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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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안의 저도 모르는 힘을 처음 자각한 것은 서른 다섯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내 마음 하나 맘대로 안 되네’ 하는 정도야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그때 그 느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직장 생활 10년차를 맞고 있는 워킹맘이었습니다.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터에 성실한 남편과 건강하고 예쁜 남매까지 갖추었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무지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 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잘 못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무료하고 건조한 일상의 사막을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 탈출,
그리고 그 모험 속에서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나’를 만날 수 있는 레이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자주 들르던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의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모집공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눈만 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온 몸의 신경이 일제히 그 문구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모티브로, 평범한 직장인에서 작가이자 1인 기업가로 변신에 성공한 저자의 실제 변화과정을 기반으로 설계한 개인대학원이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그 과정에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을 확인하고는 그 비현실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네 살박이 아들과 젖먹이 딸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 1년간 주 35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머리의 판단이었습니다. 아무리 달래고 또 달래도 몸은 막무가네였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일도 육아도 도무지 손에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연구원 제도’라고 불리는 그 개인대학원의 응시원서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이것을 바로 운명이라고 한다는 것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던 저는 앉은 그 자리에서 까페문을 닫는 그 시간까지 미동도 없이 원서를 써내려갔습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일을 위해 살아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 선택은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원서를 썼던 것치고는 운 좋게 합격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일단 어떻게 과정을 이수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것인가가 가장 시급했습니다. 이전의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간 큰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육아휴직하고 직장대신 도서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가족들에게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영웅의 여정’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엄청난 모험은 점점 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만 하면 스승처럼 성공한 작가가 되는 줄만 알았는데 어이없게도 1년간의 과정이 다 끝날 무렵 저는 ‘작가’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소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희미하게나마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누구를 어떻게 돕고 싶다는 건지가 분명하지가 않았습니다. 작정을 하고 휴직까지 하고 덤벼든 자기탐구였지만 좀처럼 그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속이 타들어가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쩔 수 없어 감당하고 있던 ‘엄마’라는 역할이야말로 제가 꿈꾸던 ‘사람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정말로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여기서 내가 정말 해야할 일은 아이의 성장을 돕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전념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버겁기만 하던 육아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이 작은 깨달음으로 삶의 결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남몰래 기대했던 것처럼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일상은 무료하고 건조한 사막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음의 경험’인가 하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을 흠뻑 사랑하는 시간을 통해 꿈꾸는 새 삶을 일구는데 필요한 필살기까지 연마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고생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보물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온 신화속의 영웅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기대했던 새로운 ‘직업적 성공’이라는 보물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값진 성과가 분명했습니다. 제 안의 알 수 없는 힘이 위험하고 두렵기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첫 번째 체험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