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써니
  • 조회 수 264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8년 3월 22일 00시 38분 등록
해괴망측한 중년의 천박함이 물씬 풍겨나는 여자와 너무도 익숙하게 그녀의 자동차 키를 전해 받더니 그가 운전을 하고 그녀가 마치 마누라라도 되는 것처럼 옆에 앉아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승용차를 타고 뒤따라갔다. 도심을 지나 한참을 가더니 외딴 곳에서 차가 멈췄다. 굿판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무엇을 빌러 그들 일당이 함께 가는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설퍼 보이는 만신 하나와 그들과 한패거리로 스님입네 복장을 하고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있는 사내 무리 몇 명과 그가 사회에서 사귄 후배가 함께 있었다. 그 정도의 인원이 모여 하는 굿은 제법 큰 굿이다. 10여 년 전 수백만 원대는 족히 되는 거래이다. 도대체 저런 돈들은 다 어디서 났으며 왜 무엇 때문에 저럴까?

내게는 전혀 말을 하지 않지만 그가 그런 곳을 심심찮게 드나드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막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구인가. 정혼을 하고 약혼식 이야기가 나올 무렵부터 그는 내가 끼고 있던 묵주반지를 살살 돌려 빼기 시작했다. 결혼 이후에는 그토록 애원하다시피 해도 성당에 나가는 것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게 말을 하지 못하기도 하고 자신의 바깥일에 대해 전혀 간섭할 수 없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표정이 안 좋아 물을 양이면 되레 짜증을 내버리는 통에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표시를 내지를 말든가 불안감과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성질을 부리는 통에 항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산을 깎아가며 25층 상당의 아파트도 몇 동씩 짓고 부리는 인부만도 몇 명이며 제가 담당하여 집행해대는 규모만도 얼마인가? 살다보면 물론 인생이 답답할 때도 있다. 하지만 무얼 물을 양이면 저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저 보다 글도 없고 저만큼도 이치를 헤아릴 줄 모르는 천하의 동냥아치들과도 같은 이들을 찾아가서 무슨 조언을 듣겠다는 것인가? 부처인지 귀신인지도 모를 알량꼴량한 신주랍시고 벽에 모셔두고 사람 홀리듯 굿할 때 쓰는 너절한 의상나부랭이를 어지럽게 널브려 놓고는 상위에 쌀알 몇 개를 던져가며 신을 불러들여 보는 점. 정말로 제대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믿어 보겠지만, 있는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시시한 굿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소원은커녕 망조를 불러들인다. 잡귀들이 들끓어 그러한가?

기가 막혔다. 옆에 따라선 여자는 그보다 나이가 훨씬 들어보였다. 요즘이야 정상적인 연상의 여인 커플들이 대세로 접어들기도 했지만 10년 전 그때만 해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그를 안다. 나이 많은 여자를 편해 하는 것을. 2월 초의 바닷바람은 세었고 날씨도 추워서 나는 두꺼운 모직 외투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의 곁에 바싹 다가앉아 있는 그녀는 초미니 가죽 반바지에 살이 훤하게 비치는 얇은 스타킹과 무릎까지 오는 긴 부추를 신고 있었으며 그토록 두껍고 짙은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달아빠진 몰골이 나이를 짐작케 했다. 딴엔 젊어 보이겠다고 웨이브로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과 눈가의 짙은 마스카라와 아이라인이 요란하게 검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짙은 밤 화장의 천박함과 닳고 달은 듯한 몸뚱아리와 알코올과 니코틴과 함께 쩔 대로 쩔어버린 인생이 한눈에 드러나도록 한껏 치장하고 있었다. 여자의 거센 팔자와 역경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몸뚱이와 허벅지를 타고 먹물처럼 그녀가 신고 있는 부츠 속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아이 셋과 한여름에 집안에서조차 반바지를 입은 채로는 배달된 자장면 값도 지불하지 못하도록 유별나게 굴던 남자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 걸레질을 하고 수시로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씻기고 빨아대느라 땀을 줄줄이 흘리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종일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않고, 늘 제 입장에서만 짜증을 부리며 군림하는 남자였다. 순간 구역질이 났다. 저따위 것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며 그동안 나를 그렇게 되잡았던 것인가를 생각하니 역겨움에 속이 다 니글거렸다. 너무나 어의가 없었다.

