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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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을 씹어 삼키며 버티다
시선은 나에게 향한다. 나는 나의 멸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살던 곳을 두고 떠나온 이곳, 절멸의 위기를 안고 퇴각했던 호모 사피엔스의 비장함과 같은 곳. 이십 만 년 전 거대한 이야기를 줄이고 축소하고 쪼개어서 개별화된 나로 치환해 보면, 그들의 역사적 퇴각의 종착지는 내가 고향을 떠나 사는 지금 이곳이고, 그들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해낸 호기심은 지금 내가 이곳에서 겪는 이제껏 얻지 못한 세상의 데이터겠다. 문화적 충격과 호기심으로부터 얻어내는 것들은 내적 다양성을 넓힌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살아남아 다시 내 살던 곳으로 돌아가더라도 이전의 나는 아닐 것. 내 삶의 지평이 넓어질 때 나는 이곳의 데이터들을 병목효과처럼 삶에 새기리라 다짐한다. 그러니까, 어디서든 살아야 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삶은 그라운드를 정초하려는 나쁜 습관이 있다. 바닥이 다져져야만 어엿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착각 말이다. 절멸의 위기에서 정주하던 곳을 과감하게 버리고 이주를 거듭하며 어떻게든 다시 사는 방법을 찾는다. 삶에 정초된 그라운드는 없는 것이다. 삶에 무게가 없듯이 깊이도 없다. 고귀한 삶과 위대한 삶이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바닥이 정초된 삶은 애초에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반이라 부르는 얼마간의 돈, 집, 차, middle class value 같은 삶의 조건들은 어쩌면 자유정신으로 살기를 포기한 호모 사피엔스, 천박한 현대성일지도 모른다. 그라운드 없는 삶에서 깊은 퍼스펙티브가 생겨난다. 한국을 떠나 살거나 월급이 나오는 회사를 떠나게 되면 삶은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그라운드 위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왜소한 인간으로 만든다.
수 천 년에 걸친 이주와 적응, 적응과 이주를 반복하며 마침내 현생 인류는 살아남게 됐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지구 전역에 뿌리 내리게 된다. 그들은 생존을 응축했다. 자연에 저항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는 어리석음 대신 기다리고 기다리며 다시 사는 날을 고대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삶을 성숙의 관점에서 얼마나 응축할 수 있느냐를 물었다. 자유로운 내가 되기 위해선 충분한 숙성이 필요하고 충분한 숙성은 오크통의 포도주와 같은 시간이 필요한 것. 서둘러선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기다릴 줄 아는 지혜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질문하기 무섭게 빠르게 답하는 가벼운 말이 아니라, 경박하게 오고 가는, 뱉어 버리는 삶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침묵하며 품어내어서 마침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고 마는 응축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겐 필요한 건 함장축언 含藏蓄言의 지혜다. 니체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기다려 줄 줄 아는 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칸트는 ‘철학은 진리의 탐구도 아니고 지혜의 갈구도 아닌 인간 자체가 성숙해지는 것’이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즉 함장무언을 말하지 않았는가. 조명을 다시 나에게 비추고 묻는다. 나는 내 삶의 문제, 삶의 긴장성을 어디까지 응축시킬 수 있는가? 응축된 것들을 얼만큼 자기 변화로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절멸의 끝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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