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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30일 15시 41분 등록
2008년 4월 6일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여성의 시체를 발견,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경찰 조사결과 자살이나 타살의 흔적은 없고, 외부의 침입을 의심할만한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사인을 순간적인 심장마비로 단정짓고 시체를 가족에게 인도했다.

시신을 발견하게 된 경위는 사망자가 키우던 고양이 때문으로 밝혀졌다. 며칠 동안 밤새도록 들려 오는 고양이 울음 소리에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해 왔다. 현관 벨을 눌렀으나 응답이 없고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자 경찰은 가족의 동의를 얻어 현관을 따고 들어갔다.

사망한 지 일주일이 지나 발견된 사체는 침대에 옆으로 누운 상태로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야윈 고양이 한 마리가 주인 곁에서 계속 그녀를 불러대고 있었다. 조사 결과 그녀의 컴퓨터에서 가장 최근에 작성한 글이 발견되었다.

오늘로서 너를 죽일 테냐.
너의 지난 모든 삶을 죽일 테냐.
그 천박함을 버릴 테냐.
………………..
………………..
만약에 다시 살아
세상에 네 모습을 보일 때는
그 때는 껍질을 벗고
투명했던 너로 돌아와다오
…………………
…………………
그래서 나를 이끌어다오.
오로지 천복만으로 나를 이끌어다오.
2008,3,31

위의 낙서는 사망 당일에 쓴 것으로 판명되었다. 책상에는 마시다 만 술잔이 놓여 있고 고양이 사료는 여러 그릇에 나누어 충분히 공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대로 남겨진 상태였다. 고양이가 울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사망 이튿날 째로 녀석은 이미 주인의 신변에 이상이 온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차가워져 가는 주인을 덥히려 한 듯 사망자의 온 몸에는 고양이 털로 덮여 있었다.

경찰은 최종 사인을 심장마비로 확인하고 이 사건을 종결 지었다. 그리고 이틀 후 화장터에서 그녀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름 이은남, 묘비명은 빈칸으로 남겨졌다.

장례가 끝나자 비로소 몇몇 사람들이 고양이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주인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던 테리를 떠 올린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행방을 쫓았다. 그러나 이미 녀석의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낙담한 사람들은 그가 어디선가 새로운 삶을 찾아 길을 떠났으리라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고양이가 발견된 곳은 양재천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녀석이 어떻게 그곳을 찾아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녀석은 주인의 죽음을 확인하곤 저와 주인이 자주 가던 곳을 찾아갔던 것 같다. 고양이는 그곳의 풀밭에 누워있었다. 아무 외상없이 조용히 숨을 거둔 것으로 확인되었다. 주인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테리를 거두어 그녀 곁에 두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때마다 고양이도 같이 그 애도를 받았다.

……………………………………………………….

어느 봄날, 누군가가 그녀의 식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어느 꽃밭 아래에 있었노라고, 눈이 멀고 늙은 고양이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데 정말 그녀가 죽었느냐고..

그녀를 아는 이들이 꽃밭을 찾았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화장터에서 재로 사라진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고양이 테리도 그 곁에서 졸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비볐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살며시 따라 움직이는 낯선 그림자가 있었다. 말 없이 그녀 뒤에 서있는 그 그림자의 정체는 우리가 가끔 “천복”이라 부르던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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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
2008.03.31 01:43:10 *.142.150.131
읽으며 섬짓했고 읽고 나서도....

요즘 제가 마음이 여려졌나봐요.
영화 '추격자'를 보고도 잘 된 영화라는 생각보다는 내 취향이 아니구나 하며 불편해 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적고나서 보니 혹 오해를 하실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에 대한 평을 한 것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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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2008.03.31 10:20:10 *.177.93.244


시체,고양이,양재천 그리고 그림자.이런 단어들이 역여서 오싹 하네요.

돌아온 그녀가 그녀의 식구들에겐 어떻게 받아들여 질까요.

무서움이 느껴지네요.

죽음없는 부활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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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8.03.31 20:49:50 *.215.56.193
저는 당신의 내일을 기대합니다. 이 글의 행간에는 도약을 향한 열망이 있는 것 같네요. '어제의 나'에 죽음을 선포하고, 내일은 '새로운 나'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 담긴 것 같아 감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지금의 나'로 살아가기에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 어떡해야 하는지 이 글을 통해 깨닫습니다. 위대한 성을 쌓기 위한 열망이 있는 사람들은 기존의 그저 그런 성을 허물 수 있는 용기를 가졌더군요. 최선의 길을 찾는 사람들은 기꺼이 길을 잃어버리는 지혜를 가졌더군요. 아마도 향인님에게서 그 용기와 지혜를 느낀 것 같아 저는 기분좋게 이 글을 읽고 갑니다.
3월 31일에 제가 향인님이랑 함께 저녁식사를 했는데, 설마 제가 살해 용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하!
오히려, 천복을 누리기 시작한 향인을 발견한 '최초 목격자'라는 영광을 누린 것 같아 기분 좋네요. 향인 누님의 빛나는 내일을, 제2의 인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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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8.03.31 23:41:10 *.215.56.193
살해 용의자로 몰리면 뒤에서 사람들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랫만에 멋진 남정네를 만나 뻑가는 바람에 심장마비로....(수근수근).하하하.. 제대로 봐 주어서 탱큐,희석. 밸류블한 시간이었네.용기와 지혜는 오늘 네가 주고 간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실실거리며 쓴 글인데 좀 그랬나보죠?
재동씨.저 오해 절~대로 안해요. 섬짓하셨다는 말씀에 죄송합니다.

쿨님, 부활이란 말은 죽음이 전제가 되어 비로소 쓸 수 있겠지요. 죽을라고 해도 안 죽어지는 튼튼한 몸입니다. 무서워하지 말아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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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8.04.01 06:04:45 *.109.84.55
희석이, 이 녀석... 나한테 굳이 전화걸어 누구 만나러 가는지 가르쳐줄 수 없다며 자랑질을 하더니, 누나 만났구나. 내가 따라가겠다고 할까봐, 오붓한 자리 방해할까봐 비밀로 한거였구나. 아~ 버림받은 기분이라니... ㅎㅎ 살해용의자보다는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된 것 같네. 축하한다. 에고~ 목격자를 축하할 것이 아니라 부활한 본인에게 축하를 날려야 할 것을... 누나 축하해요. 날아오르는 모습을 기대할께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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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8.04.01 13:40:01 *.215.56.193
글이 사람을 나타낸다고 하지..종윤아, 짧지만 네 댓글은 정말 너로구나. 너의 궁시렁..나의 배실배실..ㅎㅎㅎ. 니가 날린 건 잘 받았다. 탱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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