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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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월급쟁이에게
먼 우주의 변방에 은하가 있고 은하의 변방에 다시 태양이 있고 태양의 변방에 있는 둥그런 지구에 너는 산다.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너는 산다. 사는 동안 특별하고자 노력했으나 특별하진 않았고 그저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고 있다. 이뤄냈다 라고도 할 수 없는 작고 변변찮은 성취들은 삶의 곳곳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밥과 꿈 사이, 굴종과 해방, 억압과 자유 사이를 늘 떠돌고 그것들의 중간 어디쯤 편안한 자리, 사납지 않은 곳,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지점 어딘가에 거처를 두고 삶이 거칠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산다. 인간은 보통 70에서 80살 언저리를 살다 간다면 그래서 너에게도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30년 또는 40년을 조금 더 살다 죽을 것이다.
 
 
 
 사랑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 사회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사랑할 수 있는 사회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는 일은 내 스스로 보기에
근사한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나를 창조한다는 말은 내가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너를 네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지금 너는 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너를 만들어야 가야 하는가? 닿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나를 상정해라. 만들어진 결과의 나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이 창조하는 일이자 네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다.  네가 자랑스러워 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여야 하는가? 그것은
조그만 성취의 누적으로 만들어질까? 인격의 완성을 위해 매일을 도야에 매달려야 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를 위해 지금을 헌납해야 할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나는 내적 가치가 세워진 의젓한 인간일까? 돈을 많이 버는 인간일까? 스스로 답하여라. 내가 나를 혐오하는 지금에서 사랑하는 나로 옮아가기
위해 네가 해야 할 당장의 일들은 무엇인가? 상상해라. 생각하면
통쾌한 장면 하나를 상상해라. 그 장면은 네가 스스로 상상하고 창조한 그대일 테니 그 장면을 위해 사는
것, 가꾸어 가는 것,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나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진위다. 나를 끊임없이 나로 만들어 가는 것,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미 너 안에 있다.  참고한 책)  - '서광’, ‘선악의 저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 이상 니체 지음.  - ‘다이너마이트 니체’ 고병권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