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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7일 20시 10분 등록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꽃잎을 날렸다. 나는 그것들을 한 웅큼 주워서 머리 위로 뿌리며 몇 발짝을 달려간다. 뒤를 따르던 직원들은 빙긋이 웃는다. 봄에는 그런 것을 해줘야 한다는 게 내 행동에 대한 변명이다. 친구녀석은 그것을 ‘봄에 대한 예의’라고 표현할 것이다.

저녁을 먹는데 창밖에 도화(桃花)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꽃잎이 날린다. 따뜻한 바람일 것이다. 저녁을 다 먹은 후 나무 아래에 서서 바람을 맞아 보았다. 부드럽다.

나는 바람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내 앞을 지나갔다면 그것은 바람, 내가 모르는 뭔가가 내 뒤를 지나갔다면 그것도 바람. 그렇게 나는 바람에 싸여 살고 있다. 또한 그러고 싶다. 바람과 같이 살고 싶고, 바람과 더불어 살고 싶다. 바람은 멈추면 안된다. 멈추는 것은 이미 바람이 아니다.

첫 번째 근무지는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기온이 올라서 이제는 정말 따뜻해 지겠다 싶으면 그것을 상쇄시키려고 바다쪽에서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해륙풍이 부는 해안에 접한 곳에서 근무를 했었다. 바람이 좋았다. 바람은 내 타는 속을 식혀 주었다. 바람 속에 내 한숨도 실려 보냈다. 바람 속에서 크게 숨을 쉬었다. 바람 속에 서면 내 손으로 복잡한 머리를 흩으지 않아도 되었다. 바람은 언제나 하늘에서 뭔가를 가지고 내려왔다. 두 번째 근무지로 이동을 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했다. 점심을 먹고나면 언제나 불어오던 바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속타게 했다. 타는 속에 커피를 더 보태어 속을 달랬다. 그리고 그후 바람이 없는 곳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이전에 바람이 없는 곳에서도 잘 살았던 것처럼, 바람이 없는 속에 사는 것에 점점 익숙해졌다.

지인들은 내 주변에 불고 있는 바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예전만큼 추위를 타지 않는다. 전에는 손이 시러워서 도저히 호주머니에서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손을 빼고 싶어도 추워서, 손이 얼음같이 차서, 그러다가 냉기에 눌려서 아프기 일쑤였다. 늘 추웠었다. 나는 웅크리고 살아야 했다. 지금은 웅크리던 어깨와 허리가 펴졌다. 호주머니에서 손을 뺄 수 있을 만큼 세상은 따뜻해졌다. 주위를 불던 찬 바람이 줄었다. 내게서 나던 바람 냄새가 없어졌다. 바람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바람이 부는 것이다. 주위를 부는 바람이 추위를 몰고 오는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바뀐 것 같다. 따듯해졌다. 어쩌면 내 안에 열원(熱原)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빠작빠작 금새 타 버리고 꺼져 버리는 불이 아니라, 은근히 따듯하게 하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날아들었나 보다.

양(陽)과 음(陰)을 알려달라는 제자의 말에 스승은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양과 음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양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제자는 물었다. “양은 어디에서 옵니까?” 스승은 대답했다. “따뜻한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온다.”

따뜻한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온다.

봄이다.
따뜻한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온다.

남덕(南德).

나는 사람이 좋다. 따뜻해서 좋다. 따뜻해서 좋다. 따뜻해서 좋다. 사람이 좋다. 따뜻해서 좋다.

화가 이중섭은 일본에 유학을 가서 거기에서 평생을 사랑할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녀와 결혼하여 한국에 와서 살다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부인과 아이들을 일본의 친정집으로 보내놓고는 같이 하지 못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리움을 구구절절 담아 편지와 엽서를 보낸다. 이중섭의 아내, 그녀의 한국 이름은 남덕(南德)이다. 남쪽에서 온 밝음, 사랑, 빛, ……. 남쪽에서 온 그의 사랑, 그의 빛, 그의 웃음.

남덕, 사랑, 생명.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온다.
사람이 좋다. 따뜻해서 좋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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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희
2008.04.17 21:11:30 *.41.62.236

사람이 좋다.

정화씨는 부드러운 사월의 훈풍이었나요.
안경을 벗고 웃고 있는 그 눈매가 그윽한 이유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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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4.18 09:48:27 *.122.143.151
사람을 좋아하는 그런 정화가 좋다...

내가 아는 정화가 이런 정화라서 더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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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정
2008.04.18 11:41:08 *.84.240.105
그래서 정화씨가 점점 예뻐지나 봐요..
볼 때마다 예뻐지는 것을 자신은 아시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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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4.21 08:20:18 *.247.80.52
지희님, 봄 입니다. 꽃샘바람까지도 따듯해진 봄입니다.

양재우님, 오현정님....
사람들이 저보고 연애하냐고 묻곤 합니다. 아닌데.
저를 따뜻하게 보는 그대들의 눈 속에서 조금씩 활기를 얻어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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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21 09:50:19 *.244.220.254
글 좋네~ 봄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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