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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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치앙칸
한가한 거리에 햇빛 쏟아지는 테라스에 앉는다. 30분에 한마디씩 천천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 시간은 여유롭다. 앞으로는 큰 강이 흘러, 흘러가는 강처럼 시간을 놓아, 흐르게 놔두면 내 목에 걸린 목줄은 사라진다. 여유의 여유조차 잊는다. 두어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이상할 것 없는 사람과 즐기는 단아한 하루, 혼자여도 상관없다. 이런 하루가 쌓이면 인생에 갑이 된다. 빌어먹을 회사의 중장기 전략을 책상 끝으로 밀쳐 내고 나는 떠났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억지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움켜 쥐고 떠나온 치앙칸, 그곳에서 움켜 쥔 시간을 ‘툭’하고 한번에 내려 놓았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과 태국은 접해 있다. 태국 쪽 접경 도시 농카이에서 북서쪽으로 170km 떨어진 곳에 치앙칸이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다. 업무시간에 구글 맵에서 봤다. 강을 사이에 두고 라오스와 접한 마을이었다. 지도에서 찍고 차로 무작정 달렸다. 가는 중에 날씨는 세 번이 바뀐다. 차 앞 유리가 부서져라 내린 폭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졌고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은 숲을 지나며 서늘하기까지 하다. 아이들은 픽업 차량 짐칸에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구른다. 언제부턴가 덮어놓고 내달리는 여행의 맛을 알아버렸다. 라오스와 태국 인근 지역을 여행할 때면 숙소조차 미리 정하지 않는다. 몸 뉠 곳 없을까 하는 태연한 긍정과 우연에 대한 활짝 열린 마음은 여행자의 스피릿이다. 도착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묵을 곳을 찾는 재미는 생략할 수 없는 여행의 묘미다. 마음에 드는 숙소에 들어가 창문을 열어보고 내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상상한다. 지는 노을의 방위도 가늠해본다. 숙박비가 턱없이 비싸면 흥정도 하며 주인의 됨됨이를 알아채 보려 노력하고 이곳 사람들의 재미있는 말투와 손짓도 흉내 내본다. 말도 안 되는 값을 부르고는 악수를 시도하면 주인으로부터 너 같은 놈 처음 본다는 시선을 받는다. 지드래곤을 좋아한다면서 못이기는 척 넘어갈 듯하다가도 결국 깎아주지 않는 모진 주인을 만나면 다시 내가, 받았던 시선을 돌려준다. 여행이다. 외국생활의 고단함은 이런 즉흥적이고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으로 눈 녹듯 녹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치앙칸은 완벽하게 불완전했다. 그래서, 완벽했다.
메콩강을 경계로 길게 늘어선 아름다운 산책길이 인상적인 마을이다. 비수기이고 아직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라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태국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자국 관광지라 들었다. 이 정도면 외국인 배낭여행객들이 환장하고 덤벼들 마을이다. 의외로 한산하다. 한산한 작은 시골도시, 길 한 가운데를 다니며 시간의 부피를 가늠하면 천천히 걸었다. 조용하다. 아름답다. 칵테일을 잔 채 들고 아기자기한 골목을 돌아다녔다. 허리띠를 풀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걷는다. 가끔 하는 헛소리에 아내에게 뒤통수를 살짝 맞기도 한다. 가슴팍 단추 하나를 풀어헤치고 걷는 낯선 길, 조금 취하면 어떤가, 가끔 들려오는 음악에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이들이 손가락질 하며 웃었다. 이내 웃으며 따라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좋아하고 어른들은 어른 대로 좋다. 지나는 길에 기발한 먹거리를 보면 한참을 구경한다. 아이들이 사달라 졸라대면 실랑이 끝에 마지못해 사준다. 방금 시끄럽던 아이들은 먹느라 조용하다. 입은 긴 꼬챙이에, 눈은 앞서 걷는 엄마에 고정시키며 곧잘 따라붙고 있다. 그 모습을 힐끗 돌아보곤 아이들이 언제 저렇게 컸냐며 달인 웃음을 웃는다. 여행이다. 새 파란 하늘에 미켈란젤로가 그렸을 법한 구름, 강물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작은 배, 흙탕물 가득 싣고 떠내려가는 어머니의 강, 메콩. 테이블엔 가득 따른 맥주잔, 그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오렌지빛 태양. 시간아, 멈추어라.
앉은 자리가 편해 길게 앉았더니 고개가 젖혀 진다. 땅거미가 앉았다. 하늘을 보니 빽빽하게 빛나는 별들이 얼굴로 쏟아진다. 순간 나의 물리적 시간도 철퍼덕 드러눕는다. 나는 드디어 놓여난다. 꽉 쪼여진 건 죄다 갑갑하다. 마음을 콱 쑤시는 말들, 흥행과 유혹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해야 할 것들은 겁나게 많고 하고 싶은 건 단 하나도 못하게 한다. 씨바, 징그럽게 일했다. 돈이라는 건 원한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잡을 수 없는 돈을 좇다 보니 원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되고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되고 누군가가 시킨 일을 하며 살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삶의 강물이 나를 이리로 이끌었다 하더라도 어쩌겠는가, 야비하게 질문 뒤에 숨지만은 말자. 질문을 붙들며 살다 보면 언젠가 이 여행처럼 우연의 모습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나의 노동’이 찾아오겠지, 그리 믿어라. 지난한 삶, 시시한 삶, 지겨운 삶에 대한 분노를 애써 숨기지만 않으면 된다. 잊지 마라. 비 내리는 구름 위엔 언제나 눈부신 태양이 밝게 내리쬐고 있음을. 밤이 깊어간다.
만만치 않은 외국생활을 온 도시로 위로해 준 치앙칸에게 감사하다. 이제 왔느냐며 안아준 치앙칸이 고맙다. 세상엔 나만 숨겨 두고 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다. 사람들에겐 알리지 않으마. 돌아오는 길 도로에서 파인애플을 샀다. 100바트 그러니까 우리 돈 3천원에 내 머리통만한 파인애플을 아저씨는 어쩌자고 담고 또 담는가. 남는 게 있을까 싶을 때 10개를 담고 더는 담을 수 없어 포기한다. 내 몸이 들어갈만한 대형 광주리, 치앙칸을 그대로 들고 온 듯 풍성하다. 이웃집 할아버지 댁 현관에 몇 개를 걸어놓고 나눠 먹었다. 어찌 이리 달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