그 여자가 그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다 초라해 지는 것 같기도 했다. 사업은 울산에서 하고 집은 부산이라는 제법 잘생기고 부티 나는 여자가 있었다. 크게 한 건을 바라는 모리꾼들은 그녀가 가진 돈이 많다는 것을 빌미로 제공하며 밤낮으로 함께 어울려 쏘다녔다. 나는 그의 그러한 행동들을 싫어하였다. 그러한 일이 아니어도 회사 일에 충실하고 월급 받아오는 월급쟁이 돈으로도 나는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내가 바라는 돈은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설령 당장에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손 치더라도 걱정이 되지 않을 만큼 나는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고 할 수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심지어 호떡장사도 거리의 떡볶이 장사도 나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거친 세계를 싫어한다. 공정거래가 아닌 제멋대로의 술주정뱅이들이나 양아치들도 때로는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무지 싫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삶은 돈 만을 목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막무가내인 자들을 기피하기 때문에 보디가드가 필요하다. 함부로 찝적거리는 인간들을 제어해 줄.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내게 정보 따위가 입수되는 것도 묘한 일이지만 하여튼 그의 주변은 늘 그러한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 생산성 있는 결과라도 주어지는가하면 전혀 없다. 내가 보기에는 더 손해라고 느껴졌다. 중국으로 지사장처럼 파견 근무를 나갔을 때에는 수첩에 애써 넣어준 가족사진조차도 어디다 어떤 하릴없는 인간들에게 넘겨줘버리고 돌아온 남자였다. 주려거든 제 얼굴이나 뗘주고 올 것이지 가족사진과 내 사진을 도대체 어느 년에게 넘겨주고 오는 것인가? 이춘풍의 생 이빨도 아니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와 납득이 갈 만한 아무 변명조차도 할 수 없으면서도 도리어 화를 벌컥벌컥 내던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 거리고 두 눈에 쌍심지가 절로 켜지는 것이다.

벌겋게 술을 먹고서 점잖지 못하게 스리 아무 년들에게나 주둥이를 가져다 대는 장면들은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왜 내 눈에까지 띠게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고도 전혀 미안해하기보다 너그러운 아량으로 묵인해주지 못한다고 탈을 잡기를 밥 먹듯이 해대는 수작을 떠올리면 눌린 돼지머리 대신 엎어놓고 매질을 한다 해도 분이 다 풀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여자들이 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기도 했다. 여자라는 것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음을 내 비추며 이혼이라는 말을 밥 먹듯이 아주 쉽게 남발해대는 위인이었다. 따지려다 그 적반하장의 기세에 짓눌리며 내 가슴에 먼저 멍이 들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 늘 수없는 심증이 갔지만 집구석에 처박혀서는 물증을 확보할 수 없어 되잡히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내심 아닐 거야를 반복하며 그의 말대로 내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너무 과민하고 전혀 근거 없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려니 그의 세뇌에 오히려 각인이 되고는 하였던 것이다. 아이들하고 부대끼다보면 제풀에 꺾이기도 하는 한편 남들 사는 것을 보면 정말로 내가 잘못 사는 것이 아닐까 주눅 들어 하기조차 했다. 나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바람과 함께 늘 졌다. 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기동력과 민첩함에서 내가 훨씬 떨어졌고, 길도 모르고 차도 없고, 여건도 안 되고 작정을 하고 덤벼 보려다가도 이내 제풀에 꺾이고는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그의 주변을 서성이는 여자들이란 일순간 그의 덕을 보려는 것들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돈이나 우려내자는 수작들이지 않는가. 술값이든 뭐든 같이 놀아준 대가이든.
나이가 그만하고 애들이 이러한데 당연 정신을 차리겠지 아마도 나보다 이 집안을 위해 더 걱정하리라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공연히 스스로를 탓하기도 부지기 수였다. 설마하니 그렇게 부르짖는 제 어미를 봐서도 그럴 리가 없겠지 하며 애써 서방의 노고를 치하하고 마는 숙맥인 것이었다.

함께 살 수 없는 남자들은 이럴 때 한편으로 그런 제 아내를 즐긴다. 제 가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쑥쑥 치솟는 상장주식이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해대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더불어 놀아나는 여자들의 허무맹랑한 짓거리란 눈을 뜨고 볼 수가 있기나 하겠는가. 순진한 여편네들은 기가 질린 정도로 아주 뻔뻔하고 당당하게 시침 딱 떼고 나온다. 파렴치하기 그지없게 제 자신도 전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세뇌시키는 작업이 필요해 더욱 그러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옛말에도 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거라고. 남의 남자와 혓바닥을 들락거리기를 예사로 하고 제 몸뚱인지 남의 몸뚱인지에 대한 도무지 관념이 없는 것들의 행태란 세상의 모든 순진함과 어리석고 여린 집 안의 위인들을 가볍게 비웃는 것이다. 혼외의 쾌락의 정체라는 것이 그런 것인지 모른다. 아무렇게나 들러붙어 감정에 쉽게 몰입되는 망종들은 타고나기도 추접하고 얄궂게 타고나는 것 같다.

