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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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사단은 결혼 예물을 준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예상치도 못했는데 시어머니 대신 시누이가 나와서 보석 가게를 물색하여 놓고는 제가 골라놓은 것으로 일방적으로 하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내가 당황해 하며 쭈빗거리자 설레발을 치면서 다짜고짜로 무찔러오는 말이 사전에 백화점을 쇼핑 다녀왔나 본데 그런대나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허영심 가득한 정신 나간 여자들이라며 빗대어서 들으라고 말을 해대는 것이었다. 백화점에는 누가 갔다 왔다고 하는 소리인가. 그때에 나 역시도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날 그 자리에는 나와 시누이 될 사람과 중간 역할을 하던 아주머니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했다. 중매를 선 것은 아니지만 예를 갖추고 조심하기 위하여 양가를 서로 아는 예전에 한동네에 살았던 영란이 언니네 어머니가 중간 역할을 하기위해 참석했던 것이었다.
나는 패물을 맞추던 날 언니라고 불렀던 시누이 될 처지의 행동에 대해 무척이나 당혹감을 느꼈고 솔직히는 불쾌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마지못한 가운데 그녀의 처신을 따랐다. 보지도 않고 마치 나를 들여다 본 듯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언짢았고 싫었지만 내색하기도 뭐해서 어정쩡한 표정으로 꾹 참으면서 한편으로 무척 걱정이 되었다. 생각하지도 않은 일을 마치 본 듯이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몹시 당황할 뿐이었다. 결혼의 당사자와 둘이서 의견을 교환하며 맞추었으면 좋겠는데 그가 시간이 없다면서 누이와 하라고 하니 무척이나 난감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있지도 않은 소릴 하는 것이 부당하게 생각되는 한편 결혼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부터 앞으로의 사태가 심히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흔희 결혼식전에 겪을 수 있는 해프닝정도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후에 아니나 다를까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나야 직접 가서 맞추곤 했으니 제2, 제3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본인의 의사와 전혀 다르게 행하여진 일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디자인과 알의 크기 등은 시누이가 원하는 이상으로 욕심껏 맞추었으니 상관이 없지만 그 굵기 등이 맞지를 않아 급기야 새 반지를 가지고 도대체 몇 번을 우그러뜨리면서 다시 늘렸던지 나중에는 나달나달 가늘어져도 잘 맞지 않아 결국에는 그 반지를 낄 수조차 없었다. 나로서는 무지 언짢고 화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꼭두각시노름도 아니고 뭐하자는 건지 짜증이 날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반지란 끼기 위해서 맞추는 것이다. 나는 좋은 것 화려한 것이 아니더라도 마음 맞춰 결속을 다짐하며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한 절차들이 모두 생략된다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도 찜찜했다. 더군다나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인데 살다가 몸이 불어서 맞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게 재산 목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누이의 요구대로 맡겨두며 일을 처리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맞지 않아 제대로 맞추러 가자고 하면 그렇게 하마 해놓고는 딴소리고, 되레 더 짜증스러운 일인 양 표정을 나타내고 하니 그를 어려워하던 때라 내 심기만 몹시 불편하였다.
어찌나 근엄한 척 은근히 사람을 잡으려는 심사로 대하니 의사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지 못해 끙끙 앓기 시작했다. 예물이고 하니 반지를 제대로 손가락에 맞게끔 하기 위해 시간을 내서 다시 가는 동안에도 하도 불편한 마음이 들도록 하여 가다가 멈추고 돌아오고는 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애써 보석가게 앞까지 갔다가 내리지 않고 차를 몰아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시내가 너무 차가 막히니 주차할 데도 마땅찮고 내리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그건 이미 사전에 다 아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려면 전철을 탔을 일이지 차를 끌고 나와 기껏 거기까지 가 놓고 안 들어가겠다는 저의가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차에 있을 테니 나더러 혼자 가서 늘여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맡겨놓은 것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손가락에 잘 맞추기 위해 간 것인데 기껏 코앞에서 내게 떠미니 그게 도대체 무슨 심사인지 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왜 같이 갔나? 의미가 없지 않나 그 말이다.
그는 그때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 오면 운전하기를 매우 번잡스러워하며 당황하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운전을 할 때면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딴엔 내 앞에서 폼을 잡느라 내색을 하지 않고는 있었지만 서울 한복판 운전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가끔씩 서울에 와서는 자주 교통법규를 위반한 딱지를 받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왕에 그 앞에까지 가서 되돌아가자고 하니 나는 기가 막혔다. 하도 복잡한 교통채증을 싫어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전에 아예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하면 말을 듣지 않고 또한 운전에 대해 미숙한 것 같아 염려를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양 큰소리를 쳐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꼭 이런 식이니 그를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그는 다음에 제대로 시간을 내서 꼭 같이 가서 잘 맞게 하자는 말을 미끼로 남겨두었지만 그러한 말들이 일련의 임기응변식으로 순간을 모면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때는 설마하며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한 내키지 않는 상황들로 지내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곰곰이 생각에 빠지며 결혼에 대해 혼란스러운 회의에 골똘히 빠져있을라치면, 반드시 전화를 걸어와서는 몇 시간씩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분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둥 자기가 모처럼 서울에 올라와 차가 막히고 하면 짜증이 나서 그러니 다음에는 시간을 넉넉히 내서 꼭 같이 가겠노라며 아주 철석같이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번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들이 바로 일상의 그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내 방식의 꿈을 그리며 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그가 아니었고 내 꿈속에서 공상의 구름다리를 날아다니는 한낱 허깨비와도 다름없는 유령에 불과 했을 일이다.
