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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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비해 집도 크고 땅도 넓고 나는 그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때부터 우리 집이 보통의 중간은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교양인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에는 내가 서울 시민이며 교양인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때에 내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 내가 표준말을 사용하는 서울 시민이며 이만하면 보통의 중급은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루는 내 친구 혜숙이가 내게 물었다. “너는 너희 집을 어떻게 생각해?” 하고. 아마 환경조사서 란에서 그러한 사항들을 체크해야 해서 우리가 더욱 그런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망설였다. 그냥 얼버무리듯 “보통?” 이라고 짧게 말하며 내 기준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몰라서 약간 자신 없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확인이라도 받듯 친구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 물음에 내 친구 혜숙이도 19호의 단칸방에 몇 식구가 살기에도 좁은 그러니까 우리 오빠들이 쓰는 방보다도 적은 방에서 온 식구가 살면서도 자기도 자기가 보통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나는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보통의 경제생활을 하는, 일반 상식을 지닌, 표준말을 쓰는 이라는 말의 모호한 기준에 대해 갈등이 있었고 이미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현재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혜숙이의 담담하고 당당한 어조에 힘입어 그러면 나도 내가 중간을 택하는 것에 대해 무리가 없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 아이 아빠는 자주 집에 있기도 했는데 왜냐 하면 야간 근무 조이었기 때문이다. 그 집에 놀러 갈 때면 분유 깡통에 담배꽁초가 늘 수북하였다. 하루는 그 아이 아빠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우리는 괜시리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그 아이가 내게 제안을 해오는 것이었다. “우리 담배 피워볼래?” 하고 말이다. 언니와 피워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워봤다는 말에 안심을 하고 그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들처럼 동그랗게 도넛 모양을 만들어 보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누가 올지도 모르고 겁이 나는데다가 들킬 가봐 마음이 조마조마 해서 이내 꺼버리고 말았다. 어른들 말씀이 사람이 입이 작으면 소심하다고 하는데 내가 입이 작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나의 배짱 없음을 한탄해 보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피워보면서 궁금증을 풀어본 것이 어찌나 명쾌한 해답이라도 얻은 듯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이후로 담배를 피워보지 않았지만 궁금증도 없었다. 아주 가끔은 여자들 가운데 제법 근사하게 담배를 피우는 이가 더러 있기는 한데 대부분은 그리 멋있어 보이지가 않아서 별로 당기지는 않는다. 다만 살면서 너무나 답답할 때는 담배라도 한 번 물어볼까하는 심정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어렵다고 그 모든 것을 다 해댄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리하며 더 힘들거나 기분 좋을 때 피겠다고 하면서 꾹 참고 넘겨버렸다. 어쩌면 너무 고지식하게 나를 얽어매고 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래 그런 습관이 배어 그런지 좋지도 않은 것을 해가며 걱정하기는 더욱 싫어서 하지 않는다.
그 아이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한국모방에 다녔다. 그러니까 방하나 부엌 하나의 여러 집이 다닥다닥 붙어서 일자로 지어진 19호에 혜숙이네 집이 있었는데 그 뒤편으로는 바로 한국모방으로 이어지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언덕 같은 산을 타고 내려가면 한국모방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니지 않고 빙 둘러서 우리 동네 앞 정문을 통과하여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한국모방이 있었고 모두들 그렇게 다녔다. 우리는 가끔씩 심심할 때면 철조망의 개구멍받이 같은 둥그런 공간을 벌리고 들어가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그 이파리들이 달린 줄기를 꺾어서는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이파리를 한 장 씩 떼어내어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에게는 꿀밤을 먹이고는 했다.
