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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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처음이시죠? - 동양철학
대학에서 동서양 철학을 모두 배웠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동양철학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자와 한문을 매개로 삼은 동양철학의 사고방식이 제게는 너무 낯설었습니다. 한자로 쓰인 개념어들의 숲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마흔을 넘기며 동양철학의 세계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공자와 노자, 장자와 묵자의 세계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한자와 한문이 익숙해졌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중국 고대철학의 문구들을 한글 해설로 읽다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문구를 만납니다. 그런 문구는 한글 해설과 한자 원문을 비교하며 공들여 다시 읽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간이 정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수 천 년 시간을 뛰어 넘어 어느 현자가 남겼던 메시지가 저의 온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어떤 날은 도덕경의 한 구절이, 어떤 날은 논어의 한 구절이 몇날 며칠이고 제 마음을 온통 헤집고 다녔습니다. 고대 중국철학이 전하는 짧은 글귀가 깊은 울림이 되어 뱃속까지 저렸습니다. 마흔을 넘기며 다시 만난 동양철학은, 글자 그대로, ‘시(詩)’ 였습니다.
마흔을 넘기며 최현, 오강남, 신동준, 김경윤, 기세춘, 신영복, 최진석 선생님의 글을 통해 동양철학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습니다. 특히 작년에 비로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책으로 만났습니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좁쌀 한 알> 같은 책들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장일순 선생님이 동양철학의 언어로 정성스럽게 풀어내는 생명세계는 참으로 아늑하고 푸근합니다. (읽으실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를 삼가하겠습니다).
동양 철학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책 몇 권 추천해보겠습니다.
1. 제자백가
춘추전국시대라는 전쟁통에서 피어난 중국 고대 사상가들을 제자백가라고 합니다. 제자백가의 큰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컨텐츠 3가지 소개합니다.
1) EBS 다큐프라임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
가장 우선순위로 책보다 다큐멘터리를 추천합니다. <절망을 이기는 철학 제자백가>는 2017년 EBS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방영됐는데, 최근 7월 22일부터 24일까지 공자, 장자, 한비자 3편을 차례로 재방영했습니다. 글보다 영상을 선호하는 시대에 이렇게 좋은 컨텐츠가 나왔다는 게 다행입니다. EBS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 할 수 있습니다.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생존의 조건>(이주희, MID). 부제가 ‘절망을 이기는 철학’입니다.
2) <강의> (신영복, 돌베게)
신영복 선생님은 진정 ‘우리 시대의 스승’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분입니다. 대부분 읽으셨을 것이라 추측합니다만, 만일 읽지 못하셨다면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꼭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를 모은 <담론>(신영복, 돌배개)을 읽기 위해서라도 <강의>는 필수입니다.
3) <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강신주, 사계절)
위에 언급한 개론서를 보았다면 이제 조금 더 밀도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신주의 <철학의 시대>는 주역, 춘추, 시경부터 제자백가 개론까지 중국고대 사상체계의 밑그림을 제법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강신주 작가의 글솜씨 만큼은 정말 인정합니다.
2. 공자
유교는 중국과 한국 등 한자문화권을 떠받치고 있는 큰 기둥입니다. 유교의 창시자가 공자입니다. 요컨대 공자를 이해하는 게 동양철학 여행을 향한 첫 걸음입니다.
1) <공자의 생애> (최현, 범우사)
마흔을 넘기며 파업을 하던 중에 중고책방에서 만난 책입니다. 이 한권의 책에서부터 저의 동양철학 다시읽기가 시작됐습니다. 파업을 하던 중에 읽어서 그런지 공자의 인생 시련이 참으로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문고판이기에 작고 얇습니다. 제가 읽고 너무 좋아서 아내 김정은 작가에게 강력 추천했습니다. 동양철학이라면 겁부터 내던 아내도 용기 내어 읽었고, 이제는 평소 강의 중에 이 책을 통해 만난 공자를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방금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4,400원에 여전히 판매되고 있습니다. 편의점 도시락 가격입니다만, 내용은 수백 수천만 원어치라고 생각합니다.
2) <공자 인생강의> (바오펑산, 시공사)
앞서 소개한 범우사 문고판보다 좀 더 농밀하게 공자를 만나고 싶은 분에게 추천합니다.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등 학창시절 국어시험에 나오던 용어가 기억나시는지요? 공자가 자신의 인생 흐름을 설명했을 때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이 책은 이런 용어를 큰 흐름 삼아 공자의 인생 역경과 변화를 밀도 있게 그려냅니다. 공자도 결국, 일어나보기도 하고 쓰러져 보기도 했던, 우리와 똑같은 한명의 ‘사람’이었습니다.
