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 조회 수 900
- 댓글 수 4
- 추천 수 0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익숙한 나 Vs 낯선 나
성장 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헤르만 헤세는 열 세 살 어린 나이에 자신이 갈 길은 시인이라고 확신하였으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부모님은 헤세가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기를 희망합니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헤세는 신학교에 진학하지만 숨막히는 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정신적 방황의 길로 들어 섭니다. 그 와중에 결혼도 하고 서점에 취직도 하는 등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자살시도와 이혼 등을 겪으며 끝내는 정신과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하며 벼랑 끝에 몰립니다. 바로 그 때, 헤세에게도 조력자가 나타나니 세계적인 분석심리학의 대가 칼 융의 제자 요제프 랑 박사를 만나 분석 상담을 받기 시작합니다.
랑 박사는 그때까지 홀로 방황하던 헤세를 서서히 내면 세계로 인도하며 그가 왜 그토록 방황할 수 밖에 없었는지 스스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헤세는 지난날 길고 긴 방황의 여정이 결국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세는 문득 자신의 노트에 “데미안”이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고 휘갈겨 씁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한 달음에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데미안>입니다. 비로소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온 순간이자,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헤세가 진정한 대가라고 느껴지는 건, “데미안”의 큰 성공에 힘입어 세상에서 엄청난 호응과 유혹들이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스위스 산골 마을을 몇 시간씩 걸어와 융 박사를 직접 만나기도 하고, 랑 박사와의 작업도 이어가며 내면 작업을 더욱 철저히 쌓아나가며 이 모든 것들을 반영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합니다. 그리하여 “데미안” 이후, 내면 탐구의 깊이를 위해 동양 사상에 심취하여 쓴 <싯다르타>, 자기 탐구의 길을 걷는 와중 자신의 정체성이 천 개로 갈라지는듯한 자아분열을 겪었음을 이야기하는 <황야의 이리>, 분열된 자아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빛과 그림자 양극의 합일을 이루어야 함을 이야기하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잇달아 세상에 내놓으며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서게 됩니다 (결국 헤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인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그린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데미안”부터 시작해서 헤세의 작품을 따라 읽어가던 저는 문득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앞에 멈춰섰습니다. 사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제목과는 달리 거의 철저히 본능에 따르는 골드문트의 방황 이야기나 다름 없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중세를 연상시키는 신학교의 학생으로 만나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절친이 됩니다. 하지만 지성 혹은 정신 세계의 대명사와 같은 나르치스는 사랑 혹은 감성의 대명사와도 같은 골드문트가 언젠가는 신학교를 떠나 자신의 길을 갈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이교도 집안의 무희였던 어머니가 자신의 뜨거운 피를 어쩌지 못해 어릴 적 골드문트를 떠난 것처럼,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 골드문트가 그 안의 본능이 깨어나면서 어머니와 똑 같은 길을 따라 나서며 시작됩니다. 그 때까지 엄격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에 대한 희미한 기억조차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골드문트가 어떤 여인을 만나며 잠에서 깨어난 것이지요.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철저히 자신의 본능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방랑 길에 들어선 골드문트는 길 위에서 수많은 여자를 알게 되면서 끝없이 감각의 세계로 끌려 들어갑니다. 그러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살인도 저지르며 나르치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생 최악의 구렁텅이로 빠진 탕아가 됩니다. 어찌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데 참으로 희안했던 건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골드문트가 딱히 더럽다거나 역겹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그 이유를 잘 몰랐는데 골드문트의 다음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그가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릴 적이나 학생 시절에는 자네처럼 지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네. 그런데 내 소명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네가 깨우쳐주었지. 그리고는 삶의 다른 쪽에, 감각의 세계에 투신하기 시작했네. …. (그리고) 감각의 세계에도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행운도 누렸네. 바로 거기서 예술이 탄생하지.”
저는 비로소 골드문트가 수많은 여자들과 벌인 애정 행각이 왜 역겹게 느껴지지 않았는지 그 느낌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서 매 순간, 만나는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하여 일상에 지치고, 관계적 권태기에 지쳐있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진정성 앞에 잠시나마 위로를 받았던 거죠. 그러나 물론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라면 그럼에도 골드문트는 여전히 (어찌 정의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골치 아픈 인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방랑의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골드문트는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 상을 보며 자신 안의 예술가적 혼이 깨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신학교에서 한 여성을 만나 감각이 깨어난 이후 인생에서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이뤄지는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그 조각을 만든 장인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이번엔 자신의 자유를 몽땅 저당 잡힌 체 예술 세계에 몰두합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술 자체에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러나 진정 놀라웠던 건, 골드문트가 조각이란 예술에 몰두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지난 세월 길 위에서 방랑하며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달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잊어버린 어머니”를 되찾아 가는 과정이었으니, 그에겐 모태의 뿌리를 찾는 일이자 자기 본질을 찾는 아주 중요한 여정이었던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그가 만나는 모든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유였고, 이제 그는 그가 만난 여인들 전부를 합쳐 하나의 형상으로 어머니 상을 만드는 예술가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세월은 골드문트를 예술가로 살게 두지 않으니 단기간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는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그였지만 아직 그의 방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청춘이 아닌 그는 이번 방랑에선 흑사병이 몰고 온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고 어느 귀족의 여인을 사랑하여 그 자신이 죽음에 내몰리기도 하며 인생의 온갖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교수형에 처해질 날을 기다리던 바로 그 순간, 이제는 수도원장이 된 어릴 적 친구 나르치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나 다시금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에게 나르치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건넵니다.