기억하고 있었다. 한 여자가 내 아이 돌날 손님으로 나타났을 때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야 말던 아이아빠의 난처해하던 얼굴을. 그가 너무 놀라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순간 멍했다. 내 생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날이었다. 나에겐 없었다. 그를 기쁘게 할 돈이. 그를 멈출 돈이. 그리고 남의 남자로 하여금 그토록 친절한 대접을 받아내고야 마는 도도한 우아함과 자신감도. 울산에서는 보기 드문 빼어난 미모였다. 부산에서도 흔치 않을 것이다. 강남의 어디에 내어놔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여자였다. 강남 산다고 다 강남여자는 아니다. 가진 부만큼이나 나름의 기품도 동반한 여유를 말함이다. 천박하진 않았다. 보통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몰라도 한껏 멋을 내어 차리고 나타나 그런지 만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그저 세상이 눈 아래로 낮게 깔려 보이듯 하찮아 하는 표정이 온몸에서 묻어나오는 여자였다. 왜 왔을까? 일요일 12시 경주의 한 호텔이었다. 그녀가 부산에서 그곳까지 오려면 적어도 꽤 시간이 걸렸으리라. 그렇게 머리를 만지는 데는 특별한 미용실을 들려서 왔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화장도 정성스럽고 고왔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그녀는 그곳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벼이 걸터 앉아 있다가 슬쩍 빠져나갔다.

집안에 틀어박혀서 가정 살림만 하는 순박한 아내들은 서방이 바람이 난 것이 느껴졌을 때 성격 나름이기도 하겠지만 나처럼 서툴기 그지없다. 누군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자기 입장을 대변하여 도와주기를 당연지사로 바란다. 스스로는 하소연에 그칠 뿐 전투태세에 돌입하지 못한다. 어어 하면서 당한다. 여자의 직감으로 정확하게 알아차리고서도 끊임없이 아니길 바란다. 물론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초범이 아닌 짓거리를 해대는 종자들일 수록 집구석에서 해대는 작태는 아주 가관이다. 왕처럼 군림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기선부터 제압해 들어가 놓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것이다. 제 아내의 약점을 들어가며 콤플렉스라고 떠들며 주위에 동정을 사고 동조를 구하기도 하며 제가 더 괴로운 듯 위장하고 돌아다닌다. 더 발전한 중증의 인간들은 제 꼬리가 밟힐까봐 아예 무지막지하게 정신병자를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사태가 거기까지 가고 그러기 시작하면 끝내는 사단이 나고야 만다. 좋은 운도 올 때는 한꺼번에 오고 나쁜 운도 생각보다 길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끝나지 않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는 당사자도 멈추려는 의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여자 쪽에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마누라 쪽은 두고 보고 있게 되니 문제는 사내의 역할인데 이럴 경우 머저리 같은 사내들의 사태가 그리 용이하게만 풀려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바람을 피우는 것도 일종의 재주에 속하기 때문에 그 업보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상대의 여자들은 제 발뺌과 방어를 하기 위해 그 남자를 떠벌려 은근슬쩍 욕하고 돌아다니는 한편 당사자 앞에서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투정하며 가지고 놀기도 하는 것이겠다. 좋은 감정이나 사랑으로 시작한 경우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겠지만 놀이와 쾌락의 방편을 목적으로 삼은 경우는 더욱 발칙하고 가증스러운 양면으로 시시때때로 혼선을 주는 것이다. 애교를 부려가며 마치 백치처럼 세상을 넘나들기도 하고 어느 경우에는 전혀 숙맥처럼 앙큼하게 연기를 곧잘 해댄다. 남자들도 그들 스스로가 안다면서 끌려가고 아닌 줄 알면서도 헛갈려 하며 우선 좋고 주어지는 유혹에 탐닉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많다. 한마디로 세상이 저 없으면 올 스톱 되는 양 착각의 구렁텅이를 겁 없이 헤매는 것이다. 자신들을 그렇게 믿는 영웅심리가 그 모양으로 삶을 유도하며 살게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한편 가볍게 닳고 달은 거친 여자들은 마치 쓸모없어져버린 제 하인 나부랭이 나무라듯 골려가며 욕설로 무찔렀다 체념으로 달랬다 해가며 노련하고 컬컬하게 요리한다. 목적이 좀 더 분명한 것이다. 우선 제 몸부터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인식하여 오로지 한 가지 목적 돈 발라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때로 누이처럼 보살펴주는 것이다. 굿도 따라가서 해주고 원하면 받아주고 가겠다면 보내주고 다 해결해 주면서.

