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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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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5일 22시 36분 등록
얼마 전 부모님이 계시는 전주에 내려갔었다. 전주집 내 방에는 결혼을 했지만 내가 사용하던 물건의 일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과 사진 앨범 및 노래 테이프, 인형, 소품 등 잡다하고 다양한 것들이 그것인데 여전히 나의 책상과 서랍 속에 빼곡이 자리잡고 있다.
시집 가버린 딸이지만 딸이 그리우신 것인지 부모님께서는 다른 건 다 정리하셨어도 여전히 내 방에 있던 책상과 책, 나머지 물건들을 그대로 남겨 두셨다..

오래간만에 사진 앨범을 보려고 책장 위에 있던 앨범을 내리려다가 그 옆에 있는 붉은 색 커다란 상자가 눈에 띄어 뭔가 싶어 내려보았다.
‘이게 뭐였더라?’ 하며 열어본 상자 안에는 11살 초등학생 시절 때부터 23살 대학생 시절까지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편지와 쪽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전에 받아 두었던 편지들을 이 빨간 상자에 모두 담아두었던 게 생각나며 보물을 발견한 듯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런데 가만 보니 상자 뚜껑 한쪽이 뜯긴 채 덜렁덜렁한 게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시절에 열지 않아도 책장 위에 올려둔 편지 상자에 넘쳐나는 편지와 각종카드, 쪽지들을 넣기 쉽게 뚜껑 한쪽을 찢어둬 덜렁덜렁하게 해두고 그때 그때 받은 편지들을 한 손으로 바로 바로 집어 넣기 위한 아이디어였던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시절에는 그렇게 차고 넘칠 만큼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도 모두 편지를 통해 주고 받곤 했었다.
그렇게 그 상자 안에 들어있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고, 곱게 접혀진 쪽지들은 하나씩 펼쳐가며 읽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편지 상자는 무려 3시간 동안 나를 한자리에 머물게 하며 많은 웃음과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선사했다.

그 빨간 상자 속에는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친구와 안부를 묻기도 하고 서로에게 화이팅을 외치는 편지들도 있었다. 그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라는 노래에 어울리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또 어느 순간 관계가 어색해져 현재는 만나지 않는 그 친구와는 편지 속에서 여전히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미래를 고민하며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베스트프렌드로 지내는 고등학교 친구 두 명과 수업시간에 주고 받았던 온갖 유치하고도 재미난 쪽지들. 그 쪽지 속에는 다양한 별명의 선생님들의 이야기와 반 친구들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입술이 너무 두꺼워서 입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별명이 ‘입뿐이(얼핏 들으면 이쁜이~)’ 남자 수학선생님의 가죽 슬리퍼 사이로 구멍 난 양말을 고발하고, 코를 파던 같은 반 남자애의 모습을 목격한 이야기, 고3이던 그때, 토요일 오후 자율학습 시간에 영화 ‘제5원소’를 보러 가자는 내용등이 담긴 쪽지들이 아니었으면 절대 기억하지 못했을 재미난 이야기와 추억들이 간만에 나를 활짝 웃게 만들었다. 지금에 비하면 사소한 것들을 고민이랍시고 걱정하고 사소한 것에 낄낄대고 즐거움의 의미를 찾던 그 시절, 철없던 소녀인 내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 시절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등 다양한 생각과 기분이 스치는 오후 반나절이었다.

그 편지들 속에는 대학교 1학년 때 나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친구에게 소개받았지만 결국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그 사람의 편지 10여통도 담겨 있었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편지를 기다리며 몇 일 동안 우체통을 열심히 뒤져보다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여름 날, 비에 젖어 글씨가 약간 번진 그의 편지를 집어 들고 기뻐하던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기도 했다. 얼굴을 본적은 없지만 그는 편지를 통해 마음이 참 곧고 바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 사람이었다. 종국에는 그의 집이 이사를 가고 편지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우리의 인연은 흐지부지 그렇게 끊기게 되었다. 만약 그와 편지를 주고 받다가 실제로 만나보게 되었다면 또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런지, 또 결혼을 한 현재이지만 그때 그 편지가 좋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면 또 어떤 모습일지 엉뚱한 상상과 함께 현재의 내 옆의 평생 짝으로 있게 될 남편과의 새삼스러운 인연의 진기함과 신비로움을 다시금 느끼게 했던 10통의 편지였다. .

