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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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와인을 마셔본 날을 기억하시나요? 제가 처음 와인을 마셨던 건 1995년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 해에 저는 서호주(Western Australia)의 퍼스(Perth)라는 도시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는데요, 야외 활동 프로그램의 하나로 근처의 와이너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날 방문의 목적은 와인 테이스팅이었지만, 와인을 마셔보고 향이나 맛을 느끼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진짜 목적은 학원에서 배우는 영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해보고, 호주의 자연환경과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 와인 좀 마셔봐도 될까요?(Can I try that wine?)”라는 말을 열심히 연습하다가 저는 그만 와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술은 으레 쓰고 맛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선배들의 강요로, 아니면 취한 기분이 좋아서 맛이 없어도 참고 마셨더랬지요. 그런데 와인은 좀 달랐습니다. 술인데도 달콤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어떤 와인은 신맛이 좀 더 강한데, 마신 후에도 강렬한 느낌이 남아 있었습니다. 똑같아 보이는 와인이 종류에 따라 조금씩 맛이 다른 것도 참 신기했지요. 테이스팅이라 맘껏 마시지는 못했고 적당히 기분 좋은 상태로 집에 왔던 것 같습니다.
와인을 마셔본 적은 없어도 ‘와인은 프랑스’ 정도의 상식은 있었던 터라, 호주에서 첫번째 와인을 마시고, 그 맛을 즐기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알고 보니 호주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와인 수출국이었습니다. 와인의 세계에서 호주, 미국, 칠레,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유럽을 제외한 와인을 “신세계 와인”이라고 합니다. 호주는 신세계 와인이라 역사는 길지 않지만 넓은 땅에서 다양한 기후와 토양에 맞게 많은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된 시라즈(Shiraz)
“이곳은 포도 재배에 완벽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른 데 눈 돌리지 않고 포도 재배에 전념한다면 이곳의 와인은 유럽 상류층의 식탁을 장식하는 명품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1788년에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의 초대 총독을 지낸 필립(Phillip) 대령이 런던의 상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의 믿음은 200년이 지난 뒤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호주의 와인이 처음부터 잘 됐던 건 아닙니다. 당시 호주에서 와인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은 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와인을 마시던 계층이 아니었습니다. 와인은 커녕 포도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필립 대령이 완벽하다고 했던 기후는 사실 포도를 키우기에는 너무 덥고 습기가 많았습니다. 1790년 처음으로 2,000 그루의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정작 수확은 두송이에 그쳤다지요.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보다 좋은 기후를 찾아 이동했습니다. 남쪽으로는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South Australia), 빅토리아(Victoria), 태즈매니아(Tasmania)로, 그리고 서쪽으로는 제가 살았던 서호주까지 재배 영역을 넓히며 다양한 품종을 키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산량은 많이 늘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호주 와인은 값싼 테이블 와인 중심이었는데요. 1980년대에 이후 고급 품종을 생산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호주는 세계 4위의 와인 수출국입니다. 미국의 경우 이탈리아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수출하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호주 와인의 강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강점은 넓은 땅에서 비롯된 ‘다양성’입니다. 호주는 미국만큼이나 땅이 넓은 나라로 다양한 기후와 토양을 갖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포도 품종을 재배할 수 있겠지요. 특히 프랑스의 론(Rhone) 지역에서 들여온 시라(Syrah), 호주식으로 시라즈(Shiraz)라 부르는 품종은 호주를 대표하는 레드 와인이 되면서 론의 시라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출처: https://winesdirect.ie/blog/corks-vs-screw-caps-debate/
호주 와인의 또다른 강점은 개방과 혁신입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와인은 AOC, PDO 등을 통해 원산지를 통제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전통적 제조방법과 생산자를 보호하고 높은 품질관리가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새로운 생산자의 진입이 어렵고 신기술 도입에 소극적이라는 단점도 있습니다. 반면에 호주는 포도재배나 와인 제조를 통제하는 엄격한 법률체계가 없습니다. 호주의 와인 양조는 첨단기술을 받아들여 혁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호주 와인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코르크 대신 스크류 캡을 사용해서 병을 따기 쉽게 만든 것도 호주의 와인 메이커입니다. 유럽의 전통 와인 제조업자들은 기겁을 했지만 소비자들은 환호했습니다. 사실 와인 따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코르크는 굴참나무의 껍질로 만듭니다. 코르크는 신축성이 좋아서 와인 병 속에 압축되어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완전히 밀폐시킵니다. 그러면서도 코르크 속의 작은 구멍으로 미세한 양의 공기가 드나들어, 병 속의 와인을 천천히 숙성시키기 때문에 이상적인 마개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코르크는 잘못 보관시 산패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또한 한 번 개봉한 와인은 보관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호주, 뉴질랜드 등 신세계를 중심으로 스크류 캡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크류 캡은 밀폐도가 훨씬 높아 안전한 보관이 가능합니다. 또 한 번 오픈한 후에도 다시 밀봉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와인병을 열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와인병을 오픈하는 것 자체를 와인을 마시는 낭만으로 인식하고 있는 소비자들도 많지요. 또한 밀봉도가 너무 높아 숙성을 방해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오랜 기간 숙성하지 않는 와인, 특히 화이트 와인의 경우에는 스크류 캡으로 막는 게 와인의 산화를 늦추고 풍미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크류 마개 사용은 신세계를 넘어 유럽까지 점점 확산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물론 코르크 마개를 따는 것 자체를 즐기는 와인 애호가들도 많기에 코르크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네요.
이처럼 호주 와인은 자연적인 장점과 인간의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매력적인 와인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유럽에서 벗어나 와인의 신세계, 호주 와인의 간략한 역사와 특징을 알아봤습니다. 다음주에는 호주의 국민 와인 ‘옐로우 테일(yellow tail)’과 호주인들이 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나눠보겠습니다.
오늘도 맛있는 주말 보내세요~^^
* 참고문헌
<잘 먹고 잘사는 법 097, 와인> 김국, 김영사, 2007
<와인에 담긴 역사와 문화> 최영수, 북코리아, 2005
<도도한 와인의 역사> 로드 필립스, 이은선 옮김, 시공사, 2002
Wine Folly: https://winefolly.com/tutorial/corks-vs-screw-caps/
--- 변경연에서 알립니다 ---
1. [출간소식] 엄마가 시작하고 아이가 끝내는 엄마표 영어
변화경영연구소 10기 김정은 연구원이 세번째 책 <엄마가 시작하고 아이가 끝내는 엄마표 영어>를 출간하였습니다.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굳이 ‘하라 하라’하지 않아도 아이는 따라하게 되나 봅니다. 아이가 다섯 살이었을 때부터 중학생이 되기까지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찾아낸 집에서 할 수 있는 영어공부법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듣고, 읽고, 놀다 보면 영어가 되는 실현 가능한 영어교육법이 궁금하신 분들의 일독 권해드립니다:
http://www.bhgoo.com/2011/854744
2. [팟캐스트] 교양인은 무엇을 공부하는가? 2부– 많이 헤매야 내 길이 보인다
64번째 팟캐스트 에피소드는 연지원 작가의 <교양인은 무엇을 공부하는가?> 2부가 이어집니다. 연지원 작가에게 책, 여행, 와인의 의미와 글쓰기 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인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인문학과 실용성은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또한 이제 막 독서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좋은 책을 선택하여 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방송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podbbang.com/ch/15849?e=23004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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