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최지환
  • 조회 수 2851
  • 댓글 수 12
  • 추천 수 0
2008년 4월 13일 23시 37분 등록
선거날. 임시휴일이긴 하지만 엄연한 빨간날이었다. 나에게 빨간날은 늘상 늦잠을 자던 날이었고,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서 아침겸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고 마트로 장을 보러 가던 날이었다. 얼마 전 샐러리맨 생활을 접은 나에게 이제 더 이상 빨간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도 않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일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날이었으며, 굳이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는 이유로 9시 10시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TV도 없고, 신문도 오지 않는 우리집에서는 오직 8시가 넘어도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아내를 통해서만 그날이 빨간날이라는 것을 느낄 수도 없었다.

한참 잠에 빠진 아내를 놔두고, 7시가 조금 못 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시휴일이었던 그 날은 나에게는 단지 조셉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과 만나는 날이었을 뿐이다. 그 외엔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평일 낮 시간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다니는 다른 연구원들과 페어플레이를 하겠다는 생각에 대체로 직장인들이 근무하는 시간에는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은 임시휴일이기에 맘 편하게 하루 종일 조셉 캠벨에 올인 할 생각이었다.

그날 하루도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생각에 아침부터 서둘러 책을 집어 들었다. 변경연 2차 레이스가 끝나고 눈에 병이 났다. 치료를 하고 있으나, 쉽게 낫질 않는다. 책을 읽기 너무 힘들었다. 초점은 전혀 맞지 않고 약을 먹어 그런지 안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을 몇 배 더 어렵게 만들었다. 원래도 남들보다 읽는 속도가 느린데다,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 속도는 더 떨어지고, 거기다 눈까지 한 몫 해서 아주 제대로 정독을 해야만 했다. 30분이 넘어가면 이것도 힘들어, 아예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멀쩡한 눈으로 읽어야 했다. 제대로 읽힐 리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한 쪽은 멀쩡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내는 얼마 전 임신을 했다. 한 쪽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해 아내가 방문을 빠끔히 열고는 머리를 들이민다. 그리고는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먹거리를 주문한다. 토스트는 반드시 동네 역 앞에서 파는 것이어야 하며, 두부는 기름에 지져 간장에 조려야 하는 등 구매 장소 및 조리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준다. 그러면 나는 또 책을 몇 페이지 읽다말고 주문받은 음식을 사다가 또는 만들어 대령한다. 임신을 하면 먹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 뜬금없이 매우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요청해 남편을 당황케 하는 장면은 TV에서 많이 본 장면이다. 나에게도 이제 그런 상황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종일은 그렇게 책읽기와 임신한 몸으로 연구원 생활을 해야 하는 아내를 위한 먹거리 조달을 여러 번 반복한 날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먹거리 요청은 없겠다 싶을 생각이 들 저녁에 다시 책상에 앉았다. 얼굴엔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내 인생이 참 많이 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 모양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아닌, 이제야 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맞는 빨간날의 의미가 달라졌으며, 변경연의 연구원이 되어 쉬는 날을 몽땅 책읽기에 투자하고 있으며, TV에서만 보던 예비 아빠들의 즐거운 고난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기분 좋은 변화였다. 그리고 내가 만든 변화였다. 자신의 인생의 그 어떤 부분이 자신이 만든 것이 없겠냐마는, 눈 앞에 놓여진 몇 개의 객관식 답안을 선택해 만든 인생이 아닌 백지에 내가 새롭게 주관식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이 인생이 재미있었다. 앞으로 쓸 것이 얼마든지 더 있는데, 그러한 인생 속에서 살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더더욱 입이 벌어졌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 진짜 진짜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늘이 돕는다는 것. 그래서 난 이거 하나 믿고 매일매일 크고 작은 사고를 친다. 정말 하늘이 제대로 돕는지 안 그런지 잘 지켜보고 있다. 다행이 아직 성공률이 매우 높다. 조셉 캠벨이 말하기를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다시 만들어가고 있는 나의 삶이 천복을 따르는 삶인지 아닌지 한 번 지켜볼만 하다. 그저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잘 살 수 있는지 없는지 난 오늘도 실험중이다. 나는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일까?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에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중, 96p

IP *.34.17.31

프로필 이미지
소은
2008.04.14 00:08:12 *.248.75.5
우리 칼럼 여기에 올리는 건가요, 이제부터는?

지환씨, 이번 칼럼은 늘 올리던 데에 올렸어요.

'눈 앞에 놓여진 몇 개의 객관식 답안을 선택해 만든 인생이 아닌 백지에 내가 새롭게 주관식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이 인생이 재미있다'

그런 인생을 사는 지환씨를 글로나마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네요.
남들이 다가는 직장에 안가고, 혼자서 인생을 꾸려가자면 조바심이 날 만도 한데 여유만만,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마직막에 인용한 글이 지환씨의 현실인 것을 믿어요.
프로필 이미지
최지환
2008.04.14 00:27:51 *.34.17.31
네, 잘 체크해놓겠습니다. 걱정마세요. ^^

(제가 처음에 걱정하세요 라고 썼더군요.
실수입니다. 오해 마시길.ㅎㅎ)

앞으로 재미있게 사는거 더 많이 보게 되실 겁니다.