돈이 있는 여자들은 함부로 자신을 다 내놓지 않는다. 그들은 안다.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인격이나 머리가 아니라 돈이라는 것을. 그녀들의 이성의 사귐에 대한 테스트는 훨씬 까다롭다. 외출 시에는 캐미솔로 온몸을 칭칭 감고 야단법석을 떨어대지만 저만의 공간에 들어서서는 몰아서 방구를 부지직 껴대는 영락없는 아줌마 짓거리를 해대기도 한다. 참으려고 해도 참지 못하고 아무대서나 방귀가 새어나오는 것이 중년이상의 여자들이다. 신성한 척 폼을 잡아도 생리작용에 의해 한풀 꺾이게 마련이고 늘어진 살이며 삐지고 나오는 군살을 제 스스로는 감출 수 없음을 안다. 물론 남자의 착각처럼 여자의 착각도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좀 더 영악하다. 영악하지 않은 여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경제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일까?

그가 외국에 파견근무를 나가고 없을 때 나는 시누이와 시어머니와 한곳에서 잠시 산 적이 있었다. 그때 누이는 어디를 한 번 나가면 실컷 돌아다니다가 열흘이고 보름에 한번 씩 들어오기도 했는데 한 번은 보살이라고 하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와서 시누이를 찾는 것이었다. 그 집은 무엇을 하면 소곤소곤 비밀이 많기도 한데 나중에 떡하고 과일들을 싸들고 온 것을 보니 굿을 한 것이었다. 재수 굿이라나. 그러면서 돈이 생길 거라며 기뻐했다. 나도 제발 행운이 깃들기를 바랐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도 그녀만이라도 잘살게 되기를 항시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굿을 해서 그 누이가 얻어가진 것은 회사에서 빌린 돈 갚아버리고 남은 전세금을 빼앗아 가기 위함이었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해 내고야 말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가족 간에도 돈 냄새만 맡으면 굿을 해서라도 돈을 차지하고 마는구나 하고. 무시무시했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만삭인 내게 다짜고짜 짜증을 내면서 밥상을 뒤엎어 가면서 행패를 부렸었다. 물론 누이와 어머니에게 불려갔다 온 직후였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듣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한테 차근차근 하게 말할 경황도 뭣도 없는 것이었다.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저도 제 어미와 누이를 설득하지 못하고 복장이 터지는 소리를 한가득 듣고서 억울함에 진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가 70년대에 파견근무를 할 당시에는 월급이 두 배 이상으로 나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 무렵 다시 나갔을 때에는 그 회사에서는 주지 않았다. 돌아오고 나서 나중에 얼마간 위로금이 나오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하나도 나오지 않은 상태인데 많은 월급을 타면서 도와주지 않는 다고 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참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두 해 전 이미 다 나누어 준 상태였고 우리가 전세를 얻은 돈의 두 배 이상을 목돈으로 누이에게 주고 간 상태였다. 도대체 일 년에 생활비를 얼마를 쓴다는 것인지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저도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있는 대로 핏대가 선 사람처럼 난동에 가까운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한 번씩 귀신이 든 듯이 미쳐버리면 물이고 불이고 뵈지 않으면서 획 돌아버린 사람 같다. 나는 정말 그러한 모습들이 이해되지 않아 그러한 상황에 부딪히고 나면 별당아씨가 떠오르곤 했다. 예전에 연속극 중에 이런 제목이 있었는데, 별당아씨는 마음씨는 착했으니 무지하게 박색이었기 때문에 시꺼먼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별채에서 살았다. 그와 같은 장면이 연상이 되면서 그가 이럴 때에는 순간적으로 새까만 복면을 한 귀신이 순식간에 쳐들어와 혼령이 시달리는 때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맨 먼저는 함 들어오던 날이었고, 그 다음에는 울산에 살 때 몇 번, 그리고 안산에 살 때 몇 번 그렇게 찾아 들었었다. 그리고 이날 밥상이 뒤집어진 날은 그가 해외 파견근무를 6개월간 다녀온 지 채 이틀째 되는 날이었고, 다음날 나는 아이를 출산했다. 간간히 그런 일들이 있었지만 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것을 알고 애 낳기 전에 달라며 숨넘어갈 듯 돈을 재촉하느라 만삭의 내게 밥상을 발로 차서 뒤엎던 그의 행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순간 이렇게 마음속으로 아주 간절히 기도했다. “이 돈 다 드리겠습니다. 하느님,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발 그것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아귀가 맞지 않는 그 돈을 몇 백만 원 보태어 채워서 남편 앞으로 통장을 만들어 두었었다. 물론 그 빈 통장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붉은 빛이 도는 그 통장은 어쩌면 그때 나의 부적이었을지 모른다.