또 신이라고 하는 우리보다 학년이 하나 높은 사내아이가 제 형과 칡뿌리를 캐오면 그것을 얻어먹겠다고 우르르 달려들기도 하였다. 신이는 얼굴이 뽀얗게 생긴 귀공자 스타일에다가 검은 안경테를 쓴 아이였는데 나는 그것을 먹겠다고 따라다니기가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존심이 상해서 공주처럼 그냥 앉아있고는 했다. 그러면 그 아이가 “먹어볼래?” 하며 가져다주곤 했는데 그럴 때야 비로소 못이기는 척 받아들곤 하였다. 그 아이 형 중에는 우리 오빠 또래의 용철이라는 오빠가 있었는데, 얼굴이 좀 무섭게 생기고 성깔이 있어보였으며 문제 학생들의 복장을 주로 하고 다니곤 했다. 패싸움을 잘 하게 생긴 남성다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 오빠가 너무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 집 식구들을 떠올려 보면 식이와 용철이 오빠 사이에 딸이 둘 있었다. 막내 언니는 그때 유행하던 못나니 삼형제 인형의 모습처럼 좀 심술 맞고 욕심이 많게 생겼었는데 김치찌개를 아주 잘 끓였었다. 그 집 식구들은 우리 집과는 달리 김치찌개를 끓일 때면 누우런 마가린을 한 스픈 푹 떠서 돼지고기 대신 넣어 끓이곤 하였었는데 그 향이 은은하고 삼삼하니 제법 맛깔스러웠다.
하얀 쌀밥에 금방 끓인 김치찌개에 마가린을 풀고 제법 듬성듬성 큼직하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를 얹어 먹는 맛은 가희 일품이었다. 그 언니에게 배워서 나도 몇 번 끓여 먹어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땐가 나는 엄마가 지은 새집에서 살게 되었었는데 그 무렵 집을 다 지은 엄마가 갑자기 무척 아프셨다. 연일 요강에 시뻘건 선지피가 둥둥 떠다니고는 하며 하혈을 심하게 하더니 급기야 병원에 입원해서 대수술을 받게 되었었다. 당시 진단은 자궁암 초기 증세로서 엄마는 마흔 초반에 자궁을 완전히 다 들어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가 지은 집은 슬라브 양옥집이었다. 우리 집 부엌에는 아궁이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안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였고 하나는 작은 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였다. 당시에는 연탄으로 난방을 할 때라서 뒤로 돌아가는 담 벽에는 누구나 너나할 것 없이 연탄을 재놓고 살았다. 연탄을 많이 준비해 놓고 살아야 마음이 든든하고 마치 그것이 부의 척도라도 되듯이 그것을 많이 재놓고 살면 그만큼 푸근하였다. 한 번에 몇 십장부터 몇 백 장 몇 천 장씩 광에다가 재놓고 살기도 하곤 했던 것이다.
앞글에서 말한 안방과 마주 붙었다는 창고라고 했던 그 광은 사실 연탄을 꽉 채워놓기 위해 지어놓은 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의는 시커먼 연탄으로 꽉 차여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광에 연탄을 꽉 채워 놓으면 엄마는 그리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살림 걱정을 잊는 듯이 든든해하시곤 하였었다. 두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이라 연탄이 많이도 들어가기도 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김장과 연탄 사놓는 일이었다. 우리 동네는 언덕이 진 비탈길로 되어있기 때문에 눈이 오고 어름이 어는 한겨울에는 연탈 배달에 신경이 쓰여서 초겨울에 미리 연탄을 들여놓는 일이 중요한 대사였다. 연탄은 주로 큰오빠가 가장 많이 갈고는 했는데 때로는 그 명령이 작은오빠에게로 떨어지고 그러면 영락없이 막내오빠에게로까지 도달 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 다음이 내 차례인데 그것을 하기 싫은 막내오빠가 나를 시키지는 못하고 시비를 걸면서 발로 차고는 하며 찝적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빽빽대면서 한 판 붙자고 덤비는 것이었다. 물론 번번이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인데다가 다섯 살이나 위인지라 감히 덤빌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때리고 도망치니 매번 골탕만 먹는 것이다. 그래도 억울해서 그냥 넘길 수가 없으니 바락바락 대들면서 나는 막내오빠가 무지하게 치사하고 쫌스럽고 못났다고 생각했다. 아니 우리 집에서 막내오빠의 별명이 그러하기도 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인 나를 갈구는 자체가 그러한 것이라고들 했다. 게다가 막내오빠는 바로 두 살 위인 작은오빠에게 전혀 덤빌 엄두도 못 내고 살았으니까. 그러니 그의 고충도 그러할 만하기는 했겠지만 나로서는 무지 억울한 일이었다. 하루는 나를 갈구다가 작은오빠에게 무지하게 혼났는데 작은오빠가 없을 때 나도 그 앙갚음을 받게 되기도 해서 그 억울함에 막내오빠가 미워서 죽을 뻔 했다.