언젠가 다음에도 또 폐백과 신행 때 입을 한복을 겸사해서 몇 벌 맞추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시어머니 되실 분이 우리 엄마를 불러내더니 시누이와 함께 감을 다 떠주시더라는 것이다. 내가 출근 하고 없는 동안의 일이라 엄마는 평소의 내 의사를 잘 알기에 마다했지만 얼렁뚱당 해가며 감을 끊어버리는 통에 그쪽에 맞추어서 그리 할 수밖에는 없었다면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천을 떠가지고 오셨다. 하지만 어른들께서 이미 결정을 한 사항이라서 그냥 맞추라는 곳에 가서 맞추었는데 신랑감은 시간이 없다며 치수를 재서 옷을 만드는 바람에 너무 작게 만들어져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서 기어이 새로 돈을 들여서 다시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에 잘 맞지가 않았다. 무언가가 옹색하게 만들어져 간신히 입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부담하는 돈만 배로 들였지 실속은 하나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헛고생만 하는 것이었다. 지켜보기도 우습기보다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면이 사실 더 많았지만 혼사를 앞두고 자꾸 싸울 수도 없고 해서 되도록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고비를 넘기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반복은 처음에야 어쩔 수 없이 얼버무리며 웃고 넘기지만 자주 반복 된다면 무지하게 짜증스럽고 이러한 사사건건의 이들이 쌓여서 종당에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운명이 장차 혼자서 살 팔자였는지 피할 수 없는 악연으로 이미 예정 되어 있었던 것인지 나는 이러한 부분들이 심히 유감스럽고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우리 식구들은 모두들 별 것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큰오빠 내외는 외국에 나가있고 작은오빠는 지방에 살며 막내오빠만이 겨우 상의해볼 만 했지만 그들은 순수하게 연애결혼을 해서 이런 격식 따위에 애초 의미를 두지 않았고 자기들이 나에 대해 전혀 상관없이 사니까 다른 집들도 다 그런 모양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덧붙여 엄마 역시도 지금은 한껏 시누이 노릇을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그리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사위될 사람과 시어머니를 더 철썩 같이 믿고 계시는 것이었다. 범이 밉다고 제 새끼를 잡아먹지는 아니한다는 순전히 당신식의 해석을 하시면서.
나도 우리 엄마가 며느리에게 하듯 살림을 하게 되면 그 집안도 그렇게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우리 엄마도 며느리에게 화를 내시기도 한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전화코드를 뽑아버리거나 꼴 보기 싫어하며 아예 어디로 몸을 숨기거나 하는 일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시다. 딱 불러다 놓고 선은 이러하고 후는 이러한데 너희들은 무슨 의견이냐고 묻고 나무라고 따지지 경우에 없게 생떼를 쓰시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이 문제를 무지 고민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등뼈로 반듯하게 서서 꼿꼿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와 그렇지 못한 경우의 삶의 태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란 걸 이해하게 되었다. 논리적으로는 합당치 않으니 말로는 못하고 공연히 트집을 잡거나 아예 따로 툴툴거리며 자기들 끼리 입 맞춰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가 터지면 일이 계속 악순환으로 돌아가게 되고 만다. 누구도 속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당연한 이치이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이가 먹어도 당당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서 자신의 대접을 받으려고만 요구하는 사람들은 정당하게 구해내지 못하고 생떼를 쓰거나 트집을 잡아가며 억지를 써서라도 상대를 제압하고 말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득권을 지켜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일종의 성취감마저도 느낀다는 점은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한다고 비유하면서 서슬이 퍼래 고함을 지를 때면 차근히 발단의 선후를 따질 수 없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어있다. 이때 중심을 잡고 사리분별을 바로 하여 교통정리를 잘해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이라도 참다운 가장이 되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균형감 없이 설익은 사람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사람은 호주에다가 외아들에 누이까지 건사하며 살았지만 마치 상납을 하듯 돈을 벌어다가 바치는 일이 아니고서는 아들 대접과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고유한 제 몫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닌 말로 부모 형제로부터 병신머저리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두들겨 패서라도 나를 잡아놓아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도 했다. 그 스스로도 이러한 입장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억울한 일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힘이 모자라고 폭력을 싫어하는 나는 그의 폭력과 폭언에 번번이 나가떨어지고 말 수밖에는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팍팍 꽂혔고 무지하게 심한 고통을 동반하여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와 싸우면서 나도 날마다 사나워져 갔다. 힘으로는 당할 수가 없으니 나도 악을 쓰고 덤비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천하에 등신이 아닌 바에야 두고 보며 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결혼 전까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척척 다 해오며 살다가 새삼스레 일일이 누구에게 하소연하면서 쏟아내고 살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알 듯 몹시 자괴심만 들었다.
