려는 병원이 아니었고 사기를 치는 의사가 아니어서 나는 그 의사를 지금도 존경한다. 후에 어느 병원으로 옮겨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심을 팔아 의술을 행하지 않고 인술을 행하는 그 의사는 나로 하여금 고통스럽지만 타인을 위해 내 이성과 몸을 맡기는 여자가 아니라, 내 의지로 살아가고 홀로서야 함을 인지시킨 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그와 이혼 후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다른 부서의 과들을 지켜보니 의외로 그러한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서 정말 놀랐다. 심지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수술을 셀 수 없을 만치 많이 시술하고 받는 것이었다. 우연한 검진을 위하여 부인과를 내방하는 특히 4~50대 중년 여성의 경우에도 의사의 권유에 미혹되어 해당 분야 시술을 입원한 김에 예닐곱 가지를 한꺼번에 겹쳐서 시술해 대는 것이 보통이어서 너무나 놀라웠다. 일시적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술결과에 대부분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노화에 대한 그리고 자신들의 상태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이를 무턱대고 학원에 보내는 학부모가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학원비를 내는 것으로 아이의 공부가 해결된다고 믿고 만족스러워할 때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입에도 담지 못했고 또 특수 계층의 경우에만 대부분 행해지곤 하는 시술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성형이 보편화 되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한 경우가 되었으며 남편들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쌍수로 반긴다고들 하니 의술의 힘과 인간의 의욕이 잘 맞아 떨어지는 시대가 아닌가 한다. 요즘에는 심야 성인 프로에 전문의들이 나와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심지어 체위까지도 공공연하게 거론하는가 하면 어느 모임 단체에서는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고 그려보거나 상대의 것을 그리면서 서로 간에 격의 없는 친밀감을 표시하고 나누며 도울 수 있도록 하는 탐색도 논의가 되고 또한 많이 생겨나곤 하는 것을 보면, 성이라는 것이 그리 감추고 쉬쉬할 것만은 분명 아닌 세대와 세태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은 아니리라.
순결은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가 그 가치를 알고 인정해 줄때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혼이라는 상황을 겪으면서 더군다나 딸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순결 교육도 중요하지만 만약에 내 딸도 결혼 후에 이러한 갈등에 괴로워하고 끝내는 파경에 이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망가진 나보다 딸아이의 장래를 더 먼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려서 학교 등에서 순결 교육을 받을 때 만약에 내가 누군가에 의해 성폭력을 당하거나 하게 되면 받아들이지 않고 죽기를 무릅쓰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해야 한다고 사고가 굳어져 있었다. 그건 애 저녁에 남녀 교제에서조차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서 교제하는 사람들로부터 가끔은 목석같다는 빈축을 사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고지식하게 생각할 게 뭬 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나의 사고는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내 딸 아이를 생각하면서는 성에 개방적인 어미가 되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막말로 자보고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생산한 후에 파탄에 이르는 것보다는 혼전에 순결이 지켜지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맞추려고 노력해 보는 것도 중요하겠다 싶은 생각에 이르기까지 할 정도로 상처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연애의 시간이 길었다거나 동거 따위를 거쳤다고 해서 백년해로하고 잘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도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보다 신뢰이고 어쩌면 운명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다.
인생에는 어쩔 수 없이 운이라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잘 되는 경우는 일이 순조롭게 이어가고 재수가 없고 안 되려고 할 때에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기도 하니 이 노릇을 대체 어떻게 해갈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잘 살아낸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 표시내지 않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만한 것 안 격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하지만 이런 심사가 내 경우만도 아닌 것을 안다. 나도 겨우 인생에서 이런 일이나 겪으며 갈등하고 애달아하는 삶이 못내 창피하고 굴욕감에 젖어들기도 했다. 너무도 자존심이 상하여 그 치욕과 비참함에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기까지도 했었다.
다른 것은 모두 차치하고라도 내 딸이나 며느리도 이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살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또 내 경우를 빌어 자신들을 하소연해오는 이들도 적지 않음이 사실이다. 어느 이에게는 용기가 되고 어느 사람에게는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아무 쓸모가 없어도 좋다. 나는 그랬고 그렇게 느껴졌으며 그러한 숱한 갈등 속에 답답했다. 이해받고자 함이 아니라 내 안에 묵은 찌꺼기의 나를 털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울러서 아이들에게 꼭 한마디 남기고 싶다. 재능이 있어서 글을 잘 쓰는 것도 좋겠지만 비록 그런 행운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계속해서 쓰다보면 모여지고 그동안에 닦여지고 하듯이 남녀 간의 사랑도 노력하고 맞추어보고 하는 적극적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한 가운데 서로가 편하게 잘 맞는 동지를 찾아내야 불행을 최대한 줄일 수 있고 원래의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상처를 가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모쪼록 자신들이 소중한 만큼 상대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치우치지 않는 상식과 교양을 가지고 상대와의 교제와 선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자신에게 적합한 좋은 사람을 가지기 위한 노력도 아주 공들여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삶에 대해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스스로의 인생과 가정의 평화를 돕는 길이 되는 것이란 걸 경험과 체험으로 말하고 싶다. 아무리 복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그 복을 지니기 위한 성실한 노력을 준비하고 지켜가지 못하면 잃어버리게 될 수 있고, 그 상처는 인생에서 커다란 오점과 함께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 더구나 그것을 대를 이어 뻗치게 해서는 정말로 안 된다는 것을 간곡히 말하고 싶다. 나는 비록 기쁨보다 눈물을 더 많이 흘렸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부의 말을 남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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