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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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작년 8월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세례 받기 전 6개월간 교리를 공부 했고, 교리반 숙제로 4복음서를 한번 썼지만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턱없이 부족한 병아리 신자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주일 미사에는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여력이 되면 성서백주간에 참여해서 성경공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갖고 있는 발전 가능성 있는 신자이기도 하다. 이런 내가 늦게 종교를 갖게 된 이유는 좀 길다.
우리 집에는 가족 종교가 없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불교와 토속신앙(무당)을 같이 믿으셨지만 부모님 모두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으셨고, 난 종교를 모르고 자라났다.
내가 종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군에 입대하고 나서다. 훈련소에서 법당을 다녔다. 그때 훈련소 법당에는 법정스님이 군종 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훈련병들 사이에 강론을 재미나게 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법당으로 몰려가곤 했다. 자대(自隊) 배치를 받고서는 부대 인근 화천 읍내에 있는 성당을 다녔다. 일요일 오전에 성당 가는 길은 민간인(그것도 여자들)을 볼 수 있는 보람찬(?) 시간이었고, 미사에서는 마음에 위안을 얻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가끔 성당에서 군인 아저씨들을 위한 특별 식사라도 제공 할 때면, 교인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들로 보였고, 제대하면 꼭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법당도 가고 성당도 다녔다. 어느 종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훈련병 때나 신병 때는 몸과 마음이 고달픈 시기이다. 법당이나 성당에 가는 몇 시간은 힘든 내무반 생활을 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듣는 말씀은 마음의 위안이었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편히 쉴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였다. 두 곳 모두 같았다.
그러나 나의 ‘성당 다니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신병 생활이 끝나 갈 무렵, 그러니까 일등병 고참이 되었을 즈음부터 성당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군 생활에 적응이 되었던 것이다. 내무반 생활은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성당에서 듣는 말씀도 신병 때만큼 위안을 주지 못했다. 군 생활에 적응되고 나니 일요일은 빨래와 운동, 그리고 시간 남으면 낮잠 자거나 TV 보기에 좋은 시간이었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성경말씀을 듣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아쉬울 때는 찾고, 필요 없어지면 멀리하게 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속성이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종교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 해 본적도 없었고, 그리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 종교라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무신론자였던 건 아니다. 나는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어떤 종교이건 갖고 사는 게 종교 없는 생활보다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요일에 늦잠 자고 싶은 게으름을 이길 만큼 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1980년대 후반, 평생을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현민 유진오 박사가 임종하기 몇 달 전에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는 기사가 일간지에 크게 실렸다.(과거사청산 문제로 그의 친일 행각이 논란이 되어 지금은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큰 스승 중 한명이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나도 나이가 들면(그래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고 느끼면) 종교를 갖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언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시간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는데 20년이 걸렸으니 이 세월이 짧은 건가 긴 건가 잘 모르겠다.
내가 세례를 받도록 기회를 제공한 장본인은 우리 딸 유진이다. 우리 집사람은 모태신앙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다. 결혼 후 성당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고, 내게도 ‘성당가자’는 비슷한 얘기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진이가 태어나고 3살이 될 무렵, 그러니까 걸음을 제법 걷기 시작 할 무렵부터 일요일이면 애가 햇볕도 쬐면서 뛰어 놀만한 공간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공원, 집 근처 놀이터 등 이곳저곳을 다녀 봤지만 3살 박이가 친구들과 안전하게 놀만한 장소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장모님(처가집 식구들 모두가)이 다니시는 성당을 한번 가게 됐다.
성당에 가니 성당 앞마당에서 3세에서 10세 정도의 아이들 열 댓 명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유진이는 그 애들과 함께 놀면서 아주 즐거워했다. 성당에 나오는 때문인지 아이들은 모두 순하고 착해 보였다. 유진이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곳은 유진이에게 훌륭한 놀이터고 공부방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를 정말 감동시킨 것은 본당 신부님이셨다.