“인간은 자연의 선물로 받은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려고 애씀으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을 행하는 셈이지. 그래서 자네한테 틈만 나면 말하지 않았던가. 사상가나 금욕주의자를 모방하려고 애쓰지 말고, 본연의 자아를 찾고 자아를 실현하도록 애쓰라고 말일세.”
“자네 말은 알 듯 말듯하네. 그런데 자아 실현이란 대체 뭘 말하는가?”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 우리처럼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배운 사람들한테는 모든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완벽한 존재>라는 것일세. 완벽한 존재는 곧 신이지. ….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곧 현실성으로 바뀔 때, 우리 인간은 참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네.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한 단계 더 가까워지는 셈이지. 그것이 곧 자아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 문장을 만나 저는 비로소 어째서 나르치스가 그 자신은 고상하고도 올곳은 신학생의 길을 걷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인 골드문트에게는 처절한 방랑의 길을 허용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 인도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헤세가 문학가들 중에서도 특히 자기성장 소설의 대가로 일컬어지는지도 충분히 공감되었습니다. 헤세에게 자아 실현은 완벽한 존재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일이니 그가 인생을 걸고 자기 탐구에 매달린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수도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는 골드문트는 감각의 세계도 버리고, 심지어 예술의 세계도 뛰어넘어 자아실현을 이룬 자로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이야말로 자기 본질로 돌아가는 귀향 같은 의미라면서 말입니다.
책장을 덮으며, 죽음이 본질로 돌아가는 편안한 귀향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진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세는 이 책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두 명의 다른 인물로 그리고 있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은 헤세 안에 내재된 두 가지 다른 면을 캐릭터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헤세는 어릴 적부터 정신 세계를 대변하는 나르치스적 삶을 강요 받으며 예술가적 기질인 골드문트는 억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억눌린 골드문트는 헤세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 오르며 신학교에서도 신학교를 뛰쳐나온 뒤에도 줄곧 헤세를 당황스럽게 하며 혼란에 빠트립니다. 그리하여 결국 헤세가 칼 융의 제자인 랑 박사를 만나 자신 안의 낯선 타인인 골드문트를 만나면서부터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는 것을 물론이고 비로소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참으로 한 사람이 자신 안에 묻혀있는 잠재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어찌 개발하느냐에 따라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헤세를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 안에도 필경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잠재력,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낯선 내가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만의 바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 안의 숨겨진 가능성을 찾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제가 가야 할 방향성이 엄청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에 저 또한 헤세처럼 융 박사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혹시 헤세처럼 골드문트적 성향은 억압하고 오직 나르치스만의 삶을 살고 계신 건 아닌지요. 그리하여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서 자신 안의 골드문트는 너무 낯선 이가 된건 아닐런지요. 마지막 꽃샘 추위가 살짝 이어지고 있지만 어김없이 봄이 오려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또한 이 봄에는 자신들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보시는 날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편한 주말되시고 다음 한 주도 아자 홧팅입니다^^
수희향 올림
카페: 1인회사 연구소 www.Personalculture.co.kr
--- 변경연에서 알립니다 ---
1. [안내] 변화경영연구소, 페이스 북입니다
변화경영연구소의 페이스북입니다. 익숙한 곳과 결별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힘껏 발휘하며 두려움에 맞서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커나가고자 합니다. 변경연을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분들과 직접 얼굴 맞대고 인사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을 페이스북에 담아 더 가까이 소통하고자 합니다. 많이 들러주시고 ‘좋아요’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bhgootransformationinstitute/
2. [팟캐스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편 – 조지프 캠벨
이번 팟캐스트 두번째 책은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입니다. ‘좋은 책은 유혹이다’라고 합니다. 많은 연구원들을 좌절하게 한 캠벨의 책이 연구원 과정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용히 혼자만이 있을 수 있는 ‘성소’가 연구원들에게 어떤 의미이고 자신에게는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이야기 들어봅니다. 또한 조직의 시스템을 떠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찾고 싶은 분들은 방송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podbbang.com/ch/15849?e=22864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