일을 하면 무조건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밀어붙여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해 내고야 마는 것은 시누이의 특기에 가까운 기질이요 일처리 방식이기도 했다. 나는 나와 부딪히지 않는 일에서는 그의 추진력을 한편으로 대단한 능력으로 인정하며 영웅처럼 추앙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 폐해가 나를 상대로 전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기준에 의해 멋대로 조작되어지는 그런 식의 무지막지한 행동을 겪으면서는 무척 꺼려하게 되었다. 그의 행동이 매우 불편하고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색시로서 되도록 상대에게 최대한 맞추어 편의를 보아 돌봐주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태도와 실행일지라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기에 어쩔 수가 없기도 하였다.
그래서 차라리 쓸데없는 패물은 하지 않고 내 것은 실용적으로 간단하고 간편하게 하면서 일상에서 착용 가능한 것으로만 하면서 순종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말도 안 되게 가관이다 싶게 자기 쪽의 요구는 크게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패물 같은 것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또 우리 집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사위 하나 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 하셔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그냥 다 맞추어가며 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견해로 따진 다면 형평이 심히 맞지 않는 경우였다. 대게는 패물은 아무래도 여자가 더 받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지도 못하면서도 은근히 자기들은 속을 드러내며 크게 바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시집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그때 패물을 맞출 때 나하고 똑같이 자기도 맞추어 놓은 것을 보고는 솔직히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내 것을 다 맞출 것을 하고. 하여튼 우리는 최대한으로 남들에게 빠지지 않도록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설마하니 그 정도로 당당하게 요구할 것이면 정말 살 집이라도 제대로 잘 갖추어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은 줄 알면서 말이다.
그런데 결혼이 임박해서야 나중에 알고 보니 방하나 구해 놓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너무나 순진했고 너무나 남을 믿은 것이 잘못이고 큰 실수이고 또 그것을 이해한답시고 문제로 삼지 않은 것이 되레 더 큰 화근으로 일파만파 번져갔던 것이다. 나는 패물을 하면서 시누이의 태도가 염려스러워 걱정을 토로하였었다. 그런데 너무나 순진한 우리 집 식구들은 그 시누이의 성정을 그저 좋게 이해하려고만 했다. 우리 마음 같은 줄 알고 누이가 결혼을 못한 상태에서 장가를 들이는 경우라서 그럴 것이며, 패물 따위가 중요한 것도 아니니 신경을 쓰지 말라는 취지에서였다.
황당해 보일 수 있는 다소 무리한 요구에 대해서는 아들이 하나인지라 기대가 커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결혼을 할 때의 신경전이려니 하고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그런 일들은 결혼 후 자연히 다 해소 될 일이라고 안심시켰다. 결혼하고 나면 누이가 그렇게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당분간 참고 넘어가주라고 하면서 우리식구들 마음처럼만 생각했던 것이다. 단순하고 단발적인 히스테리거니 간과했던 것이리라. 나도 경험도 없고 언니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참아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우리 친정집의 경우 어머니가 알아서 오빠들 신접살림의 어려움을 미리 예상하고 기반을 다 잡아주신 데다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살아가니 형제들도 그런 점에 대해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해야 아마도 옳을 것이다. 올케들에 대해서도 받기보다 우리 식구가 되는 거니까 아무리 해주워도 아까울 것이 전혀 없다는 사고로 대하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쪽에서 의당 알아서 제 살림하듯 처리하니 문제가 없고 우리 친정의 올케들은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니 집처럼 일반적인 생활로 곧 자리 잡게 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 누이로서는 끈 떨어지는 섭섭한 입장이어서 그런가보다 이해를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시집될 쪽의 내막을 속속 들이 다 알 수는 없는 통에 그저 우리네 집처럼 살려니 하고 알았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시어머니 되실 분의 심정을 오죽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마지막이니 오히려 잘해주고 싶어 하셨다. 어쩌면 시어머니 입장에서 난처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앞서 헤아려주시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감싸는 마음으로 특히 그 시누이에 대한 예단도 다른 가족과는 다르게 성심껏 준비해 주시기도 하였다.
