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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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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31일 18시 20분 등록


하루애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 시인 김수영은 어릴 적, 장사하시는 아버지 곁에서 보고 들었던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 말을 꼽은 적이 있다. 김수영이 꼽은 우리 말에는 컴퓨터 화면에 빨간 밑줄이 그어지는 말도 있다. 시인 김수영과 우리 사이, 그가 살던 시대와 내가 사는 시간 사이를 흐르는 언어 조류가 빠르게 지나가서 이제는 단박에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이 많다. 이 거센 조류에 우리의 언어, 나의 단어를 꼽아 죽방멸치처럼 가두고 싶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일었다. 해외에 살며 한국어 사용이 뚜렷하게 줄어들었다. 가끔 사물과 단어가 연결되지 않을 때도 있고, 일상에서 즐겨 쓰던 사소한 표현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된다는 용불용설用不用說의 진화론적 관점이 혹시라도 내 언어 지각에도 적용된다면 앞으로 잊어버릴 아름다운 단어들이 얼마나 많을 텐가. 많이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알고 있는 단어들이 기억에서 사라지면 낭패가 된다. 시간이 흐르기 전에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단어들을 갈무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했던 것이다.


하루, 오늘 하루. 나는 이 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정에서 자정까지. 사전을 뒤적여 보니 오늘은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날이라 한다. 하루는 오늘과 비슷한 말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오늘이므로 오늘은 그대와 나,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시공간적 최대공약수다. 긴 하루가 있고 짧은 하루가 있는 만큼 하루는 마음의 시간이다. 읽어 내리느라 식겁했던 토마스 만 Thomas Mann마의 산’ Der zauberberg 에서 발견한 하루라는 마음의 시간은 내 마음을 후벼 판다.


사건이 풍부한 세월은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빈약하고 내용이 없으며 가벼운 세월보다 훨씬 더 천천히 지나간다. 우리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현상은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시간의 병적인 단축 현상이다. 그리하여 나날이 하루같이 똑 같은 경우 오랜 기간이 깜짝 놀랄 정도로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것이다. 매일 똑 같은 나날이 계속된다면 그 모든 나날도 하루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이 완전히 똑같다고 한다면 아무리 긴 일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것으로 체험되고 부지불식간에 흘러가 버린 것처럼 된다. 익숙해 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거나 또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체험되고 나중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한다


똑같지 않은 하루가 내 삶에 많아진 건 라오스에 살며 건진 가장 큰 소득이다. 하루라는 것이, 그리니치 천문대발 시간이 아니라 지구 자전축에 착 달라붙어 그저 둥글게 돌아가는 지구 회전목마 같은 시간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 건 라오스가 내게 준 선물이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는 걸 알게 한 이 느린 시간에 늘 감사한다.


주말 아침 자다 지쳐 일어나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 앞 까페로 가 에스프레소를 시켜 놓고 그 진함을 마주하고 한참을 바라보다 마침내 고것이 목구멍을 지나갈 때를 좋아한다. 가끔 잠자리를 챙겨 차를 몰아 낯선 동네를 지나고 드디어 도착한 숲에서 나무 사이로 뛰어 놀다 밤이 되어 침낭 속에 들어가 밤하늘과 내가 직선이 될 때 나는 환장한다. 아들과 침대에 누워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내 유년을 끄집어 내는 밤을 좋아한다. 딸과 침대에 누워 먼 나라 그리스에서 전해져 온다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왜? ? 물어오는 딸의 질문에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하면서 우린 너무 어려운 말을 쓰고 있어하며 속으로 자책할 때가 좋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을 보러 가는 버스 안에서 어딘지도 모를 경부고속도로 풍경을 응시하는 일이 나는 좋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 놓고 한가하게 아내와 진한 커피를 나눠 마시는 시간이 좋다. 드디어 다다른 암벽의 꼭대기에서 그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드넓은 하늘에 흩날리는 구름 그 장면에 나는 미친다. 아무도 자기를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흥에 겨워 온갖 오버를 하며 걸 그룹 춤을 추는 딸의 뒷모습을 아빠 미소로 보는 걸 좋아하고, 아들이 내 옷을 입고는 드디어 나는 어른이다 하는 행동을 보일 때 그 신화 같은 아이 마음을 읽어 내는 일이 좋다. 자이언츠가 8회말 역전할 때가 좋고 산에서 사지를 함께 다녀 온 산 친구들과 코펠에 술을 따라 마시며 사는 얘기, 실 없는 농담을 나누는 게 즐겁다. 책에 빠져들 때가 좋고 글을 쓸 때 좋은 표현이 나오면 뿌듯하다. 비 온 뒤 라오스집 마당을 맨발로 거닐며 발가락 사이로 진흙이 스며들 때가 좋다. 토요일, 낮잠을 자고 일어나 여전히 토요일임을 확인할 때 좋다.


다시,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대체로 중요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루가 모여 삶이 되니 좋은 하루를 보내지 못하면 삶은 하루만큼 후퇴한다. 세상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을 하느라 내가 좋아하는하루를 놓치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 하루를 잘 살기 위해 우리는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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