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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일 11시 40분 등록
이혼을 주장하던 그는 막판에 이르러 자신을 두고 보는 내게 왜? 아쉬워? 라는 말을 농담처럼 아주 쉽게 내뱉으며 의기양양意氣揚揚했다.

아이들이 있는 한 그렇게 막다른 곳에까지 치달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들보다 아이들 아빠인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으며 살았고 헤어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던지는 희망!같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 빨리 정신을 차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억지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법원의 결정이라고 해도 그까짓 이혼 했다는 종이쪽지가 무슨 소용이 있나 반발하기도 했다. 내가 그와 살아온 삶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얼마간은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혼하고도 손잡고 다니기도 했으니까. 이혼 도장을 찍은 날 우리는 서로에게 숨김없이 그동안 궁금했던 것에 대해 다 말해 주기로 했다. 그도 나에 대해서 궁금증을 물었고 나도 그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나 그날도 역시 나는 다 대답해 주었지만 그는 말을 시작하다가 끝을 맺지 않고 말았다. 늦은 밤 명동의 어느 술집에서였다.

그가 웃으면서 제일 궁금해 하며 시작한 말은 어떻게 자기가 있는 곳을 알아냈느냐는 것이었다. 마치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이기라도 한 듯이. 알아맞히어 보라는 내 말에 대뜸 흥신소에 의뢰를 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에게 그렇게 살고도 나를 모르겠느냐고 반문했다. 어쩌면 그렇게 살붙여 살면서 그리도 모를 수가 있을까. 몰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것이고 생각이 전혀 딴 데 가 있느라 오직 저처럼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아마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는 자기 꾀에 빠져서 세상이 훤히 대낮처럼 눈뜨고 있음을 간과하며 사는 것이리라. 자신의 흉허물을 덮기 위해 마치 모든 사람들이 눈뜬장님이 되기라도 해야 하는 듯이.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빠진 대게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나는 또 주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흥신소에 의뢰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믿을 만한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돈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나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그런데 일을 맡기지 않으며, 함부로 어떤 불한당들인지도 모를 사람들과 거래를 트고 싶지도 않았다. 한두 푼으로 될 일도 아니었고 그것도 그쪽 계통으로 만만하게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공연히 나까지도 무슨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몰라 아예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를 들어내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면 누군가를 시켜야 하는 데 만만히 시킬 사람도 내 방법에 동조할 만한 사람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내 부모 형제는 가까이 있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전혀 아니기에 생각지도 않았고 심지어 내 이혼조차 몰랐던 것이다. 결혼은 부모형제의 동의로 했지만 살고 못 살고는 결국 당사자의 문제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서였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서 내 의사를 존중하여 반영하고 싶었다. 설령 내가 죽게 되더라도 가족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고 양가의 가족 싸움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에 철저히 나 혼자였다. 어쩌면 그와 사는 동안에 너무나도 시어머니와 시누이로 인해 하루에도 열두 번 뒤바뀌는 남편이라는 사람에 대한 일말의 회의에서 더욱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백 번 천 번 잡고는 싶었지만, 그리고 집을 나가 고작 아무 연놈들과 어울려 퍼마시며 나를 능멸하고 철저히 유기해가며 얄궂은 계략을 짜고 있는 그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쫓아가 철퇴를 가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아 사무침이 뼛속까지 뚫을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방법을 나는 몹시 싫어했다. 미숙하고 어설픈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 것이며 그 따위 남의 뒤를 밟아 밥을 처먹고 사는 그들의 작태 또한 어떠할까 싶어 오장육부가 끊어질 듯 신음하면서도 그냥 하염없이 속을 끓이며 마음속으로 애끓는 기도만 했다. 그리고 정말로 기적같이 그의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녹음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바로바로 전화와 문자나 메신저 혹은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취하고 감쪽같이 없앨 수 없었다. 무선호출기 삐삐를 차고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직원이 우리 집을 정탐하고 보고를 하는 소리, 억세고 거친 경상도 여편네가 술이 건하게 취해 그의 이름을 아주 하찮게 부르며 농 짓거리를 해대는 소리,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를 아는 낡은 여자의 목소리 등등... 한통속이 되어 작당을 해대는 그들 무리들을 나는 훤히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와 그녀의 관계가 천사와 애인이었는지 게 중에는 1004라는 비밀번호도 있었다. 그는 너무나 수시로 비밀번호를 바꾸고는 하였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더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속을 끓여 내가 먼저 죽을 판이었다. 그 모멸, 그 분노, 그 애간장이 끊기는 울분을 지금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는 나를 모른다. 아마도 지금까지도 모를 것이다. 이혼하기 전까지 언놈이 있어 조사를 했거나 우리 집에서 누가 조회를 시켰다고 당시에는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탁을 조회할 만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 꽤 있었다. 우리 집안을 잘 아는 그 집안에서조차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데는 내가 도저히 남부끄러움을 참지 못해서였다. 정말로 낯 뜨거워서 살 수가 없었고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빨개 벗고 거리를 나다니는 꼴처럼 내 모습이 초라하고 자신이 없어졌다. 그와 사는 동안에 나는 내 자존감의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처럼 피폐해져 갔다. 거미줄처럼 실낱같은 희망을 오로지 그에게 둔 채.