우리 신부님은 좀 특별하시다. 어린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신다. 미사 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성당에 온 유아들을 모두 앞으로 나오게 하신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신들이 마치 무슨 의례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제단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간다. 신부님은 애들과 둥그렇게 손을 잡은 상태에서, 신자들과 함께 성가를 한곡 부른 후 주기도문을 외우신다. 그리고 나서는 일일이 아이들 머리에 양 손을 얹고 축성을 해 주신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은 의례를 다 마친 주인공들처럼 의기양양하게, 신자들이 모두 서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성당 중앙 복도를 달음박질쳐서 웃고 떠들며 퇴장한다. 나는 신부님과 아이들이 그렇게 손을 마주 잡고 성가를 부르고, 신부님이 유진이 머리에 손을 얹고 축성해 주시는 그 5분도 안 되는 시간이 감동적이었고, 마음 뿌듯했다. 신부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축성을 해주신들 그렇게 감동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마흔 넘어 갖게 된 외동딸의 머리에, 신을 모시는 손으로 축성을 해준다는 사실은 나를 깊이 감동시켰고, 나를 성당에 나오도록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 때부터 우리 가족은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고 나가게 됐다. 그때가 3년 전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내가 영세를 받기 까지는 또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유진이가 즐거워하고, 신부님이 축성해 주는 것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천주교를 인정한 것도 아니고 신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처가집 식구들 모두가 영세를 받았으니, 성당에서 매주 만나는 식구들 8명중 세례를 안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나 뿐이었다. 장모님은 독실한 신자이시다. 그런 때문에 가끔씩 “최서방도 이제 매주 성당을 나오니 세례를 받아서 성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절대 강하게 권하지는 않으셨다. 아마 믿음을 갖는 것이 누가 권한다고 되어 질 성질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때가 있다고 느끼신 때문이리라. 나는 고집이 좀 센 편이다. 내가 충분히 생각하고 스스로 마음이 이끌려야 결정을 하는 편이다. 남의 말을 듣고 대충 결정을 하는 타입은 아니다. 아마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집요하게 세례 받을 것을 설득했다면 내 성격상 아마 성당 나가기를 그만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님, 장모님을 포함한 내 주변에 계신 분들은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참고 기다려 주셨다.
2년 반 뒤에 내게 그 ‘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직장일로 힘든 상황이 만들어지고, 인생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이 찾아왔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마음이 허전해 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젠 누군가를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할 나이인데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괴로웠다. 이전의 자신 만만 했던 패기는 많이 사라져 버렸다. 젊었을 때 인상 깊이 느꼈던 현민 유진오 박사가 생각났다. 유진오 박사는 돌아가시기 직전 병석에 누우셔서 종교를 받아들이셨지만, 나 같은 범부는 이 정도의 시기가 적정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지금도 잘 모른다. 독실한 신자도 아니고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지도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벨의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내용을 보면 왠지 속이 편치 못했다.
나는 캠벨을 통해서 ‘신화’라는 내가 전혀 모르고 살았던 세계를 알게 되었고, 또한 그가 매우 훌륭한 학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적어도 기독교에 대한 그의 문제 제기에는 동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지 ‘네가 바로 그것이다’를 읽고 나서 번역자 박경미가 역자후기 말미에 쓴 이 문장이 내 마음에 퍽이나 와 닿았다.
캠벨의 도전과 문제 제기는 어쩌면 우리를 어려운 양자택일 앞에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밖의 초월인가, 아니면 내 안의 초월인가. 동일성과 일치의 종교인가, 아니면 신의 절대타자성과 복종의 종교인가. 그러나 정말로 종교 문제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초월은 내 안이건 내 밖이건 그때그때 내가 발견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때로 어디선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겸허히 침묵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안에 저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 있는 종교 경험은 “이거 아니면 저거” 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저곳도”에 가깝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 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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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가족 종교가 없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불교와 토속신앙(무당)을 같이 믿으셨지만 부모님 모두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으셨고, 난 종교를 모르고 자라났다.
내가 종교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군에 입대하고 나서다. 훈련소에서 법당을 다녔다. 그때 훈련소 법당에는 법정스님이 군종 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훈련병들 사이에 강론을 재미나게 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법당으로 몰려가곤 했다. 자대(自隊) 배치를 받고서는 부대 인근 화천 읍내에 있는 성당을 다녔다. 일요일 오전에 성당 가는 길은 민간인(그것도 여자들)을 볼 수 있는 보람찬(?) 시간이었고, 미사에서는 마음에 위안을 얻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가끔 성당에서 군인 아저씨들을 위한 특별 식사라도 제공 할 때면, 교인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들로 보였고, 제대하면 꼭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법당도 가고 성당도 다녔다. 어느 종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훈련병 때나 신병 때는 몸과 마음이 고달픈 시기이다. 법당이나 성당에 가는 몇 시간은 힘든 내무반 생활을 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듣는 말씀은 마음의 위안이었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편히 쉴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였다. 두 곳 모두 같았다.