시어머니 될 분의 말씀으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 준비된 것인 줄 알았는데 결혼에 임박해서야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서 본인에게 물으니 회사가 어떻게 발령을 낼지 몰라서 마련을 못한 것뿐이지 결정만 나면 바로 집을 구하면 된다고 그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어서 또 그런가보다 했다. 미리 세간도 준비해야 하고 해서 물어보았더니 날짜가 임박함에도 아무 준비도 전혀 돼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몇 년 후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누이는 나를 꾀고 어르며 돈으로 가져오면 보태서 잘해주겠노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던 것이었던가 보다. 그녀는 마치 제가 시집을 가기나 하는 것처럼 장롱도 혼수도 자신의 요구대로 해올 것을 주장하기에 바빴다. 그의 월급을 통장 째 관리하고 있었지만 결혼할 밑천을 어디다 어떻게 했는지 제대로 마련해 놓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선 일이나 성사시켜 보겠다는 그 집안 특유의 방식으로 일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물론 잘 살았으면 이것도 아무 문제가 아니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처리로 아무 일 없을 리 오히려 만무하다.
그리고 결혼직후 그가 처리한 대로 애시의 약속만 잘 지켜져 살았더라면 시집과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부딪힐 일도 없이 아무런 문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비록 재산이 많지 않고 가진 것이 적다해도 그런 것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닌 것을 긴 것처럼 꾸미고 살다보면 그 일 한 가지로만 간단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발생되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정직하지 않은 생활태도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란 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점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 정말로 같이 사는 남자이지만 이해되지 않고 속상했다. 자기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닌 것처럼 말을 하지만 그리고 나도 그렇게 믿고 살고 싶었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의 경우에 한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구 휘둘리며 마흔 살까지 살아온 사람은 그가 남들 앞에서 말로 보여주거나 하는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예전의 익숙한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고 그렇게 이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와 살면서 겨우 알고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생활과 습관이란 무의식중에 살아온 대로 익숙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 일시적으로 잠깐 동안 개과천선하듯 바꿔보려 하지만 일단 목표달성을 이룬 다음에는 본래의 의도가 튀어나오게 마련인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은폐와 조작은 시도한 당사자가 더 먼저 불편하기에 오래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쪽과 원인 제공을 한쪽에서 결국에는 내몰리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도리어 못살겠다고 선수를 치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뒤를 쫓아 잘잘못을 명확하게 따지고 옳고 그름을 밝혀내는 쪽의 잘못이 절대 아닌 것이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만큼 일시적으로나 위안을 주는 것이 몹시 불안하기에 그토록 끈질기게 관찰하며 상대의 섣부른 행동들을 살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맞바람을 피우든지 맞장구를 칠 의사가 없는 착하고 순한 사람들의 지독한 억눌림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아예 이판사판으로 자신 있게 나가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살아갈 궁리가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재산이랄지, 아이들이랄지, 일이랄지, 자기계발이랄지 하다못해 샛서방에 대한 동경 등등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두지 않고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매달리듯 애원하며 제대로 처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대게의 착하고 성실한 주부들의 너무나도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꿈을 꾸는 작자들의 태도란 저도 제 한목숨 부지하고 살아가기 위하여 그 와중에도 호시탐탐 살아남을 구멍은 본능처럼 찾아 헤매는 것이고 상대가 어찌 되든 나몰라 하며 아랑곳 하지 않고 제 한목숨만 귀한 듯 정신을 잃고 마는 것이기 일쑤다.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헤어짐의 지름길로 치닫는 것과 다름 아니다. 도대체 아이들 때문에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아이들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이들 때문에 사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마침내 갈 때까지 이르러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치닫겠다는 심사가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정말로 결혼이란 것을 하고 난 이후에야 내게 간접 경험의 부족과 독서에 태만했던 내 자신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결혼 생활의 난관에 처하는 경우들을 전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비록 그러하지 못했더라도 좋은 배우자를 만났더라면 순조로운 인생이 펼쳐졌겠지만 그러한 복도 못 타고 태어났던 것인지 잘못된 선택과 결정에 기인함 때문인지 내 인생은 그렇게 하염없이 꼬여들어 가고 말았다. 내 일찍이 박복할 것을 예상했더라면 좀 더 나았을까?
서로의 생활태도와 일상에 대한 습관이 달라 우리가 생각하는 해결의 모색과 대안이라는 것들은 늘 끝까지 성실하게 지켜지지 못하고 도중에 사상누각으로 흩어져버리고야 마는 허탈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위에 여건이 제대로 받쳐주었으면 간단히 둘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사실 둘의 문제는 그렇게 구제불능으로까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다른 여러 가지 외부가 개입됨은 사태를 더 한층 악화일로로 치닫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갈 힘이 주변에 의해 자꾸만 와해되어버리고 그래서 결국에 우리는 사이가 더 나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부부란 혼자서 살고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더 강한 더 힘센 한쪽이 제 주장만을 펴면 한쪽이 완전히 나 죽었나보다 하고 희생하지 않고는 해결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그렇게 무작정 죽기만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고 종내는 끝장이 나고야 말지 않을까.