연탄을 가득 채워놓거나 하던 그 광에는 사다리와 쌀을 까부는 키 그리고 소쿠리 같은 것이 걸려있기도 했으며 닭도 키웠었다. 아니 닭이 꼭 그 광에 들어가서 알을 낳고는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가지를 들고 가서 매일 아침 그 광에서 닭이 까놓은 달걀을 몇 개씩 집어오고는 했었다. 나는 고명딸이기는 했지만 무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밥도 할 줄 알았다. 콩나물도 엄마처럼 무치곤 했는데 너무 잘 무쳤다고 당연히 칭찬 받았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했던지 지금도 생각난다. 콩나물을 삶아서 사근사근하게 씹히라고 얼른 찬물을 부어 소쿠리에 받쳐서 묻히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계란 후라이쯤이야 누워서 떡먹기인 것이었다. 사실 내가 밥을 잘하게 된 이유는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어서가 아니었다.
친한 친구 중에 초등학교 때부터 여태까지 쭉 만나오는 선화라고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아이가 살림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집에 놀러가서 다 배우곤 한 것이었다. 그 아이 어머니께서도 혜숙이네 엄마처럼 한국모방에 다니시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계셨다. 물론 그 애 아버지도 돈을 벌려고 무척 노력하셨지만 당시에는 하는 일마다 그리 잘 안 되어서 내 친구 어머니께서 여간 고생을 많이 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내 친구는 동네 입구에서 살았고 역시나 민간인으로서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와 내가 편하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애의 심성이 무던하였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 애는 쌍둥이 오빠 둘에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동 학년 이었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의 여동생이 있는 딸 중에서 맏딸이었으며 살림을 아주 잘하였다. 그 애 어머니가 그리 살림 솜씨가 있었는데 그 아이네 부엌은 내가 대전에 살 때처럼 그때까지도 흙바닥 이었지만 그 집의 그릇은 언제나 반짝반짝 하였다. 어찌나 깔끔한지 하얀 양은솥에 물방울 하나 떨어져 얼룩진 모습이 전혀 없고 늘 반질반질 하였었다. 우리 엄마도 깔끔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이시지만 내 보기에는 그 애 어머님 살림 솜씨가 훨씬 좋다고 생각되어서 언젠가 내가 내 친구 집을 담 너머서 가리키며 그 애 어머니 살림 솜씨를 우리 엄마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우리 엄마도 그 애 어머니 살림 솜씨를 보고 놀라시며 칭찬하고는 하셨다.
예전에는 가볍고 후루룩 잘 끓는 양은솥과 양은냄비가 한 때 유행처럼 번져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연탄불에 올려놓고 쓰다보면 국물이 넘치거나 해서 냄비 손잡이 부근이 잘 눌어붙고 또한 화력 조절이 어려워 곧잘 태우게 되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것을 쓰고 나서 고운 모래를 살짝 섞어 이쁜이 비누로 박박 문질러 닦으면 시커멓게 눌어붙은 찌든 때가 쏙 빠지고 여간 뽀얗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이는 것이 아니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놋그릇 등을 닦을 때에도 동일한 방법을 쓰거나 모래 대신 빼빠에 이쁜이 비누를 살짝 묻혀서 닦고는 하였는데 그러면 그리 깨끗하게 닦이곤 하였다. 그러니까 그때에는 퐁퐁이나 트리오 등의 그런 식기세척제가 나오기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요즘은 친환경적이라 그러한 것들도 쓰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 집은 요즘에도 암웨이 등의 비싼 식기 세척제를 쓰지 않고 두부만 하게 빨래비누처럼 허옇게 만들어 파는 것을 사용하고 있다. 어머니는 양이 많고 싸고 저렴해서 그런지 그게 좋다고 하신다.