그러나 나의 ‘성당 다니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신병 생활이 끝나 갈 무렵, 그러니까 일등병 고참이 되었을 즈음부터 성당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군 생활에 적응이 되었던 것이다. 내무반 생활은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성당에서 듣는 말씀도 신병 때만큼 위안을 주지 못했다. 군 생활에 적응되고 나니 일요일은 빨래와 운동, 그리고 시간 남으면 낮잠 자거나 TV 보기에 좋은 시간이었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성경말씀을 듣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아쉬울 때는 찾고, 필요 없어지면 멀리하게 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속성이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종교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 해 본적도 없었고, 그리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 종교라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무신론자였던 건 아니다. 나는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어떤 종교이건 갖고 사는 게 종교 없는 생활보다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요일에 늦잠 자고 싶은 게으름을 이길 만큼 종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1980년대 후반, 평생을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현민 유진오 박사가 임종하기 몇 달 전에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는 기사가 일간지에 크게 실렸다.(과거사청산 문제로 그의 친일 행각이 논란이 되어 지금은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큰 스승 중 한명이었다.) 그 기사를 보면서 나도 나이가 들면(그래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고 느끼면) 종교를 갖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언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시간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는데 20년이 걸렸으니 이 세월이 짧은 건가 긴 건가 잘 모르겠다.
내가 세례를 받도록 기회를 제공한 장본인은 우리 딸 유진이다. 우리 집사람은 모태신앙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다. 결혼 후 성당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고, 내게도 ‘성당가자’는 비슷한 얘기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진이가 태어나고 3살이 될 무렵, 그러니까 걸음을 제법 걷기 시작 할 무렵부터 일요일이면 애가 햇볕도 쬐면서 뛰어 놀만한 공간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공원, 집 근처 놀이터 등 이곳저곳을 다녀 봤지만 3살 박이가 친구들과 안전하게 놀만한 장소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장모님(처가집 식구들 모두가)이 다니시는 성당을 한번 가게 됐다.
성당에 가니 성당 앞마당에서 3세에서 10세 정도의 아이들 열 댓 명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유진이는 그 애들과 함께 놀면서 아주 즐거워했다. 성당에 나오는 때문인지 아이들은 모두 순하고 착해 보였다. 유진이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곳은 유진이에게 훌륭한 놀이터고 공부방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를 정말 감동시킨 것은 본당 신부님이셨다.
우리 신부님은 좀 특별하시다. 어린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신다. 미사 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성당에 온 유아들을 모두 앞으로 나오게 하신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신들이 마치 무슨 의례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제단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간다. 신부님은 애들과 둥그렇게 손을 잡은 상태에서, 신자들과 함께 성가를 한곡 부른 후 주기도문을 외우신다. 그리고 나서는 일일이 아이들 머리에 양 손을 얹고 축성을 해 주신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은 의례를 다 마친 주인공들처럼 의기양양하게, 신자들이 모두 서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성당 중앙 복도를 달음박질쳐서 웃고 떠들며 퇴장한다. 나는 신부님과 아이들이 그렇게 손을 마주 잡고 성가를 부르고, 신부님이 유진이 머리에 손을 얹고 축성해 주시는 그 5분도 안 되는 시간이 감동적이었고, 마음 뿌듯했다. 신부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축성을 해주신들 그렇게 감동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마흔 넘어 갖게 된 외동딸의 머리에, 신을 모시는 손으로 축성을 해준다는 사실은 나를 깊이 감동시켰고, 나를 성당에 나오도록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 때부터 우리 가족은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고 나가게 됐다. 그때가 3년 전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내가 영세를 받기 까지는 또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유진이가 즐거워하고, 신부님이 축성해 주는 것은 좋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천주교를 인정한 것도 아니고 신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처가집 식구들 모두가 영세를 받았으니, 성당에서 매주 만나는 식구들 8명중 세례를 안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나 뿐이었다. 장모님은 독실한 신자이시다. 그런 때문에 가끔씩 “최서방도 이제 매주 성당을 나오니 세례를 받아서 성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절대 강하게 권하지는 않으셨다. 아마 믿음을 갖는 것이 누가 권한다고 되어 질 성질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때가 있다고 느끼신 때문이리라. 나는 고집이 좀 센 편이다. 내가 충분히 생각하고 스스로 마음이 이끌려야 결정을 하는 편이다. 남의 말을 듣고 대충 결정을 하는 타입은 아니다. 아마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집요하게 세례 받을 것을 설득했다면 내 성격상 아마 성당 나가기를 그만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님, 장모님을 포함한 내 주변에 계신 분들은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참고 기다려 주셨다.
