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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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배움의 공간(학교)을 가기 위해서는 편도로 1시간을 넘게 걸어야 했다. 영웅(英雄)이 가는 길에 항상 장애물과 공포스런 괴물이 존재하듯이, 그 시절 어린 아이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괴물은 일명 삥(!)을 뜯는 동네 불량배들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다니는 통학길에는 단 한 명의 불량배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철인(?)정치의 최고 수반이 사는 동네를 지나 통학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성(城)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전두환 전 대통령. 그의 안위(?)를 위해 50미터마다 실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있는 사복경찰들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었다. 어린 소년에게 전두환 대통령은 삼청교육대와 같은 훌륭한(?) 교육기관을 통해 불량배 없는 살기 좋은 나라를 다스리는 불세출의 영웅(?)으로 뇌리에 남아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 반공소년이 나이가 들어 운좋게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나아질 게 없었다. 특별한 목적도, 꿈도 없었다. 특히나 데모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북괴의 정치야욕에 포섭된 철없는 젋은이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청년은 운명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 생각없이 담배를 꼬나 물고 학생회관 로비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이 청년은 우연히‘광주민중 항쟁’에 대한 비디오를 보게 된다. 그때의 소름 끼치는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과거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모두 거짓일 수 있음을 자문하게 되었다.
또한 사회과학 서클의 가입은 과거의 반공소년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맑스’(Marx)가 정신적 구루로 자리매김 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맑스는 단순한 배움의 교사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금 행동할 것을 지시하는 선동가였다. 책과는 담을 쌓았던 사람에게 가장 열정적으로 책 속에서, 현실 속에서 진리(眞理)를 찾아 헤매이게 하였다. 그리고 공부하고 학습했던 사상적 편린들이 ‘진리’임을 확신했다. 석양이 밀려오는 저녁이 되면, 혁명의 진혼곡을 위해 술잔을 나눴다.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고, 세상을 구원하고 싶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맑스주의’가 있었다. 명쾌했으며, 단호했다. 가야 할 곳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며, 사람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흘러갔다. 개인사에 대한 언급은 이 정도로 하자.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 맑스주의와 같은 대다수 좌파 이론들이 다른 변화의 사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맑스주의에 반하는 모든 사상들은 모두 이단(異端)이었으며, 혁명에 반하는 사상들은 모두 적(敵)이었다.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면, 맑스가 추구했던 근본적인 철학이 무조건 정당하고, 유일하다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사상이 유일(唯一)한 진리이며, 사상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극히 위험천만하다. 그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강한 변화의 열망이 그러한 강한 무오류성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맑스주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부 종교적 전통(유일신교)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니, 예외가 아니라 그 정도가 심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 종교의 심판으로, 신의 영광으로 자행되었던 침략과 폭력의 역사를 익히 알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神)의 이름으로 전쟁터에서, 단두대에서, 장잣더미 위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했던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진리(眞理)는 없다. 회자되는 모든 사상들은 그 나름의 이유와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사상과 종교적 신념으로 타자(他者)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며, 죽임의 행위이다.
다시 캠벨로 돌아가자.
그는 끊임없이 무수히 많은 신화적 상징과 비유를 통해 유일무이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생각과 관념의 조각들이 합일되는 커다란 모자이크를 꿈꾸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기보다는 자신의 천복(天福)을 찾아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영생은 천국의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 땅에, 지금 존재한다.”<신화와 함께 하는 삶> 3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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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다니는 통학길에는 단 한 명의 불량배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철인(?)정치의 최고 수반이 사는 동네를 지나 통학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성(城)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전두환 전 대통령. 그의 안위(?)를 위해 50미터마다 실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있는 사복경찰들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었다. 어린 소년에게 전두환 대통령은 삼청교육대와 같은 훌륭한(?) 교육기관을 통해 불량배 없는 살기 좋은 나라를 다스리는 불세출의 영웅(?)으로 뇌리에 남아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 반공소년이 나이가 들어 운좋게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나아질 게 없었다. 특별한 목적도, 꿈도 없었다. 특히나 데모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북괴의 정치야욕에 포섭된 철없는 젋은이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청년은 운명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 생각없이 담배를 꼬나 물고 학생회관 로비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이 청년은 우연히‘광주민중 항쟁’에 대한 비디오를 보게 된다. 그때의 소름 끼치는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과거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모두 거짓일 수 있음을 자문하게 되었다.