하여간 그 아이는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는 그 말에 해당되는 장본인이기라도 한 듯이 아주 살림을 방짜로 잘했다. 어머니를 도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천성적으로 타고난 사람처럼 살림을 잘 했다. 그 애는 정말 일찍이 어린 아이라도 어린 애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어른 한 몫을 당당히 해내며 그 집안 살림을 통째로 다 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찬도 어찌나 잘 만들고 밥도 연탄불에 한 솥을 해대는 데도 고슬고슬하게 화력조절을 해가며 잘도 하는지 나는 그 아이네 집에 가서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쭈그리고 앉아서 그 애가 하는 일을 도와가며 오매가매 다 배웠던 것이다. 애가 너무나 살림을 잘해서 언젠가 나는 우리 막내오빠랑 연결시켜 줄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우리 막내오빠가 우리 집 규칙을 어기고 홀라당 연애결혼을 하는 바람에 산통이 깨져버렸지만 말이다. 우리가 시누이 올케사이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 애도 착한데다가 그의 오빠들도 재미났고 여동생도 나를 아주 잘 따라서 그때이후 우리는 격이 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내 친구는 지금도 살림을 너무나 잘하고 잘 산다. 남편은 국방부 사무관인데 성실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고 공부를 해도 집에서 문 꼭 닫고 자리 뜨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제때에 승진도 꼬박꼬박 하면서 도통 말썽이라고는 피우는 것이 하나도 없이 언제나 싱글벙글하며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다. 그에게 한 분 계셨던 홀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더욱 가정적이 되었으며 꾸준히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다. 지금도 나는 그 애 집에 가면 밥을 두 그릇씩 먹고 오고는 한다. 어렸을 때처럼 언제나 마음이 훈훈하고 언제라도 느닷없이 덜컥 찾아가도 전혀 스스럼이 없는 그런 친구이다. 그 집 식구들도 내가 가면 의당 두 그릇을 예상하고 내어 놓는다. 두 그릇을 안 먹고 온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쩌다 좋은 술이라도 있으면 서슴없이 내놓는다. 그때까지 따지 않고 아껴둔 술을 한데 모여 한 잔씩을 하는 것이다.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는 너무나 못 가봤는데 올 봄에는 그 아이와 그 애 부모님 댁에 다녀와야겠다. 그 애 어머니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내 엄마보다 더 절실하게 자신의 경험을 들어 말씀해 주셨다. “애야, 열심히 일하면서 세월을 이겨라. 너는 그래도 나중에라도 볼 수 있잖니?” 다 키운 쌍둥이 자식 하나를 사랑 땀도 못하고 장가들 무렵에 사고로 잃은 슬픔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오로지 그 말씀만 명심하여 생활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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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아빠는 자주 집에 있기도 했는데 왜냐 하면 야간 근무 조이었기 때문이다. 그 집에 놀러 갈 때면 분유 깡통에 담배꽁초가 늘 수북하였다. 하루는 그 아이 아빠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우리는 괜시리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그 아이가 내게 제안을 해오는 것이었다. “우리 담배 피워볼래?” 하고 말이다. 언니와 피워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워봤다는 말에 안심을 하고 그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들처럼 동그랗게 도넛 모양을 만들어 보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누가 올지도 모르고 겁이 나는데다가 들킬 가봐 마음이 조마조마 해서 이내 꺼버리고 말았다. 어른들 말씀이 사람이 입이 작으면 소심하다고 하는데 내가 입이 작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나의 배짱 없음을 한탄해 보기도 하였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피워보면서 궁금증을 풀어본 것이 어찌나 명쾌한 해답이라도 얻은 듯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이후로 담배를 피워보지 않았지만 궁금증도 없었다. 아주 가끔은 여자들 가운데 제법 근사하게 담배를 피우는 이가 더러 있기는 한데 대부분은 그리 멋있어 보이지가 않아서 별로 당기지는 않는다. 다만 살면서 너무나 답답할 때는 담배라도 한 번 물어볼까하는 심정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어렵다고 그 모든 것을 다 해댄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리하며 더 힘들거나 기분 좋을 때 피겠다고 하면서 꾹 참고 넘겨버렸다. 어쩌면 너무 고지식하게 나를 얽어매고 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래 그런 습관이 배어 그런지 좋지도 않은 것을 해가며 걱정하기는 더욱 싫어서 하지 않는다.