그러한 그때 그 당시 나의 분노로만 치자면 나는 그를 얼마든지 철창에 집어 처넣을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인 만큼의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었다. 그의 부하 동료까지도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모조리 쓸어서 본사에 회장을 찾아가 신고하고 법정에 나가 샅샅이 보여줄 수 있었다. 그의 누이의 허위 직업과 날조된 재산증식과 부당한 재산목록까지도 낱낱이 다 밝혀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나 서럽고 원통하고 절통하고 분하고 억울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왜? 그와 살고 싶어서? 아니다. 그의 말처럼 아시워서? 웃기지마라. 절대 아니다. 실컷 한 번 잘살아 보라고? 그래. 어느 정도 그 점은 있었다. 내 인생이 더 없이 중요한 것처럼 그의 인생도 중요할 것이기에.

그리고 그는 내가 선택한 내 몸과 마음의 오롯한 순결을 받쳐 꿈을 꾼 단 하나 최초의 사람이었고 내 부모형제가 쾌히 승낙한 믿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를 통해 그와 살과 피를 섞어 낳은 내 아이들이 셋이나 됐기 때문에 아이 아빠인 그를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는 잘 살지 못했을 지라도 그리고 나에게는 천적과도 같은 시부모와 누이들이었지만 내 아이에게는 조부모요 고모임을 나는 무시하지 않았다. 못 마땅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할머니고 고모로서의 존재를 나는 막지 않았다. 그들이 내 존재를 없애려 죽었다고 한다거나 외가를 몰살하듯 잊어버리게 하는 사고양식에 대해 나는 아주 독하게 분괴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욕심과 이기심과는 달리 어린 내 아이들의 슬픔과 혼선을 막기 위해 나처럼 불행한 아이들을 지켜보며 참을 뿐이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도 그들 못지않게 희생하고 사랑했음을 그리고 염려함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들의 처세는 인간이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를 보면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제 어미는 그토록 염불 외듯 중요하고 좋아하면서 나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살았던 그를 그들 친구들도 다 알고 납득하지 못하였었다. 그리고 그는 서슴없이 내 존재를 뭉개려고 들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미로서의 권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책임을 못 다한 어미의 궁핍한 처신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무조건적인 부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서 억압받아왔듯 아이들도 속수무책으로 내몰리는 것을 염려한다. 아이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마음의 행로를 차단하지 않기 위해 나 항상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넋두리도 짐도 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노력하면서 내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다.

그와의 결혼 생활에서 비록 사랑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한 신뢰는 나 혼자 품어 간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실패를 두려워한 또 다른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실패를 두려워했더라도 진심이 아닌 건성으로 살아가는 삶도 나는 원치 않았다. 앞으로도 물론 그러하다. 어느 누구와도 그러하다. 이것이 꿈꾸지 못하는 자의 처절한 고독이라고 비난 받거나 한쪽으로 치부되더라도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간다. 누구보다 내 안의 깨달음과 이해가 먼저 절실히 필요하고 요구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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