나는 아이 아빠의 경우에도 제 식구들 변호에만 급급하지 말고 맺고 끊음을 확실히 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한다. 사내가 여자를 책임지고 살겠다고 할 때에는 임시방편적인 목적만을 취하는 편벽되고 얕은꾀만 부릴 것이 아니라, 의연하고 진중하게 자신의 언행에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 나가겠다고 하는 적극적인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지시와 욕구충족은 짧지 않은 인생을 너무나 아름답지 못하게 소모하는 가운데 쓸데없는 반목과 질시로 일상을 잠식해 버리고 말 수 있다.
IP *.36.210.80
나는 패물을 맞추던 날 언니라고 불렀던 시누이 될 처지의 행동에 대해 무척이나 당혹감을 느꼈고 솔직히는 불쾌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마지못한 가운데 그녀의 처신을 따랐다. 보지도 않고 마치 나를 들여다 본 듯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언짢았고 싫었지만 내색하기도 뭐해서 어정쩡한 표정으로 꾹 참으면서 한편으로 무척 걱정이 되었다. 생각하지도 않은 일을 마치 본 듯이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몹시 당황할 뿐이었다. 결혼의 당사자와 둘이서 의견을 교환하며 맞추었으면 좋겠는데 그가 시간이 없다면서 누이와 하라고 하니 무척이나 난감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있지도 않은 소릴 하는 것이 부당하게 생각되는 한편 결혼에 이르기도 전에 벌써부터 앞으로의 사태가 심히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흔희 결혼식전에 겪을 수 있는 해프닝정도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후에 아니나 다를까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나야 직접 가서 맞추곤 했으니 제2, 제3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본인의 의사와 전혀 다르게 행하여진 일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디자인과 알의 크기 등은 시누이가 원하는 이상으로 욕심껏 맞추었으니 상관이 없지만 그 굵기 등이 맞지를 않아 급기야 새 반지를 가지고 도대체 몇 번을 우그러뜨리면서 다시 늘렸던지 나중에는 나달나달 가늘어져도 잘 맞지 않아 결국에는 그 반지를 낄 수조차 없었다. 나로서는 무지 언짢고 화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꼭두각시노름도 아니고 뭐하자는 건지 짜증이 날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반지란 끼기 위해서 맞추는 것이다. 나는 좋은 것 화려한 것이 아니더라도 마음 맞춰 결속을 다짐하며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한 절차들이 모두 생략된다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도 찜찜했다. 더군다나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인데 살다가 몸이 불어서 맞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게 재산 목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누이의 요구대로 맡겨두며 일을 처리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맞지 않아 제대로 맞추러 가자고 하면 그렇게 하마 해놓고는 딴소리고, 되레 더 짜증스러운 일인 양 표정을 나타내고 하니 그를 어려워하던 때라 내 심기만 몹시 불편하였다.
어찌나 근엄한 척 은근히 사람을 잡으려는 심사로 대하니 의사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지 못해 끙끙 앓기 시작했다. 예물이고 하니 반지를 제대로 손가락에 맞게끔 하기 위해 시간을 내서 다시 가는 동안에도 하도 불편한 마음이 들도록 하여 가다가 멈추고 돌아오고는 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애써 보석가게 앞까지 갔다가 내리지 않고 차를 몰아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시내가 너무 차가 막히니 주차할 데도 마땅찮고 내리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그건 이미 사전에 다 아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려면 전철을 탔을 일이지 차를 끌고 나와 기껏 거기까지 가 놓고 안 들어가겠다는 저의가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차에 있을 테니 나더러 혼자 가서 늘여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맡겨놓은 것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손가락에 잘 맞추기 위해 간 것인데 기껏 코앞에서 내게 떠미니 그게 도대체 무슨 심사인지 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왜 같이 갔나? 의미가 없지 않나 그 말이다.
그는 그때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 오면 운전하기를 매우 번잡스러워하며 당황하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운전을 할 때면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딴엔 내 앞에서 폼을 잡느라 내색을 하지 않고는 있었지만 서울 한복판 운전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가끔씩 서울에 와서는 자주 교통법규를 위반한 딱지를 받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왕에 그 앞에까지 가서 되돌아가자고 하니 나는 기가 막혔다. 하도 복잡한 교통채증을 싫어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전에 아예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하면 말을 듣지 않고 또한 운전에 대해 미숙한 것 같아 염려를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양 큰소리를 쳐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꼭 이런 식이니 그를 이해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그는 다음에 제대로 시간을 내서 꼭 같이 가서 잘 맞게 하자는 말을 미끼로 남겨두었지만 그러한 말들이 일련의 임기응변식으로 순간을 모면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때는 설마하며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한 내키지 않는 상황들로 지내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곰곰이 생각에 빠지며 결혼에 대해 혼란스러운 회의에 골똘히 빠져있을라치면, 반드시 전화를 걸어와서는 몇 시간씩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분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둥 자기가 모처럼 서울에 올라와 차가 막히고 하면 짜증이 나서 그러니 다음에는 시간을 넉넉히 내서 꼭 같이 가겠노라며 아주 철석같이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번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들이 바로 일상의 그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내 방식의 꿈을 그리며 그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그가 아니었고 내 꿈속에서 공상의 구름다리를 날아다니는 한낱 허깨비와도 다름없는 유령에 불과 했을 일이다.