3. 노자 도덕경
1) <도덕경> (오강남, 현암사)
도덕경은 지금도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어 십인십색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만, 이십년이 넘도록 가장 널리 읽히는 해석본은 단연코 오강남 교수님의 도덕경입니다. 오강남 교수님은 비교종교학을 연구하시는 분답게 동서양의 용어를 총체적으로 사용하면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비전공자들도 이해하기 좋도록 현대적 감각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최진석, 위즈덤하우스)
워낙 핫한 분이어서 대부분 아실 것 같습니다. 최진석 교수님의 EBS 노자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겁니다. 서강대를 박차고 나와 건명원이라는 학당을 열고 초대원장을 지내시더니, 요즘에는 고향 전남 함평에 ‘새 말 새 몸짓’ 이라는 이름의 학당을 열고 ‘장자’를 강의하고 계십니다. 저는 요즘 유튜브로 최진석 교수님의 장자 강의를 짬짬이 듣는 재미로 삽니다. 최진석 교수님의 장자 강의도 어서 책으로 엮어져 출간되기를 학수고대 합니다.
4. 장자
1) <장자> (오강남, 현암사)
노자에 이어 장자도 오강남 교수님 해설서를 제1번 순위로 추천합니다. 동서양 용어를 아우르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설하는 내공이 돋보입니다. 장자의 ‘내편’을 해석하고 ‘외편’과 ‘잡편’은 몇 개 텍스트만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장자, 아파트 경비원이 되다> (김경윤, 사계절)
김경윤 선생님의 청소년용 철학소설을 입문자용 두 번째 추천도서로 올립니다. 중학생 제 딸이 재미나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장자를 설명해 주셔서 이 글을 통해 김경윤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김경윤 선생님은 고양 일산에서 자유청소년도서관 관장이자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고양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이 매력적입니다. 특히 십대 청소년을 둔 부모님이라면 김경윤 선생님의 여러 철학소설들을 눈여겨 찾아봐 주십시오.
5. 묵자
<묵자> (기세춘, 바이북스)
묵자는 지배층이 벌이던 전쟁과 폭정에 처절하게 맞섰던 저항의 철학이었기에 지난 2천년 동안 금서(禁書)였습니다. 촛불정신을 가슴에 간직하고 계신 분이라면 도서관에서 이 책의 서문이라도 꼭 찾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참고로 옥중에 계시던 문익환 목사님이 기세춘 선생님의 묵자 해설을 읽고는 편지를 통해 기세춘 선생님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이 논쟁이 훗날 책으로 엮어져 <예수와 묵자>(바이북스)로 남아 있습니다. 가히 조선시대 기대승과 황희의 사단칠정 논쟁에 비견될 만큼 한국 지성사에 길이 남을 사건입니다.
6. 주역
주역은 3천 년 전에 쓰인 점술 책이지만 점술 차원을 넘어 인류의 지성사와 문명사에 지금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저는 점술에 관심이 없어서 주역을 깊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만, 동양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주역을 건너뛸 수가 없었습니다. 주역을 처음 접해보려는 분들에게 다음의 책을 추천합니다.
1)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이상수 작가님은 주역과 제자백가를 전공한 학자이면서 한겨레에서 18년간 기자생활을 한 내공을 담아 초심자 눈높이에 맞춰 쉽게 썼습니다. 특히 주역을 만든 이들의 세계관을 ‘정말 점을 치고 싶다고 누구에게 의뢰하지 말고 스스로 왕처럼 점을 치지만, 덕과 지혜를 기르는 삶을 살면 점 칠 필요가 없다’고 정리한 결론은 감탄이 절로 납니다.
2) <주역 강의> (서대원, 을유문화사)
서대원 작가님의 책은 한자 한 개 읽을 줄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룻밤이면 독파할 수 있도록 쉽게 풀이한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괘를 제외하고 오로지 주역 본문을 해석한 풀이는 독창적이면서도 명쾌합니다. 서대원 작가님은 구본형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분입니다. 지금도 영남권에서 이어지는 꿈벗모임에 꾸준히 참석하고 계십니다.
7. 한자
저는 한글세대이기에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한자를 익히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동양철학을 구성하는 한자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소개합니다.
1) 김용의 무협소설
동양의 김용은 서양의 톨킨에 비견됩니다. 중국 한자 문화권의 사고방식을 익히는데 김용의 무협소설은 분명 큰 도움이 됩니다. 김용 작가님이 워낙 방대한 작품을 남겼기에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사조 삼부곡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무협소설 곳곳에서 중국 철학의 흔적을 찾아내는 게 쏠쏠한 재미입니다.
2) 한자의 역설 (김근, 삼인)
도대체 한자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속 시원하게 설명한 책입니다. 갑골문에서 시작한 초창 한자부터 점차 발전하여 형이상학적 개념을 창출해 내는 한자의 성장을 면밀히 설명합니다. 한자를 공부한다는 뜻은 한자의 체계대로 관념을 익히고 창출한다는 뜻 입니다. 이 책을 통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공간을 참으로 오랫동안 관장하고 있는 한자의 엄청난 능력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유형선 드림 (morningstar.y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