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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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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6일 10시 05분 등록


내 '남사친' 이야기


지저분한 좌판에 아무렇게 피어나는 연기, 조상 대대로 서 있었을 법한 원래 색을 알 수 없게 바랜 파라솔, 어두운 밤과 희뿌연 연기가 연출하는 기묘한 회색 조 풍경 안에서 그를 만났다. 차도와 구분되지 않는 인도에는 작은 테이블을 두고 목욕탕 의자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후덥지근한 밤, 그때는 좋았다고 그가 말했다. 가끔 내 뿜는 한숨이 내게 해로운지 아는 그는 이야기 중에도 실례를 구하며 담배를 태우러 다녀오곤 했다. 혼자 한탄을 마음껏 빨아들이게 나는 밖으로 나간 그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는 한때 내 직장 상사였다.


한국을 떠나왔던 때 그러니까 해외 생활의 시점이 비슷했고 해외에서 같은 직장에 일했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던 시기도 엇비슷한 데다 사는 곳도 그리 멀지 않아서 동고동락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지금은 직장이 달라졌고 그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고 나의 고민이 그의 고민이 된 50대 초반의, 나와는 열 살 차이 남사친이다. 50대와 40대가 의외로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알게 됐다. 그는 흔히 말해 열려 있는사람이었다. 간간이 던지는 그의 말에 거슬리는 데가 있으면 나는 지체 없이 바로 잡았고 (바로 잡다니, 누가 누구를 바로 잡는단 말인가, 나는 사실 바로라는 잣대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 너그러운 표정으로 못 이긴 척 웃어넘겼다. 그의 박식함에 내가 감탄하면 끝 간 줄 모르고 썰을 풀어내는데 처음엔 내가 그의 노래 같이 풀리는 말 언저리를 쭈뼛거리며 들어가 중단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면 지금은 내 표정을 읽은 그가 알아서 멈춘다.


타향살이가 고됐던 모양이다. 그의 가족들이 한때 호찌민에 함께 살며 좋아했던 때를 나는 기억한다. 잘살고 있는 줄로만 여겼다. 직장이 달라진 후 자주 만나지 못하던 어느 날, 그는 특유의 쾌활함으로 부라더, 어째 잘 지내시나하며 연락해왔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가족 모두를 한국으로 보낸 뒤였다. 욕심이었다고 했다. 그간 직장을 다니는 중에 조그만 사업에 손을 댔고 생각만큼 시원찮았는지 부었던 돈을 모두 잃은 모양이다. 아이도 학교 적응이 원활하지 않았고 아내의 몸도 좋지 않아 이래저래 가족들은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 지금은 역기러기신세가 됐다고 웃었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같이 살고 싶다고 했고 직장을 알아보고 있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쉽지 않다고 했다. 지금 직장에서도 이 나이에 오너에게 휘둘리며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며 크게 웃었다. 차라리 웃지 않았으면 내 마음은 편했을 테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그때는 좋았다.


그때가 좋았다니, 지금은 좋지 않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지금보다 잘 나가던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삶에는 곡절이 있을 뿐 높이는 있을 수 없음을 어렵사리 알게 된다. 잘 나가던 때를 상기하며 지금은 그때보다 하향하는 그래서 인생 전체가 하강하고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사유를 지배해온 플라톤적 사고방식이다. 이상적인 삶은 있을 수 없다. 혹 이상적인 삶이라는 게 있어서 거기로부터 멀어지면 삶은 초라해지고 가까워지면 행복해지는가. 그럴 수 없다. 도달하려는 지점은 언제 어느 때고 바뀐다. 살기 위한 이유는 없다. 유전자 박테리아로 지탱되는 삶인 만큼 그저 맹목적인 생존이 우리가 사는 이유일지 모른다는 걸 어렴풋이 예감한다. 그러므로 삶에서 좋다’ ‘나쁘다는 있을 수 없고 높고 낮다는 우리가 만들어낸 그러니까 오랫동안 우리를 최면에 빠지게 한 인위적인 세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은, 그래서, 적당한 말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러니까, 그런데도, ‘전개된다 말해야 옳다.


헤어질 무렵 그는 능숙하게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앉았다. 다음에 또 보자며 시동을 켜는데 이내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진다. 그는 내일이면 다시 침대에서 일어날 테고 나도 내일이면 오늘 밤 그의 얘기를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에 담길 텐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고 먹고 말하고 들으며 기뻐하고 슬퍼하고 환호할 것이다. 멀어지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시무시한 삶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고르려 오늘 밤 이곳에 온 것 같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시 일상으로 들어서는 그가뭍에 왔다 바다로 빠져드는 고래처럼 늠름하다. 다시 삶으로, Hang in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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