또 대학교 후배 놈이 군대에서 보내 온 편지도 보였는데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그 얘가 왜 나한테 편지를 보냈을까 싶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를 약간은 좋아하지 않았나?싶은 생각이 새삼 드는, 편지 행간의 의미가 다시 보이기도 했다.
.
현재까지도 꾸준히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은 우리의 역사를 보는 듯 해 유쾌하고 새롭기도 했다. 친구로 지내온 지 15년은 훌쩍 뛰어넘는 친구들이니 20년 친구 기념으로 이 편지들을 복사해 나누어 보며 하하호호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그 친구들과는 서로 결혼을 하고도 남편들과 함께 종종 모임을 갖기도 하는데, 그런 작은 이벤트를 만든다면 친구들에게는 물론 친구의 남편들에게도 와이프의 소녀적 흔적들을 조금은 보여줄 수 있게 되어 또한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벌써 마음이 벅차 오르기도 한다.

많은 편지들 사이에는 내가 미처 보내지 못했던 편지들도 끼어 있었다. 늦은 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 겨우 완성해 둔 편지가 다음 날 보니 너무 유치하고 낯부끄럽다고 생각되어 결국 보내지 못했던 편지들, 군대에 가 있는 친 오빠에게 부치려다 쑥쓰러워 그만 둔, 결국 군대 생활 내내 편지 한 통 보내주지 못한 무뚝뚝하고 애교 없던 나를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미쳐 부치지 못한 편지등 내 인생의 조각조각이 모두 그 빨간 상자 안에 가득히 담겨져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전혀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발견하게 된 빨간 편지 상자 하나로 그날 한나절의 기분이 참 오묘했다. 10년 이상의 나의 역사가 담겨 있는 그 편지들이 내가 잊고 있던 나의 인생의 단편들을 다시금 조명해 주면서 재미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다양한 상황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과거를 다시금 기억하고 가다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평소 일기나 기타 기록을 통해 나의 일상을 남겨 두는 편이 아닌 나에게 이 편지들은 특히 어릴 적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어가던 나의 종이 편지는 2003년 정도까지가 전부였다. 아마 그 이후로는 종이 편지를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 역할이 이메일로 옮겨가고 현재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그 역할들을 대신하기 때문이리라. 문득 그 시절의 설레임과 재미, 기다림을 주었던 종이 편지가 무척 받아보고 싶어졌다. 짧은 문장으로 휴대폰 메시지를 통해 주고 받는 메시지 말고 보내는 이의 마음을 깊고도 길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긴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나 먼저 바로 옆에 있는 가까운 남편에게 그런 재미를 선사해 주기 위해 편지를 적어봐야겠다. 내일은 회사 건물 지하의 문고로 달려가 예쁜 편지지를 정성껏 골라 그가 나에게 연애할 때 그랬듯 아름답고도 절절한 시를 함께 넣고 예쁘고 용기가 되는 말만 골라 넣은 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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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5.26 14:05:43 *.122.143.151

잔잔한 봄날의 따스한 영상이 떠오르네...

다소 어두컴컴한 다락방, 그 속을 비추는 한줄기 빛,

먼지가 다소 낀 마룻바닥에 앉아 옛 추억을 헤아린다..

배경음악은...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야생화...

캬~ 좋았겠네, 엄마도 아이도, 따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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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6 19:38:43 *.41.62.236

그사람을 만났으면 우릴 못 만났을터,
잘했다. 지환씨 닮은 튼튼이 못 볼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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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26 20:05:46 *.244.220.254
문득 '편지'라는 단어가 가슴에 들어왔다.

이 글을 읽는데, 결혼을 할 때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가 생각났다.
"일상을 핑계삼아 서로에게 소홀히 않겠다고,
성공을 변명으로 자그마한 행복을 놓치지 않겠다고~"

지금 그렇게 살지 못함에 가슴 한쪽이 먹먹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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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27 11:15:00 *.97.37.242
나도 지난주에 편지를 썼다우. 손으로 쓰는 편지를 몇 년만에...
딸애 유치원 숙제라며 집사람이 내게 들이미는 편지지. 위쪽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아빠가 가족에게 쓰는 편지" 라고 돼 있고, 그 왼쪽엔 "사랑하는 아내에게", 오른쪽에는 "사랑하는 아이에게"라고 씌여 있더군. A4 횡용지 한장 분량의 편지를 손으로 꾹꾹 눌러 썼지.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집사람에게, 아이에게 편지를 쓴게 몇 년만인지... 유치원 숙제로 한 거였지만 느낌은 꽤 괜찮았던것 같아.
가끔은 편지를 쓰면서 사는 것도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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