언젠가 다음에도 또 폐백과 신행 때 입을 한복을 겸사해서 몇 벌 맞추어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시어머니 되실 분이 우리 엄마를 불러내더니 시누이와 함께 감을 다 떠주시더라는 것이다. 내가 출근 하고 없는 동안의 일이라 엄마는 평소의 내 의사를 잘 알기에 마다했지만 얼렁뚱당 해가며 감을 끊어버리는 통에 그쪽에 맞추어서 그리 할 수밖에는 없었다면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천을 떠가지고 오셨다. 하지만 어른들께서 이미 결정을 한 사항이라서 그냥 맞추라는 곳에 가서 맞추었는데 신랑감은 시간이 없다며 치수를 재서 옷을 만드는 바람에 너무 작게 만들어져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서 기어이 새로 돈을 들여서 다시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에 잘 맞지가 않았다. 무언가가 옹색하게 만들어져 간신히 입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부담하는 돈만 배로 들였지 실속은 하나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헛고생만 하는 것이었다. 지켜보기도 우습기보다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면이 사실 더 많았지만 혼사를 앞두고 자꾸 싸울 수도 없고 해서 되도록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고비를 넘기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반복은 처음에야 어쩔 수 없이 얼버무리며 웃고 넘기지만 자주 반복 된다면 무지하게 짜증스럽고 이러한 사사건건의 이들이 쌓여서 종당에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운명이 장차 혼자서 살 팔자였는지 피할 수 없는 악연으로 이미 예정 되어 있었던 것인지 나는 이러한 부분들이 심히 유감스럽고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우리 식구들은 모두들 별 것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큰오빠 내외는 외국에 나가있고 작은오빠는 지방에 살며 막내오빠만이 겨우 상의해볼 만 했지만 그들은 순수하게 연애결혼을 해서 이런 격식 따위에 애초 의미를 두지 않았고 자기들이 나에 대해 전혀 상관없이 사니까 다른 집들도 다 그런 모양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덧붙여 엄마 역시도 지금은 한껏 시누이 노릇을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그리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사위될 사람과 시어머니를 더 철썩 같이 믿고 계시는 것이었다. 범이 밉다고 제 새끼를 잡아먹지는 아니한다는 순전히 당신식의 해석을 하시면서.
나도 우리 엄마가 며느리에게 하듯 살림을 하게 되면 그 집안도 그렇게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우리 엄마도 며느리에게 화를 내시기도 한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전화코드를 뽑아버리거나 꼴 보기 싫어하며 아예 어디로 몸을 숨기거나 하는 일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시다. 딱 불러다 놓고 선은 이러하고 후는 이러한데 너희들은 무슨 의견이냐고 묻고 나무라고 따지지 경우에 없게 생떼를 쓰시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이 문제를 무지 고민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것이 바로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등뼈로 반듯하게 서서 꼿꼿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와 그렇지 못한 경우의 삶의 태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란 걸 이해하게 되었다. 논리적으로는 합당치 않으니 말로는 못하고 공연히 트집을 잡거나 아예 따로 툴툴거리며 자기들 끼리 입 맞춰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가 터지면 일이 계속 악순환으로 돌아가게 되고 만다. 누구도 속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당연한 이치이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이가 먹어도 당당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서 자신의 대접을 받으려고만 요구하는 사람들은 정당하게 구해내지 못하고 생떼를 쓰거나 트집을 잡아가며 억지를 써서라도 상대를 제압하고 말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득권을 지켜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일종의 성취감마저도 느낀다는 점은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한다고 비유하면서 서슬이 퍼래 고함을 지를 때면 차근히 발단의 선후를 따질 수 없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어있다. 이때 중심을 잡고 사리분별을 바로 하여 교통정리를 잘해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이라도 참다운 가장이 되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이 균형감 없이 설익은 사람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사람은 호주에다가 외아들에 누이까지 건사하며 살았지만 마치 상납을 하듯 돈을 벌어다가 바치는 일이 아니고서는 아들 대접과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고유한 제 몫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닌 말로 부모 형제로부터 병신머저리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두들겨 패서라도 나를 잡아놓아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도 했다. 그 스스로도 이러한 입장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억울한 일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힘이 모자라고 폭력을 싫어하는 나는 그의 폭력과 폭언에 번번이 나가떨어지고 말 수밖에는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다 비수가 되어 가슴에 팍팍 꽂혔고 무지하게 심한 고통을 동반하여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와 싸우면서 나도 날마다 사나워져 갔다. 힘으로는 당할 수가 없으니 나도 악을 쓰고 덤비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천하에 등신이 아닌 바에야 두고 보며 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결혼 전까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척척 다 해오며 살다가 새삼스레 일일이 누구에게 하소연하면서 쏟아내고 살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알 듯 몹시 자괴심만 들었다.