그 아이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한국모방에 다녔다. 그러니까 방하나 부엌 하나의 여러 집이 다닥다닥 붙어서 일자로 지어진 19호에 혜숙이네 집이 있었는데 그 뒤편으로는 바로 한국모방으로 이어지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언덕 같은 산을 타고 내려가면 한국모방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니지 않고 빙 둘러서 우리 동네 앞 정문을 통과하여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한국모방이 있었고 모두들 그렇게 다녔다. 우리는 가끔씩 심심할 때면 철조망의 개구멍받이 같은 둥그런 공간을 벌리고 들어가 아카시아 꽃잎을 따먹고 그 이파리들이 달린 줄기를 꺾어서는 가위 바위 보를 하면서 이파리를 한 장 씩 떼어내어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에게는 꿀밤을 먹이고는 했다.
또 신이라고 하는 우리보다 학년이 하나 높은 사내아이가 제 형과 칡뿌리를 캐오면 그것을 얻어먹겠다고 우르르 달려들기도 하였다. 신이는 얼굴이 뽀얗게 생긴 귀공자 스타일에다가 검은 안경테를 쓴 아이였는데 나는 그것을 먹겠다고 따라다니기가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존심이 상해서 공주처럼 그냥 앉아있고는 했다. 그러면 그 아이가 “먹어볼래?” 하며 가져다주곤 했는데 그럴 때야 비로소 못이기는 척 받아들곤 하였다. 그 아이 형 중에는 우리 오빠 또래의 용철이라는 오빠가 있었는데, 얼굴이 좀 무섭게 생기고 성깔이 있어보였으며 문제 학생들의 복장을 주로 하고 다니곤 했다. 패싸움을 잘 하게 생긴 남성다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 오빠가 너무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 집 식구들을 떠올려 보면 식이와 용철이 오빠 사이에 딸이 둘 있었다. 막내 언니는 그때 유행하던 못나니 삼형제 인형의 모습처럼 좀 심술 맞고 욕심이 많게 생겼었는데 김치찌개를 아주 잘 끓였었다. 그 집 식구들은 우리 집과는 달리 김치찌개를 끓일 때면 누우런 마가린을 한 스픈 푹 떠서 돼지고기 대신 넣어 끓이곤 하였었는데 그 향이 은은하고 삼삼하니 제법 맛깔스러웠다.
하얀 쌀밥에 금방 끓인 김치찌개에 마가린을 풀고 제법 듬성듬성 큼직하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를 얹어 먹는 맛은 가희 일품이었다. 그 언니에게 배워서 나도 몇 번 끓여 먹어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땐가 나는 엄마가 지은 새집에서 살게 되었었는데 그 무렵 집을 다 지은 엄마가 갑자기 무척 아프셨다. 연일 요강에 시뻘건 선지피가 둥둥 떠다니고는 하며 하혈을 심하게 하더니 급기야 병원에 입원해서 대수술을 받게 되었었다. 당시 진단은 자궁암 초기 증세로서 엄마는 마흔 초반에 자궁을 완전히 다 들어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가 지은 집은 슬라브 양옥집이었다. 우리 집 부엌에는 아궁이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안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였고 하나는 작은 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였다. 당시에는 연탄으로 난방을 할 때라서 뒤로 돌아가는 담 벽에는 누구나 너나할 것 없이 연탄을 재놓고 살았다. 연탄을 많이 준비해 놓고 살아야 마음이 든든하고 마치 그것이 부의 척도라도 되듯이 그것을 많이 재놓고 살면 그만큼 푸근하였다. 한 번에 몇 십장부터 몇 백 장 몇 천 장씩 광에다가 재놓고 살기도 하곤 했던 것이다.