그 통장을 만들 때 나는 영하 40도 씩이나 내려가는 추운 겨울 이국의 땅에서 고생하는 그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바람을 담았었다. 무엇보다 건강을 기원했고 현장 책임자로서 사고 없기를 바랐으며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위해 고생한 보람 있게 잘 쓰여 질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가 보여주려고 마음먹고 만들어둔 통장이었다. 그때 그는 다짜고짜로 내가 그 돈을 친정으로 빼돌렸을 거라며 엄한 소리를 했다. 나는 처량한 마음으로 즉시 내주고 말았다. 남자의 서투름은 화가 나거나 다급한 상황에 처하여서는 아무 생각 없이 대게가 들은 대로 지껄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주위에서 아주 많이 목격했다. 그는 그런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고 더 없이 성실하게 살기도 하지만 어쩐지 우리 생활에서는 그렇게 밖에는 살아내지 못했다.

둘째의 출산이었다. 첫 아이 때와는 달리 나는 갑자기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산부인과의 분만실을 밀치고 들어가 내가 아이를 낳고 살아나올지 죽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 병원에 들어갈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하기도 한다. 돌아와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든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마무리해놓고 가면서도 말이다.

은행에 같이 가서 그가 보는 앞에서 해약을 해주었더니 그는 그 돈을 가지고 어미와 누이에게로 갔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같이 가면 그분들이 자존심 상해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녀오라고 하고 은행에서 헤어져 홀로 집으로 왔다. 그곳에서 은행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나는 차를 타고 다니지 않았었다. 걸어서 다녔다. 그는 나보다 더 힘들고 낯설고 추운 곳에서 떨고 있다는 생각이 항시 들었기 때문이었다. 택시비도 아끼고 싶었다. 궁상을 떨려는 것이 아니라 따끈한 집에서 편히 있으면서 작은 액수라도 함부로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허허벌판 같은 그곳을 오가는 길목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가 고생하고 있을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함께 걷고는 했다. 너무나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가 야속하고 헛헛해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슬픈 내 마음의 위로를 위해 그의 옆에 누워 기대어 자고 싶었다. 아이를 출산하다가 내가 만약 죽게 되면 그가 아이를 키워야 할 것이기에. 재수 없다고 할까봐 그리고 그런 말을 입으로 내뱉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숨죽여 속으로 부탁했다. 내가 없어도 잘 키워달라고. 다음날 나는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나는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생각했다. 장했고 감사했고 아무 것도 부럽지 않았다. 얼마든지 잘살 자신이 있었다.

내 소식을 들은 엄마가 병원으로 오셨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엄마가 내가 둘째로 아들을 낳은 것을 대견해 하시며 시어머니께 “좋지요?”하고 인사를 나누셨다. “다 살은 내가 좋을 게 뭐가 있나. 지들이나 좋겠지” 하고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말씀하시어도 내심 좋으실 거라고 우리는 짐작했다. 엄마가 산바라지를 하시겠다니 시어머니께서 고기를 사오시겠다며 나갔다 오셨다. 파견근무를 마치고 수고하였다며 회사에서 갈비세트를 선물해 준 것이 있어서 통째로 가져다 드렸었는데 그 중에 국거리 하나를 빼오셨더라. 미역 한 오랑이도 없이.
엄마가 참기름과 들기름을 한말 짜서 들고 오시고는 서운해 하셨다. 내가 말씀드렸다. 내가 미역 있다고 해서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네가 다 준비해 놓았다고 하고 어른이 곁에 있으니 믿었는데... . 그리고 그것 너무 오래 되고 억센 미역이구나. 금방 아이 낳은 산모에게.”하며 마음이 상하신 듯 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아이를 낳기 전 그가 국내로 돌아와서 다행이었고 그리도 원하는 건강한 아들이어서 정말 좋았다. 나의 맏아들이며 그 가문의 장손은 그렇게 태어났다.
IP *.36.210.8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