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한정화
  • 조회 수 3045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08년 3월 27일 09시 17분 등록
며칠전에 생일을 맞았다. 36번째 생일이었다. 나는 그날 행복해서 날아갈 듯 했다. ‘Happy'라는 말은 그런 때를 위해 있는 말이었다. 하루 종일 Happy를 연발해도 질리지 않는 날이었다.

생일이 있기 며칠전에 생일선물에 대해서 일터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은 호피무늬의 색시한 원피스, 풍성한 장미 꽃다발, 친구들과 함께 즐길 와인 한병... 등을 이야기했다. 그것을 계기로 생일이 알려졌으니, 주위 사람들과 같이 그 해피한 날을 맞고 싶어서, 일터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돌렸다. 왠 음료수냐며 묻는 이들에게 ‘한정화탄생 35주년 기념’이라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말을 붙여서 생일임을 알렸다. 그리고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 내가 정작 받고 싶은 선물은 그게 아니었다. 여지껏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한 선물. 이번 생일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물러나고 있었다. 내 스스로 happy를 연발하지 않으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지금의 존재 자체가 너무 허망할 것 같아 열심히 무엇인가로 가려놓은 것이 있다. 나는 나의 존재를 있게 한 그분들의 생일 축하를 받고 싶었다. 생일 아침에 일터에서 전화를 했다. 그 전날에도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전화를 붙들고 번호를 누르기까지 어떻게 전화를 해야하나 망설였다. 그리고는 내가 해야지 하며 꺼내 든 전화. 이상하게도 나는 그분을 다독이고 싶었다. 이상할 것도 없다. 부모님께 축하전화를 받고 싶었는데, 내가 전화하지 않으면 표현을 하지 않으실 분들인 것 같아서다. 어머니, 아버지.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드셨다고 한다. 잊지 않으셨다. 다행이다.

전화로 나를 낳아서 기쁜지, 내 존재 자체로도 만족한지 여쭈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하면 안될 것 같다. 꼭 무엇을 해야만 착한 딸이었던 것이 너무나 억울했었다. 꼭 밥값을 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나를 너무 강팍하게 만들었다. 아들이니까, 어리니까라는 이유로 그냥 자식이기만 해도 됐던 동생들과 비교하면서 내 생일 중 몇 번은 몹시도 우울했었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서 그것이 사그라졌지만.... 꼭 무언인가를 잘해야 딸인 것은 이제 정말 싫다. 내가 정말 받고 싶은 선물은 생일떡이다. 몇 년전부터 우스게소리처럼 혹은 진지한 농담처럼 했던 말이다. ‘나 시집가지 전에 떡 한번 해줘.’ 이 농담에 친구들은 ‘그래서 니가 아직 시집을 안갔구나.’하는데, 일부는 맞는 말이다. 나는 가족들과 관계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채우려고 하는 것이 은연중에 나타나서 관계가 깨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 하나만을 사랑해주는 존재,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설령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날 믿어주는 존재하나 갖고 싶다라는 것과 그런 사람이 내 짝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은 가족간에 약간 비틀어져 버린 관계가 출발점인 듯 하다. 지금은 그것을 분석해서 머리 속으로 알고 있으니 가슴으로 풀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낳을 때 무척 힘든 시기를 겪으셨다. 가끔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삶이 힘겨울 때, 내가 생기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기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내게 하셨다. 아버지께 받은 상처를 내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너도 니 아버지와 똑같이구냐?’ ‘너도 한씨다.’ 그렇다. 나는 아버지와 꼭 닮은 놈이다. 지금은 어머니께서 힘든 시기를 겪어오면서 푸념이란 것을 하셨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나 때문에 행복했다는 말 한번쯤은 들어보고 싶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고,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존재이니까. 가장 시간을 많이 공유한 사람이 어머니인데, 늘 옆에 있던 존재에게 나는 누구 대신이라던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존재라는 말을 듣는 것은 괴롭다.

