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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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나라
외국에 살며 우리말을 쓰는 일이 부쩍 줄었다. 때문에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저절로 입을 닫게 되는 것이다. 입을 닫으면 눈이 열린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마치 윗니 없는 짐승이 뿔이 생기듯, 두 다리뿐인 새에게 날개를 선사하듯, 말을 하지 않으니 볼 수 없었던 게 보였던 것이다. 아이와 여성에게 잔인했던 생활. 생활, 무던히 평범하기도, 실은 무시무시 하기도, 징그럽기도 한 그 말. 한국에 있을 때의 어느 날이었다. 또래 친구와 무슨 얘기를 하고 왔는지 의뭉스레 큰 아이가 물었다. ‘우리 집은 몇 평이야?’
한국에서 아내는 회사 일을 하면서도 집안 일을 도맡아 했다. 아이 둘을 키우고, 못다한 대학원 학업까지 열심으로 해냈다.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왔는지 지금도 혀를 내 두르지만, 번 아웃 직전이었을 테다. 몸에 사단 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긴다. 혼자 밤늦게 젖은 빨래를 널 때, 집어 던졌다 다시 잡아 터는 모습을 우연히 봤다. 퇴근해서 내일 먹을 밥을 짓고 아침이 되면 어김 없이 아내는 출근했다. 아이들은 늘 즐겁게 놀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벅찼을지도 모를 공부에 대한 압박을 알게 모르게 받았으리라 짐작한다. 번호로 불리며 학교를 다니던 큰 아이, 작은 아이는 유치원 다녀와 태권도 학원가기 전 잠깐 집에 들른 시간,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방 저 방 다니며 ‘엄마! 엄마!’를 불렀다. 늦은 저녁, 퇴근하고 들어오면 아빠가 와도 제 할일 하는 큰 아이를 나는 그냥 지나쳤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나조차 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사회적 습속과 동조해 마지 않았던 일들이 그들에겐 한 없는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상황들을 동백꽃 떨어지듯 툭하고 떨어내니 그제야 보인다. 내 잘못.
속도와 비교는 한 가지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속도를 늦출 수 없다. 속도를 높이려면 비교해야 한다. 파멸의 전차는 비교를 연료로 속도를 높여간다. 우리 나라가 외국의 부러움을 사는 것 중 하나는 빠른 속도와 편리함이다. 그러나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고단함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위험에 늘 가까이 있었고 불법과 합법 사이를 줄타기해야 하는 생활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 편안함은 누군가의 잠 못 드는 노동이었고 나 역시 편리함과 노동의 거대한 톱니 속 하나였음이 보이는 것이다. 속도와 편리 뒤에 숨겨진 잔인함이다.
속도, 회사를 다니며 교육을 들을 때면 산업교육 강사들은 입만 열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라 했다. 정말로 세상이 날마다 변하는가. 부서를 옮기지 않는 이상 내가 오늘 회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업무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6개월 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능력을 요구하는가? 독서를 빨리 해야 할 만큼 지식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가?’
비교, 비교는 자기 비하와 우울, 자살로 이어지거나 남을 살해할 수도 있는 강력한 암세포다. 그것은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거기다 대고 내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깨달아라 말하는 건 무책임하다. 비교는 동기부여의 긍정적 발판이 아니라 그것으로 치장된 ‘손해와 이익의 냉철한 현금계산’으로 이어진다. 비교가 무서운 건,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을 스스로 계산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단지 사는 모습이 현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못 산다 말하고, 느려 터진 라오스의 모습을 본 뒤 위안 삼아 고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잔인한 일상에 자신들을 내던진다. 어제 여행했던 그곳 라오스 사람들보다는 적어도 잘 살고 있다 위무하면서. 잘 산다는 건 무엇인가. 아, 사는 건 이리도 어렵다. 그러니 글도 중언부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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