2년 반 뒤에 내게 그 ‘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직장일로 힘든 상황이 만들어지고, 인생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이 찾아왔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마음이 허전해 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젠 누군가를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할 나이인데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괴로웠다. 이전의 자신 만만 했던 패기는 많이 사라져 버렸다. 젊었을 때 인상 깊이 느꼈던 현민 유진오 박사가 생각났다. 유진오 박사는 돌아가시기 직전 병석에 누우셔서 종교를 받아들이셨지만, 나 같은 범부는 이 정도의 시기가 적정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 지금도 잘 모른다. 독실한 신자도 아니고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지도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캠벨의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내용을 보면 왠지 속이 편치 못했다.
나는 캠벨을 통해서 ‘신화’라는 내가 전혀 모르고 살았던 세계를 알게 되었고, 또한 그가 매우 훌륭한 학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적어도 기독교에 대한 그의 문제 제기에는 동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지 ‘네가 바로 그것이다’를 읽고 나서 번역자 박경미가 역자후기 말미에 쓴 이 문장이 내 마음에 퍽이나 와 닿았다.
캠벨의 도전과 문제 제기는 어쩌면 우리를 어려운 양자택일 앞에 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밖의 초월인가, 아니면 내 안의 초월인가. 동일성과 일치의 종교인가, 아니면 신의 절대타자성과 복종의 종교인가. 그러나 정말로 종교 문제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초월은 내 안이건 내 밖이건 그때그때 내가 발견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던가. 때로 어디선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겸허히 침묵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가 내 안에 저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 있는 종교 경험은 “이거 아니면 저거” 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저곳도”에 가깝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종교와 그 상징들이란 인간 경험의 심원하고도 불가해한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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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써니
마음이 순하고 편해지네요.
단숨에 술술 따라 읽혀지고요.
강요나 자기 주장보다는 강을 흐르듯 시선을 끌고 가는 군요. 자연스럽게.
형, 나는 천주교를 좋아해요. 단순하게 그저 믿으면 되서요. 불교는 교리가 너무 어려워서 아직 근접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요. 미사 중에 나는 항상 도마 사제와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도 매달린 예수는 싫어요. 신교들이 잘 쓰는 질투의 신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무마해 버리는 이기심도 싫어요. 아버지의 딸이지만 아버지를 받아드릴 수 없는 부분을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내 몫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신앙이 깊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교만하다, 후회할 것이다 등등으로 하느님보다 무섭고 죽음보다 두려운 협박을 해 오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그게 무서워 복종할 수도 없는 저의 내면을 알아요. 참 힘들겠지요? ㅎㅎㅎ
신앙인으로서 구원받는 일보다 참으로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죄 짓는 것을 더 두려워 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곤 해요. 누구를 설득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가장 큰 벌을 받을 사람들은 바로 사제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신도들이구요.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몸소 행항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공염불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도장 찍듯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 편협함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위대한 과학자들은 종교인이 아니라서 신의 비밀을 캐냈을까요? 우리는 우리에게는 저마다 우리의 몫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먼저 의도를 살피고 그것이 나쁜 것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해를 준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앞서건 존중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설령 종교라는 것을 초월해서라도. 그 초월이 집처럼 방구석 안도 아닐 것이구요.
사실 종교에 대해 말할 처지는 아니에요. 그저 편히 살아보려는 얄팍한 꾀나 부리는 사람에 더 가깝죠. 그러나 그렇더라도 참견하고 반박하고 싶기도 하지요. 우리 삶 가운데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니까.
형아의 글에서 종교인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진한 애착과 책임감이 더 느껴져요. 건강하게 오래 가족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가장의 소박한 바람요. 영성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편안한 자리에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마음도 결국 인간의 마음 가짐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는 없다고 하는 생각 절로 들고요. 하느님 마음도 일상의 성실한 아버지들의 마음일 거예요. 당신에게서 하느님의 실체를 보게 될 바로 당신의 그 딸을 위하여 오늘도 몸 마음 건강하길 빌어요.
단숨에 술술 따라 읽혀지고요.
강요나 자기 주장보다는 강을 흐르듯 시선을 끌고 가는 군요. 자연스럽게.
형, 나는 천주교를 좋아해요. 단순하게 그저 믿으면 되서요. 불교는 교리가 너무 어려워서 아직 근접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요. 미사 중에 나는 항상 도마 사제와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도 매달린 예수는 싫어요. 신교들이 잘 쓰는 질투의 신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무마해 버리는 이기심도 싫어요. 아버지의 딸이지만 아버지를 받아드릴 수 없는 부분을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내 몫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신앙이 깊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교만하다, 후회할 것이다 등등으로 하느님보다 무섭고 죽음보다 두려운 협박을 해 오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그게 무서워 복종할 수도 없는 저의 내면을 알아요. 참 힘들겠지요? ㅎㅎㅎ
신앙인으로서 구원받는 일보다 참으로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죄 짓는 것을 더 두려워 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곤 해요. 누구를 설득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가장 큰 벌을 받을 사람들은 바로 사제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신도들이구요.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몸소 행항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공염불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도장 찍듯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 편협함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위대한 과학자들은 종교인이 아니라서 신의 비밀을 캐냈을까요? 우리는 우리에게는 저마다 우리의 몫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먼저 의도를 살피고 그것이 나쁜 것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해를 준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앞서건 존중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설령 종교라는 것을 초월해서라도. 그 초월이 집처럼 방구석 안도 아닐 것이구요.