또한 사회과학 서클의 가입은 과거의 반공소년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맑스’(Marx)가 정신적 구루로 자리매김 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맑스는 단순한 배움의 교사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금 행동할 것을 지시하는 선동가였다. 책과는 담을 쌓았던 사람에게 가장 열정적으로 책 속에서, 현실 속에서 진리(眞理)를 찾아 헤매이게 하였다. 그리고 공부하고 학습했던 사상적 편린들이 ‘진리’임을 확신했다. 석양이 밀려오는 저녁이 되면, 혁명의 진혼곡을 위해 술잔을 나눴다.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고, 세상을 구원하고 싶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맑스주의’가 있었다. 명쾌했으며, 단호했다. 가야 할 곳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며, 사람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흘러갔다. 개인사에 대한 언급은 이 정도로 하자.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 맑스주의와 같은 대다수 좌파 이론들이 다른 변화의 사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맑스주의에 반하는 모든 사상들은 모두 이단(異端)이었으며, 혁명에 반하는 사상들은 모두 적(敵)이었다.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면, 맑스가 추구했던 근본적인 철학이 무조건 정당하고, 유일하다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자신만의 사상이 유일(唯一)한 진리이며, 사상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극히 위험천만하다. 그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강한 변화의 열망이 그러한 강한 무오류성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맑스주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부 종교적 전통(유일신교)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니, 예외가 아니라 그 정도가 심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 종교의 심판으로, 신의 영광으로 자행되었던 침략과 폭력의 역사를 익히 알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神)의 이름으로 전쟁터에서, 단두대에서, 장잣더미 위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했던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진리(眞理)는 없다. 회자되는 모든 사상들은 그 나름의 이유와 존재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사상과 종교적 신념으로 타자(他者)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며, 죽임의 행위이다.
다시 캠벨로 돌아가자.
그는 끊임없이 무수히 많은 신화적 상징과 비유를 통해 유일무이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생각과 관념의 조각들이 합일되는 커다란 모자이크를 꿈꾸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기보다는 자신의 천복(天福)을 찾아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영생은 천국의 어느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이 땅에, 지금 존재한다.”<신화와 함께 하는 삶> 3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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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써니 누님의 댓글이 이렇게 반가울수가~ 변경연의 분위기가 바뀌네요. 지난 토요일에도 느꼈지만, 영원한 4기의 친구, 동지 그리고 길잡이가 되주세요^^
정산형님, 지금 저는 맑스주의자는 아닙니다. 서투른 칼럼을 올린 것 같아 상당히 부끄럽습니다. 어제 새벽 컬럼에 올려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 많이 했었거든요. 치기어린 열정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재우형님~ 지난 토요일 형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었고, 배웠습니다.
그래요 언제 강남바닥에서 함~ 뵈시죠. 요즘 제가 벼랑을 걷고 있으니~
현정공주~ 세상의 모든 고민은 혼자 짊어진 것처럼 살았군요. 불쌍한 영혼(^^)이었네. 사상의 균형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생각의 무게중심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정산형님, 지금 저는 맑스주의자는 아닙니다. 서투른 칼럼을 올린 것 같아 상당히 부끄럽습니다. 어제 새벽 컬럼에 올려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 많이 했었거든요. 치기어린 열정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재우형님~ 지난 토요일 형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었고, 배웠습니다.
그래요 언제 강남바닥에서 함~ 뵈시죠. 요즘 제가 벼랑을 걷고 있으니~
현정공주~ 세상의 모든 고민은 혼자 짊어진 것처럼 살았군요. 불쌍한 영혼(^^)이었네. 사상의 균형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생각의 무게중심이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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