일을 하면 무조건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밀어붙여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해 내고야 마는 것은 시누이의 특기에 가까운 기질이요 일처리 방식이기도 했다. 나는 나와 부딪히지 않는 일에서는 그의 추진력을 한편으로 대단한 능력으로 인정하며 영웅처럼 추앙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 폐해가 나를 상대로 전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기준에 의해 멋대로 조작되어지는 그런 식의 무지막지한 행동을 겪으면서는 무척 꺼려하게 되었다. 그의 행동이 매우 불편하고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색시로서 되도록 상대에게 최대한 맞추어 편의를 보아 돌봐주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태도와 실행일지라도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기에 어쩔 수가 없기도 하였다.
그래서 차라리 쓸데없는 패물은 하지 않고 내 것은 실용적으로 간단하고 간편하게 하면서 일상에서 착용 가능한 것으로만 하면서 순종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말도 안 되게 가관이다 싶게 자기 쪽의 요구는 크게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패물 같은 것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기도 하고, 또 우리 집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사위 하나 이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 하셔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그냥 다 맞추어가며 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견해로 따진 다면 형평이 심히 맞지 않는 경우였다. 대게는 패물은 아무래도 여자가 더 받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지도 못하면서도 은근히 자기들은 속을 드러내며 크게 바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시집에 가서 안 사실이지만 그때 패물을 맞출 때 나하고 똑같이 자기도 맞추어 놓은 것을 보고는 솔직히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내 것을 다 맞출 것을 하고. 하여튼 우리는 최대한으로 남들에게 빠지지 않도록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설마하니 그 정도로 당당하게 요구할 것이면 정말 살 집이라도 제대로 잘 갖추어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은 줄 알면서 말이다.
그런데 결혼이 임박해서야 나중에 알고 보니 방하나 구해 놓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너무나 순진했고 너무나 남을 믿은 것이 잘못이고 큰 실수이고 또 그것을 이해한답시고 문제로 삼지 않은 것이 되레 더 큰 화근으로 일파만파 번져갔던 것이다. 나는 패물을 하면서 시누이의 태도가 염려스러워 걱정을 토로하였었다. 그런데 너무나 순진한 우리 집 식구들은 그 시누이의 성정을 그저 좋게 이해하려고만 했다. 우리 마음 같은 줄 알고 누이가 결혼을 못한 상태에서 장가를 들이는 경우라서 그럴 것이며, 패물 따위가 중요한 것도 아니니 신경을 쓰지 말라는 취지에서였다.
황당해 보일 수 있는 다소 무리한 요구에 대해서는 아들이 하나인지라 기대가 커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며 오히려 나를 다독였다. 결혼을 할 때의 신경전이려니 하고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그런 일들은 결혼 후 자연히 다 해소 될 일이라고 안심시켰다. 결혼하고 나면 누이가 그렇게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당분간 참고 넘어가주라고 하면서 우리식구들 마음처럼만 생각했던 것이다. 단순하고 단발적인 히스테리거니 간과했던 것이리라. 나도 경험도 없고 언니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참아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우리 친정집의 경우 어머니가 알아서 오빠들 신접살림의 어려움을 미리 예상하고 기반을 다 잡아주신 데다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면서 살아가니 형제들도 그런 점에 대해 전혀 알지를 못했다고 해야 아마도 옳을 것이다. 올케들에 대해서도 받기보다 우리 식구가 되는 거니까 아무리 해주워도 아까울 것이 전혀 없다는 사고로 대하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쪽에서 의당 알아서 제 살림하듯 처리하니 문제가 없고 우리 친정의 올케들은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니 집처럼 일반적인 생활로 곧 자리 잡게 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 누이로서는 끈 떨어지는 섭섭한 입장이어서 그런가보다 이해를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시집될 쪽의 내막을 속속 들이 다 알 수는 없는 통에 그저 우리네 집처럼 살려니 하고 알았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시어머니 되실 분의 심정을 오죽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마지막이니 오히려 잘해주고 싶어 하셨다. 어쩌면 시어머니 입장에서 난처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앞서 헤아려주시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감싸는 마음으로 특히 그 시누이에 대한 예단도 다른 가족과는 다르게 성심껏 준비해 주시기도 하였다.
시어머니 될 분의 말씀으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 준비된 것인 줄 알았는데 결혼에 임박해서야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서 본인에게 물으니 회사가 어떻게 발령을 낼지 몰라서 마련을 못한 것뿐이지 결정만 나면 바로 집을 구하면 된다고 그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어서 또 그런가보다 했다. 미리 세간도 준비해야 하고 해서 물어보았더니 날짜가 임박함에도 아무 준비도 전혀 돼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몇 년 후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누이는 나를 꾀고 어르며 돈으로 가져오면 보태서 잘해주겠노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던 것이었던가 보다. 그녀는 마치 제가 시집을 가기나 하는 것처럼 장롱도 혼수도 자신의 요구대로 해올 것을 주장하기에 바빴다. 그의 월급을 통장 째 관리하고 있었지만 결혼할 밑천을 어디다 어떻게 했는지 제대로 마련해 놓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선 일이나 성사시켜 보겠다는 그 집안 특유의 방식으로 일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물론 잘 살았으면 이것도 아무 문제가 아니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일처리로 아무 일 없을 리 오히려 만무하다.
