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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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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8일 08시 22분 등록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이번 주 편지는 ‘시숙모님들과의 에피소드’를 준비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같은 일상을 맞이했습니다. 임부복 상자 사건으로 12대 종손을 기다리는 시부모님의 마음을 알고 나니 아무리 마음을 다 잡아도 위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은아, 넌 용기 있는 아이잖니?”

지난 가족 나들이에서 시어머니께서 해주셨던 그 빛나는 문장을 여러 번 읊어 봐도 소용없었습니다. 용기는 개뿔! 의류수거함에 임부복을 넣던 그 순간에만 용기가 깃털만큼 있었나 싶었고 다시는 용기를 내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제사와 명절, 생신을 합치면 연 11번의 대가족 모임이 있습니다. 온가족이 모이면, 다섯 분의 10대 아들과 다섯 분의 10대 며느리와 그분들의 자손들로 모두 합해 스무 명이 넘습니다. 제가 직장을 그만두자 시어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속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시부모님을 비롯하여 시숙부님과 시숙모님 포함 열 분의 시어른들은 제 배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목소리를 내는 분들은 시숙모님들이었습니다. 살이 좀 쪘다싶으면 “애 가진 거 아니냐?”라 하셨고, 살이 좀 빠졌다싶으면 “입덧하는 거 아니냐?”라 하셨습니다. 덕담은 늘 “아들 낳아 효도해라” 였습니다. 

“난 결혼 안 할 거야. 아니, 못 하는 거지. 여자 인생 망칠 수도 있잖아.”

연애할 때 남편이 이야기했습니다. 평생을 종손으로 살아온 사람,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의 얼굴에 중압감을 느끼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의 등을 두드리며 저는 다음의 논리를 펼쳤습니다.

1.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2. 태어나보니 11대 종손이었다.
3. 그러므로 11대 종손이란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인간이란 주어진 조건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제 삶도 그렇게 꾸려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가족이 모이는 날 한 달 전부터 몸이 거부반응을 해왔습니다. 두통과 복통, 우울감을 동반한 몸살 등 월경전증후군 같은 증상이 찾아왔습니다. 11대 종손인 남편도 정도는 덜 했지만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괜히 나 만나서 고생이다. 우리 왜 결혼했을까?”라고 큰 눈을 끔뻑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남편에게 “괜찮아! 우리가 전부 평등하게 만들면 되잖아!”라며 우리의 첫 다짐을 다시 떠올렸지만, 제삿날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쪼그라들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자취생활을 오래했기에 스스로 의식주 해결이 가능했지만, 시댁 부엌에만 들어가면 손발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집에서는 부침개를 잘 부쳤지만 시댁에서는 계란 지단을 부쳐도 팬에 들려 붙고 찢어져 모양이 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시금치를 다듬거나 딸기를 씻는 것처럼 쉬운 일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잘만 닦아 쓰면 평생 새 것처럼 쓸 수 있다는 스테인리스 냄비는 제 손만 닿으면 얼룩덜룩해지기 일쑤였습니다. 스스로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것 같았고, 쥐구멍이 있다면 그리로 들어가 숨고 싶었습니다. 어쩌다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이 되었나,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시댁의 부엌에서 저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건 제게 힘이 되어주는 친구들과 선생님 덕분이고, 직장에서 일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도 동고동락을 함께한 직장 동료들 덕분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시어머니 포함 시숙모님 다섯 분과 저는 5대 1로 수적으로 월등히 열세인데다, 다섯 분 모두 저와는 이삼십년 나이 차가 나는 어른들이었기에, 숫자의 힘만으로 압도당하곤 했습니다. 시댁의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그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 한 채로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조금만 더 기운을 내보자, 엄마가 당당해야 내 딸들도 당당할 텐데, 하며 다음의 문장을 되뇌었습니다.

1. 남아선호사상에 동의할 수 없다.
2.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은 죄가 아니다.
3. 그러므로 나는 떳떳해야 한다.

제사를 마치고 시댁 어른들이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실 때면, 저는 집 앞에서 배웅을 했습니다. 앞치마를 멘 채로 도로가에 서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는 것이 제삿날 저의 마지막 역할이었습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던 그 순간에 꼭 제 앞에 굳이 차를 세우고 차 창문까지 내려서 한마디를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다음엔 꼭 아들 만들어 와!”

대가족 구성원 중에는 유독 심하다싶은 분이 꼭 한두 명은 있었습니다. 제삿날 마지막 순간까지 면전에다 ‘아들, 아들’ 하시고, 심지어 취중에 전화를 걸어 ‘아들, 아들’ 하시는……. 그 순간이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10대 다섯 명의 며느리는 11대 종손부이자 외며느리인 제가 아들을 낳으면 가부장제 제사 노동에서 물러날 수 있습니다. 아들 출산과 동시에 종가의 모든 의무와 권리가 12대 종손의 어머니가 된 제게로 넘어오는 겁니다. 종가 여성들의 노동에는 그러한 이해관계가 있었기에, 제게 아들이 없어서 제사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10대 다섯 분의 며느리들은 저를 원망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두 아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편에게 쌓인 분노를 쏟아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다음 제사가 있기 한 달 전까지 견딜 만 해지곤 했습니다.

다섯 명의 여성이 힘을 합치면 못 해낼 게 없을 같은데, 가부장제 노동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는 종가의 여성들은 왜 그 문화를 바꾸지 못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문득 “넌 여자잖아. 처녀막이 손상되니까 안 돼!”라는 오빠의 말에 자전거 타기를 포기했다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세월을 살아온 세대라면 무언가 다른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다섯 분의 10대 며느리들이 변화를 도모하길 기다리다간 족히 50년이 더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차라리 아들 낳을 때까지 낳아서 종가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물려받은 다음에 내 손으로 싹 바꾸는 게 빠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답답하시죠? 저는 시숙모님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었을까요? 그리고 제 생각은 어떻게 바뀔까요? 다음 주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열아홉 번째 이야기’에서 ‘시숙모님들과의 에피소드’를 이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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