앞글에서 말한 안방과 마주 붙었다는 창고라고 했던 그 광은 사실 연탄을 꽉 채워놓기 위해 지어놓은 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의는 시커먼 연탄으로 꽉 차여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광에 연탄을 꽉 채워 놓으면 엄마는 그리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살림 걱정을 잊는 듯이 든든해하시곤 하였었다. 두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이라 연탄이 많이도 들어가기도 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김장과 연탄 사놓는 일이었다. 우리 동네는 언덕이 진 비탈길로 되어있기 때문에 눈이 오고 어름이 어는 한겨울에는 연탈 배달에 신경이 쓰여서 초겨울에 미리 연탄을 들여놓는 일이 중요한 대사였다. 연탄은 주로 큰오빠가 가장 많이 갈고는 했는데 때로는 그 명령이 작은오빠에게로 떨어지고 그러면 영락없이 막내오빠에게로까지 도달 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 다음이 내 차례인데 그것을 하기 싫은 막내오빠가 나를 시키지는 못하고 시비를 걸면서 발로 차고는 하며 찝적대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빽빽대면서 한 판 붙자고 덤비는 것이었다. 물론 번번이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인데다가 다섯 살이나 위인지라 감히 덤빌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때리고 도망치니 매번 골탕만 먹는 것이다. 그래도 억울해서 그냥 넘길 수가 없으니 바락바락 대들면서 나는 막내오빠가 무지하게 치사하고 쫌스럽고 못났다고 생각했다. 아니 우리 집에서 막내오빠의 별명이 그러하기도 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인 나를 갈구는 자체가 그러한 것이라고들 했다. 게다가 막내오빠는 바로 두 살 위인 작은오빠에게 전혀 덤빌 엄두도 못 내고 살았으니까. 그러니 그의 고충도 그러할 만하기는 했겠지만 나로서는 무지 억울한 일이었다. 하루는 나를 갈구다가 작은오빠에게 무지하게 혼났는데 작은오빠가 없을 때 나도 그 앙갚음을 받게 되기도 해서 그 억울함에 막내오빠가 미워서 죽을 뻔 했다.
연탄을 가득 채워놓거나 하던 그 광에는 사다리와 쌀을 까부는 키 그리고 소쿠리 같은 것이 걸려있기도 했으며 닭도 키웠었다. 아니 닭이 꼭 그 광에 들어가서 알을 낳고는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가지를 들고 가서 매일 아침 그 광에서 닭이 까놓은 달걀을 몇 개씩 집어오고는 했었다. 나는 고명딸이기는 했지만 무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밥도 할 줄 알았다. 콩나물도 엄마처럼 무치곤 했는데 너무 잘 무쳤다고 당연히 칭찬 받았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했던지 지금도 생각난다. 콩나물을 삶아서 사근사근하게 씹히라고 얼른 찬물을 부어 소쿠리에 받쳐서 묻히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계란 후라이쯤이야 누워서 떡먹기인 것이었다. 사실 내가 밥을 잘하게 된 이유는 엄마가 나에게 가르쳐주어서가 아니었다.
친한 친구 중에 초등학교 때부터 여태까지 쭉 만나오는 선화라고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아이가 살림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집에 놀러가서 다 배우곤 한 것이었다. 그 아이 어머니께서도 혜숙이네 엄마처럼 한국모방에 다니시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계셨다. 물론 그 애 아버지도 돈을 벌려고 무척 노력하셨지만 당시에는 하는 일마다 그리 잘 안 되어서 내 친구 어머니께서 여간 고생을 많이 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내 친구는 동네 입구에서 살았고 역시나 민간인으로서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와 내가 편하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 애의 심성이 무던하였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 애는 쌍둥이 오빠 둘에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동 학년 이었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의 여동생이 있는 딸 중에서 맏딸이었으며 살림을 아주 잘하였다. 그 애 어머니가 그리 살림 솜씨가 있었는데 그 아이네 부엌은 내가 대전에 살 때처럼 그때까지도 흙바닥 이었지만 그 집의 그릇은 언제나 반짝반짝 하였다. 어찌나 깔끔한지 하얀 양은솥에 물방울 하나 떨어져 얼룩진 모습이 전혀 없고 늘 반질반질 하였었다. 우리 엄마도 깔끔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반이시지만 내 보기에는 그 애 어머님 살림 솜씨가 훨씬 좋다고 생각되어서 언젠가 내가 내 친구 집을 담 너머서 가리키며 그 애 어머니 살림 솜씨를 우리 엄마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우리 엄마도 그 애 어머니 살림 솜씨를 보고 놀라시며 칭찬하고는 하셨다.