기대해주세요. !
프로필 이미지
자로
2008.04.14 07:50:29 *.152.82.96
연구원으로 공부하다 6개월이 지날때쯤 하던 식당을 접었지요.
연구원때문에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더 할 수 있었는데 조금 일찍 결심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6개월동안 백수로 지내면서 여행과 책과 글쓰기로 소일했더랬어요.
아마 제 인생에 그만큼 맘 편하게 놀았던 시간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공정한 페어플레이를 말하는 것보다 더 앞으로 뛰어나가면 어떨까요?
공부는 스스로를 '자본을 가진 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니, 다른 이보다 경제적인 구속을 포기한 대가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프로필 이미지
거암
2008.04.14 08:45:04 *.244.220.254
1인 기업가의 길에 대한 선택!
힘겹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당신의 선택에 격려의 갈채를 보냅니다 ^^
프로필 이미지
최지환
2008.04.14 10:15:31 *.34.17.31
자로형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요즘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이 좀 있습니다.
단지 변경연 과제 뿐만이 아닌, 전체적인 시간 안배에 관해서~~
암튼 더 앞으로 뛰어나가면 어떨까?라는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거암형님. 언제나 아낌없는 응원, 감사합니다. 든든합니다. ^^
프로필 이미지
서지희
2008.04.14 12:30:34 *.41.62.236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믿을 것'

캠벨이 가르치는대로 자신을 다지는 길을 떠난,
서른세살에 이런 과정을 스스로 겪는 그대야 말로 영웅 아닐까요.
그대의 이쁜 가족들 덕분일 것이고, 부모님 덕분일 것이고,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의 작은 공로이길 바래요. ㅎㅎ 샬롬, ^!~
프로필 이미지
홍스
2008.04.14 13:23:21 *.117.68.202
지환아~~~
기냥 이렇게 불러도 되나..ㅋㅋ
휴일을 잊은 그대. 월화수목금금금은 아닌지..
부드러운 카리스마 화이팅,,^)^
프로필 이미지
오현정
2008.04.14 13:34:45 *.84.240.105
나도 그대랑 같은 쪽으로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면 하늘이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것.."

"when you want something, all the universe conspires in helping you to achieve it" From Alchemist
프로필 이미지
정산 최현
2008.04.14 15:19:33 *.97.37.242
4기 동기 중 가장 젊은 두사람이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올 가을엔 분명히 훌륭한 아빠가 될거예요
프로필 이미지
유인창
2008.04.14 15:31:36 *.64.21.2
지환. 오늘은 두부찜 안했는감.
춘곤증에는 단백질이 좋다는데...

열라리 졸려...
프로필 이미지
양재우
2008.04.14 15:35:40 *.122.143.151
"믿음이 필히 밥 먹여주리라는 사실, 그것은 변치않는 진리이리라."

당신의 힘과 능력, 그리고 영웅질을 믿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최지환
2008.04.14 22:41:47 *.34.17.31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네요.

우리 부부보다 다들 온라인에 강하셔~

감사 감사합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212 [33] 시련(11) 자장면 한 그릇의 기억 secret [2] 2009.01.12 205
5211 [36] 시련12. 잘못 꿴 인연 secret [6] 지희 2009.01.20 209
5210 [38] 시련 14.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사람. secret 지희 2009.02.10 258
5209 [32] 시련 10.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secret [2] 2008.12.29 283
5208 [37] 시련. 13. 다시 만날 이름 아빠 secret [3] 2009.01.27 283
5207 [28] 시련(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secret [8] 지희 2008.11.17 330
5206 칼럼 #18 스프레이 락카 사건 (정승훈) [4] 정승훈 2017.09.09 1661
5205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모닝 2017.04.16 1663
5204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4.29 1717
5203 9월 오프모임 후기_느리게 걷기 [1] 뚱냥이 2017.09.24 1746
5202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file 송의섭 2017.12.25 1750
5201 2. 가장 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 2018.03.05 1779
5200 결혼도 계약이다 (이정학) file [2] 모닝 2017.12.25 1781
5199 7. 사랑스런 나의 영웅 file [8] 해피맘CEO 2018.04.23 1790
5198 11월 오프수업 후기: 돌아온 뚱냥 외 [1] 보따리아 2017.11.19 1796
5197 (보따리아 칼럼)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은? [4] 보따리아 2017.07.02 1797
5196 12월 오프수업 후기 정승훈 2018.12.17 1799
5195 일상의 아름다움 [4] 불씨 2018.09.02 1806
5194 칼럼 #27)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 (윤정욱) [1] 윤정욱 2017.12.04 1809
5193 #10 엄마와 딸 2–출생의 비밀_이수정 [5] 알로하 2017.07.03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