집에서 나와 산지 10년이다. 대학만 졸업하고 나면 직장이란 것을 핑계로 삼아서 집을 떠나오고자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집을 떠나와야겠다고 결심하던 그때는 집에서 숨을 쉬기 힘들었섰다. 혼자서 자취하는 지금은 불이 켜지지 않은 방 창문을 올려다 볼 때, 아니 그보다도 앞서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썰렁한 방에, 내 집이라고 찾아들어야 하는 퇴근길은 참으로 착찹한 심정이 들었다.

36번째 생일을 맞으며, Happy를 제대로 즐기면서 다 씻으졌는가 했는데, 몇일 지나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어느 덧 다시 올라와서 나의 마음을 흔든다. 머리 속으로는 이해했지만 가슴까지는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몇 일 후면 어머니 생신이다. 어머니와 나는 한달에 생일이 같이 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음력 2월에 세 명이 같이 생일을 쇠었다. 나, 할머니, 어머니 순서이다. 한달에 성씨가 다른 사람 생일이 셋이면 그 집안은 번성한다고 하는 옛말이 있나본데, 그것은 사람이 많으면 일꾼이 많으니, 혹은 자손이 많으니 집안이 번성한다는 말을 담고 있는 듯하다. 할머니께서는 집안의 어른이시니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늘 생일을 챙기셨고, 어머니 생일은 아버지께서 까먹으셔도 이제 자식들이 컸고, 또 가까이에 이모님들이 사시니 잊지 않고 생일을 챙긴다.

동생이나 이모님들이 내 생일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니...... 난 그냥 나 혼자 즐거워하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제일 큰 선물을 받은 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다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라는 둥. 그러면서도 가족들에게 축하받고 싶다는 것, 특히 어머니에게 축하를 받고 싶다는 것. 그것 하나 여지껏 남아서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받고 싶은 선물목록에 있는 것이다. 남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머니께서 너를 낳느라 힘드셨으니 어머니께서 축하를 받으셔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힘들게 낳으셨다. 이런 저런 내적 갈등 속에서 힘들게 낳으셨다. 난 그렇게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고 태어났으니까, 힘들게 낳으신 거다.

며칠 후면 어머니 생신이다. 어머니께는 장미를 한다발 선물하고 싶다. 외할머니께도 선물을 하고 싶다. 엄마를 낳아주셔서 고맙고, 그리고 아버지와 결혼시켜 주셔서 너무나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생일이 지났으니 나이를 한살 더 먹었다. 연초에 라디오에서 나이에 관해서 들은 말 중에 꼬맹이의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이를 한살 더 먹었다고 좋아하던 꼬마는 달려가서 자신의 키를 재보고는 어제와는 달리 하나도 크지 않았는데 한살 더 먹었다고 하는게 뭐냐고 물었었다.
글쎄. 작년과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면 한살 더 먹는게 뭐지? 아이는 눈에 보이게 키가 크는 것을 한살 더 먹는다고 하는 것 같다. 어른인 나는 외형적인 모습은 다 컸으니 다른 것이 커야하는 것인가.

여러감정들이 뒤죽박죽인 또 한번의 생일이 지나갔다. 어쨌든 난 이제 서른 여섯이 되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또는 무엇을 해도 나이를 먹는다.
IP *.72.153.12

프로필 이미지
부지깽이
2008.03.27 19:12:46 *.128.229.86

정화의 생일이 꽃피는 봄이었구나.
한 살을 더 먹었다는 것은 네가 작년 보다 더 많은 꽃 송이들을 피워낼 수 있는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지. 네 이름 끝자의 '화'는 꽃이냐 ?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8.03.28 07:58:07 *.72.153.12
예 사부님 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향인
2008.03.28 20:05:04 *.215.56.193
늦었지만 생일 축하!
점점 더 이뻐지니 보기 좋더구나. 마음씀이 그래서겠지.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