사실 종교에 대해 말할 처지는 아니에요. 그저 편히 살아보려는 얄팍한 꾀나 부리는 사람에 더 가깝죠. 그러나 그렇더라도 참견하고 반박하고 싶기도 하지요. 우리 삶 가운데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니까.
형아의 글에서 종교인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진한 애착과 책임감이 더 느껴져요. 건강하게 오래 가족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가장의 소박한 바람요. 영성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편안한 자리에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마음도 결국 인간의 마음 가짐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는 없다고 하는 생각 절로 들고요. 하느님 마음도 일상의 성실한 아버지들의 마음일 거예요. 당신에게서 하느님의 실체를 보게 될 바로 당신의 그 딸을 위하여 오늘도 몸 마음 건강하길 빌어요.

정산
홍스, 2개월 지났으면 삼위일체를 배웠는지 모르겠네 만, 난 삼위일체 교리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더구먼. 지금도 비슷한 처지이고...
헌데 요즈음 믿음에 관해 들었던 가장 마음으로 파고 든 글귀가 있는데, 자네도 봤을 것이라 짐작 하네만 좋은 생각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다시 한번 여기 인용하네
"종교는 믿는 것이고 과학은 묻는 것이다. 믿어라 그러면 종교를 갖을 것이다. 그러나 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으면 묻지 않기 때문이다."
"물어라 그러면 객관적 진리에 도달 할 것이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물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어쩔 것인가?" <구본형 사부>
인창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을 겁니다. 때가 아니면 좀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__^
현정님, 나는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해요. 여하튼 현정님과 같이 느끼고 이야기 해 볼 동질감이 생겨서 좋네요.^^
써니선배, 선배의 글에서는 심산유곡에서 1년동안 갈고 닦은 공력이 느껴져요. 오랫만에 선배 덧글 보니 기분 좋내. 고마워요~~
재우, 나는 홍스한테 배운거야. 홍스가 완존~히 벗어버리겠다고 하지 않던? 나도 슬슬 벗기 시작하는건데, 우리 같이 벗어볼까? 그래도 너무 야하면 않되고...ㅎㅎㅎ
거암, 제목을 신앙 고백이라 했지만, 사실 내용은 그냥 평이한 내용이야. '신앙을 갖게된 경위'나 '신앙 갖기'로 할까 하다가, 신앙고백으로 했는데... 역시 제목은 잘 붙이고 볼 일이야, 사람들이 느끼는게 좀 다른모양야...ㅎㅎㅎ
헌데 요즈음 믿음에 관해 들었던 가장 마음으로 파고 든 글귀가 있는데, 자네도 봤을 것이라 짐작 하네만 좋은 생각의 씨앗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다시 한번 여기 인용하네
"종교는 믿는 것이고 과학은 묻는 것이다. 믿어라 그러면 종교를 갖을 것이다. 그러나 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으면 묻지 않기 때문이다."
"물어라 그러면 객관적 진리에 도달 할 것이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물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어쩔 것인가?" <구본형 사부>
인창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을 겁니다. 때가 아니면 좀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__^
현정님, 나는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산다고 생각해요. 여하튼 현정님과 같이 느끼고 이야기 해 볼 동질감이 생겨서 좋네요.^^
써니선배, 선배의 글에서는 심산유곡에서 1년동안 갈고 닦은 공력이 느껴져요. 오랫만에 선배 덧글 보니 기분 좋내. 고마워요~~
재우, 나는 홍스한테 배운거야. 홍스가 완존~히 벗어버리겠다고 하지 않던? 나도 슬슬 벗기 시작하는건데, 우리 같이 벗어볼까? 그래도 너무 야하면 않되고...ㅎㅎㅎ
거암, 제목을 신앙 고백이라 했지만, 사실 내용은 그냥 평이한 내용이야. '신앙을 갖게된 경위'나 '신앙 갖기'로 할까 하다가, 신앙고백으로 했는데... 역시 제목은 잘 붙이고 볼 일이야, 사람들이 느끼는게 좀 다른모양야...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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