예전에는 가볍고 후루룩 잘 끓는 양은솥과 양은냄비가 한 때 유행처럼 번져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연탄불에 올려놓고 쓰다보면 국물이 넘치거나 해서 냄비 손잡이 부근이 잘 눌어붙고 또한 화력 조절이 어려워 곧잘 태우게 되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것을 쓰고 나서 고운 모래를 살짝 섞어 이쁜이 비누로 박박 문질러 닦으면 시커멓게 눌어붙은 찌든 때가 쏙 빠지고 여간 뽀얗고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이는 것이 아니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놋그릇 등을 닦을 때에도 동일한 방법을 쓰거나 모래 대신 빼빠에 이쁜이 비누를 살짝 묻혀서 닦고는 하였는데 그러면 그리 깨끗하게 닦이곤 하였다. 그러니까 그때에는 퐁퐁이나 트리오 등의 그런 식기세척제가 나오기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요즘은 친환경적이라 그러한 것들도 쓰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 집은 요즘에도 암웨이 등의 비싼 식기 세척제를 쓰지 않고 두부만 하게 빨래비누처럼 허옇게 만들어 파는 것을 사용하고 있다. 어머니는 양이 많고 싸고 저렴해서 그런지 그게 좋다고 하신다.
하여간 그 아이는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는 그 말에 해당되는 장본인이기라도 한 듯이 아주 살림을 방짜로 잘했다. 어머니를 도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천성적으로 타고난 사람처럼 살림을 잘 했다. 그 애는 정말 일찍이 어린 아이라도 어린 애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어른 한 몫을 당당히 해내며 그 집안 살림을 통째로 다 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찬도 어찌나 잘 만들고 밥도 연탄불에 한 솥을 해대는 데도 고슬고슬하게 화력조절을 해가며 잘도 하는지 나는 그 아이네 집에 가서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쭈그리고 앉아서 그 애가 하는 일을 도와가며 오매가매 다 배웠던 것이다. 애가 너무나 살림을 잘해서 언젠가 나는 우리 막내오빠랑 연결시켜 줄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우리 막내오빠가 우리 집 규칙을 어기고 홀라당 연애결혼을 하는 바람에 산통이 깨져버렸지만 말이다. 우리가 시누이 올케사이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 애도 착한데다가 그의 오빠들도 재미났고 여동생도 나를 아주 잘 따라서 그때이후 우리는 격이 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내 친구는 지금도 살림을 너무나 잘하고 잘 산다. 남편은 국방부 사무관인데 성실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고 공부를 해도 집에서 문 꼭 닫고 자리 뜨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제때에 승진도 꼬박꼬박 하면서 도통 말썽이라고는 피우는 것이 하나도 없이 언제나 싱글벙글하며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다. 그에게 한 분 계셨던 홀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더욱 가정적이 되었으며 꾸준히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다. 지금도 나는 그 애 집에 가면 밥을 두 그릇씩 먹고 오고는 한다. 어렸을 때처럼 언제나 마음이 훈훈하고 언제라도 느닷없이 덜컥 찾아가도 전혀 스스럼이 없는 그런 친구이다. 그 집 식구들도 내가 가면 의당 두 그릇을 예상하고 내어 놓는다. 두 그릇을 안 먹고 온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쩌다 좋은 술이라도 있으면 서슴없이 내놓는다. 그때까지 따지 않고 아껴둔 술을 한데 모여 한 잔씩을 하는 것이다.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는 너무나 못 가봤는데 올 봄에는 그 아이와 그 애 부모님 댁에 다녀와야겠다. 그 애 어머니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내 엄마보다 더 절실하게 자신의 경험을 들어 말씀해 주셨다. “애야, 열심히 일하면서 세월을 이겨라. 너는 그래도 나중에라도 볼 수 있잖니?” 다 키운 쌍둥이 자식 하나를 사랑 땀도 못하고 장가들 무렵에 사고로 잃은 슬픔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오로지 그 말씀만 명심하여 생활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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