그리고 결혼직후 그가 처리한 대로 애시의 약속만 잘 지켜져 살았더라면 시집과의 관계에서는 더 이상 부딪힐 일도 없이 아무런 문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비록 재산이 많지 않고 가진 것이 적다해도 그런 것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닌 것을 긴 것처럼 꾸미고 살다보면 그 일 한 가지로만 간단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어 발생되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정직하지 않은 생활태도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란 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점에서 그의 역할에 대해 정말로 같이 사는 남자이지만 이해되지 않고 속상했다. 자기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닌 것처럼 말을 하지만 그리고 나도 그렇게 믿고 살고 싶었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의 경우에 한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구 휘둘리며 마흔 살까지 살아온 사람은 그가 남들 앞에서 말로 보여주거나 하는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예전의 익숙한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고 그렇게 이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와 살면서 겨우 알고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생활과 습관이란 무의식중에 살아온 대로 익숙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 일시적으로 잠깐 동안 개과천선하듯 바꿔보려 하지만 일단 목표달성을 이룬 다음에는 본래의 의도가 튀어나오게 마련인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은폐와 조작은 시도한 당사자가 더 먼저 불편하기에 오래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쪽과 원인 제공을 한쪽에서 결국에는 내몰리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면 도리어 못살겠다고 선수를 치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까지 뒤를 쫓아 잘잘못을 명확하게 따지고 옳고 그름을 밝혀내는 쪽의 잘못이 절대 아닌 것이다.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만큼 일시적으로나 위안을 주는 것이 몹시 불안하기에 그토록 끈질기게 관찰하며 상대의 섣부른 행동들을 살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맞바람을 피우든지 맞장구를 칠 의사가 없는 착하고 순한 사람들의 지독한 억눌림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아예 이판사판으로 자신 있게 나가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살아갈 궁리가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재산이랄지, 아이들이랄지, 일이랄지, 자기계발이랄지 하다못해 샛서방에 대한 동경 등등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두지 않고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매달리듯 애원하며 제대로 처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대게의 착하고 성실한 주부들의 너무나도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꿈을 꾸는 작자들의 태도란 저도 제 한목숨 부지하고 살아가기 위하여 그 와중에도 호시탐탐 살아남을 구멍은 본능처럼 찾아 헤매는 것이고 상대가 어찌 되든 나몰라 하며 아랑곳 하지 않고 제 한목숨만 귀한 듯 정신을 잃고 마는 것이기 일쑤다.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헤어짐의 지름길로 치닫는 것과 다름 아니다. 도대체 아이들 때문에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아이들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이들 때문에 사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마침내 갈 때까지 이르러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치닫겠다는 심사가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정말로 결혼이란 것을 하고 난 이후에야 내게 간접 경험의 부족과 독서에 태만했던 내 자신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결혼 생활의 난관에 처하는 경우들을 전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비록 그러하지 못했더라도 좋은 배우자를 만났더라면 순조로운 인생이 펼쳐졌겠지만 그러한 복도 못 타고 태어났던 것인지 잘못된 선택과 결정에 기인함 때문인지 내 인생은 그렇게 하염없이 꼬여들어 가고 말았다. 내 일찍이 박복할 것을 예상했더라면 좀 더 나았을까?
서로의 생활태도와 일상에 대한 습관이 달라 우리가 생각하는 해결의 모색과 대안이라는 것들은 늘 끝까지 성실하게 지켜지지 못하고 도중에 사상누각으로 흩어져버리고야 마는 허탈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위에 여건이 제대로 받쳐주었으면 간단히 둘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사실 둘의 문제는 그렇게 구제불능으로까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다른 여러 가지 외부가 개입됨은 사태를 더 한층 악화일로로 치닫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갈 힘이 주변에 의해 자꾸만 와해되어버리고 그래서 결국에 우리는 사이가 더 나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부부란 혼자서 살고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더 강한 더 힘센 한쪽이 제 주장만을 펴면 한쪽이 완전히 나 죽었나보다 하고 희생하지 않고는 해결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그렇게 무작정 죽기만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고 종내는 끝장이 나고야 말지 않을까.
나는 아이 아빠의 경우에도 제 식구들 변호에만 급급하지 말고 맺고 끊음을 확실히 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한다. 사내가 여자를 책임지고 살겠다고 할 때에는 임시방편적인 목적만을 취하는 편벽되고 얕은꾀만 부릴 것이 아니라, 의연하고 진중하게 자신의 언행에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 나가겠다고 하는 적극적인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지시와 욕구충족은 짧지 않은 인생을 너무나 아름답지 못하게 소모하는 가운데 쓸데없는 반목과 질시로 일상을 잠식해 버리고 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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