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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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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19일 10시 41분 등록

월급쟁이 사룡천하(四龍天下)

 

2: 낯선 곳에서의 후라이

 

1. ‘익숙한 것과의 결탁에 이어서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아무런 보고서도 생산해 내지 못하는 성해바장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회사 복도를 유유히 다닐 수 있는 이유는 청룡엑신과 운무워달이 그를 보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룡엑신과 운무워달은 모두 한때 대천피왕 문하에 있던 자들이었다.

 

대천피왕이 말하길 늘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청룡엑신과 운무워달은 PPT 만큼은 대천피왕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때마침 4만줄이 넘는 빅데이터 분석을 맞닥뜨린 청룡엑신은 PPT술을 버리고 엑셀 권법을 연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회사 서가에 꽂힌 권법서는 화려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청룡엑신은 면벽수행에 들어간다. 벽을 마주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은 뒤 가상의 엑셀 테이블을 놓고 수식과 데이터, 피벗, 함수, 매크로와 자유자재로 산천강토를 넘나들며 대련을 벌였다. 하루, 이틀, 사흘수면과 식욕을 끊은 채 주화입마와 같은 상태에서 엑셀과 가상 대결을 펼치던 닷새 째 되던 날 오후였다. 조용하던 사무실에 외마디,

 

‘E 3 4 7백 여섯 째 줄!’

 

부처가 검지를 지상에 조용히 닿게 하여 일체의 유혹에서 벗어나듯 키보드의 엔터 키를 지그시 때리며 순환참조참조하는 셀을 밝혀냈던 것이다. 모두가 저런 미친’, ‘저거 후라이야’, ‘신입사원도 하루 만에 하는 일을 5일째 붙잡고 있으니, 나 원하며 웅성거리는 중에 성해바장은 무릎을 치며 청룡엑신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이튿날 성해바장은 자신의 신공 나훈아 꺾기를 활용해 청룡엑신의 부서장이었던 운무워달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 뒤 이듬해 청룡엑신을 자신의 문하로 들이게 된 것이다.

 

운무워달은 허가 찔렸다. 운무워달(雲霧W) W는 워드다. PPT가 사라진 세상에 아무리 워드가 그 자리를 꿰찼다 하더라도 기만 줄에 달하는 숫자놀음엔 청룡엑신의 무공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해바장의 비언어 장악술에 운무워달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청룡엑신의 빈 자리가 허전하기만 했다. 인걸은 간 데 없고 하수들의 키보드 소리만 난무했다. 성해바장의 야비한 일격에 운무워달이 이처럼 하염없이 무너질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대의가 사라진 세계엔 오직 인사명령만이 나 뒹굴었고 뒤늦게 후회하는 운무워달은 주먹을 쥔 채 징울음을 울었다. 남아있는 대리들이 청룡엑신의 흉내를 내었으나 한참 모자랐다. 그들은 청룡엑신에 비하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고 라스베가스에서 짤짤이 하는 격이었으니 운무워달은 답답하고 허망하였다. 결국, 운무워달의 부서는 청룡엑신의 상실로 발생된 초자연적 원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공중분해 된다. 분해된 문하생들은 쓸 수 있는 비술이 일천하여 곧바로 성해바장의 구심력 신공에 빨려 들어가 그의 휘하로 통합되게 된다. 운무워달은 홀로 무공을 발휘하여 원, 구심력을 모두 이겨냈으나 성해바장으로 빨려 들어갈 때 자신이 애써 키운 문하생들의 슬픈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인지상정의 이치를 끝내 견디지 못하고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서서히 그리고 스스로 성해바장 아래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 날, 운무워달의 부서가 성해바장의 부서에 통합된다는 인사명령이 떨어지던 날, 운무워달은 마지막 워드 비기를 앞세워 성해바장의 비위 사실을 모두 리스트 업 하여 백일하에 낱낱이 밝힐까를 고민했었다. 예산을 넘어서는 회식비의 과도한 사용, 개인적인 용무에 법카(법인카드)를 남발했던 명예의 오용, 내공이 쌓이지 않은 사원 행자들에게 쭉 땁시다 하며 진로이즈백을 강요한 사례, 후라이를 까거나 개나발을 불며 벌였던 미투에 버금가는 행적들.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고작 이런 미물에 대항하려 십여 년 혹독하게 수련한 워드 권법을 벼렸던가. 그것은 모기 잡으려 칼을 빼 드는 견문발검이요, 대한항공 비행기가 김해시 구산동 1902번길에 내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발경의 조절에도 한계가 있는 법, 칼을 뺀다 한들 모기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칼 집에서 나온 번쩍거리는 워드를 다시 집어 넣었다. 칼을 넣고 너볏한 칼집 소리가 징하고 울렸다. 운무워달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순간, 운무워달은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과 같이 짙은 암흑 속에서 성해바장을 소환했다. 어둠 속을 헤매는 성해바장, 그 위로 순식간에 덮여진 검은 구름을 읽어냈으니 운무워달은 놀라며 동그랗게 된 눈을 다시 떴다. ‘성해바장, 그의 미래 역시 썩 좋지만은 않구나.’

 

성해바장, 그는 비언어 장악술에 능했다. 그는 말하지 않고 안구의 안광과 눈썹의 높낮이, 실룩거리는 콧구멍, 비죽거리는 입으로 언어를 대신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비기였으니 따뜻했던 사무실을 순식간에 얼음장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보고하던 사원들을 울리기도 했던 절세권법이었다. 뿐인가, 십 리 밖에서 개미가 뀌는 방구 소리조차 감지한다던 붉은 여우의 청각처럼 미세한 키보드 손 놀림에 섞인 감정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던 것이다. 무심히 넘어갈 수 있는 키보드 소리에도 그의 귀에는 다 같은 키보드 소리가 아니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미세한 바이브레이션 감지력이었다. 조용히 업무에 매진하는 키보드 소리인지, SNS에 잡담을 하는 소리인지, 자신을 향해 끊어 오르는 화를 품고 쳐대고 있는 키보드 소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청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짙은 농담과 코노, 노래방용 노래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성해바장이 업무 무능력자라는 설움을 견디며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권법이었으므로 업무 능력을 떠나 그 굴욕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해바장의 비언어 장악술의 자장(磁場) 안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성해바장의 비술이 먹히지 않는 자가 그에게 도전하게 되었으니 사무실은 그야말로 신묘한 빛으로 엉겨 붙었다.

 

(다음 주 월급쟁이 사룡천하마지막 회, ‘세월이 카톡에게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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