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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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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1일 18시 02분 등록

월급쟁이의 자식

 

당신의 아이가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다고 학교로부터 통첩이 왔다. ‘학교 숙제는 하지 마라고 있는 거라고 농담 삼아 던진 내 말을 얼른 주워 담았었던 모양이다. 문맥 없이 내뱉은 못난 아비 탓이다. 뒤 늦게 숙제를 챙겨보던 중에 기초적인 질문 몇 가지를 던져 보니, 아이는 아예 모르고 있다. , 그래 괜찮다, 모른다는 걸 알게 된 건 다행이다. 늦지 않았다, 찬찬히 알아가면 된다며 몇 가지 공부를 같이 하지만, 갑갑함은 더해 간다. 가슴 저 밑에서 길어 올렸어야 한 건 인내였는데 화를 끌어올리고야 말았다. 탄수화물 부족과 카페인 금단도 한 몫 했을 테다. 애꿎은 아이에게 큰 소리를 냈다. 부끄럽지만 그건 지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크게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이 콱 와서 박힌다. 아이는 내가 화내지 않아도 혹은 분노를 뿜어내더라도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살아갈 어엿한 인간인데 내 까짓 게 아비랍시고 고함쳤으니 나는 그 고함의 저의가 스스로 궁금했던 것이다. 미안하단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처박고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내가 감히 한 인간의 의젓한 전개를 방해한단 말인가? 언젠가는 알게 될 숫자놀음에 아이를 진정한 바보로 만들려 했는가? 사는 건 목적이 있을 수 없다고 그저 나아가는 거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그건 내가 나에게 퍼부은 비난이었다.

 

월급쟁이 삶의 목적은 인격 완성일 수 없다. 인격의 완성, 정신의 도야는 돈이라는 수단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 삶의 목적은 자유일 수 없다. 돈에 엉겨 붙은 노예적 일상으로는 자유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과 돈에 예속된 월급쟁이는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자유롭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원심분리기에 올려놓고 사랑과 자유를 빼고 나면 지리멸렬한 월급쟁이 일상이 징그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아이의 자유를 빼앗아 말 잘 듣는 아이, 훌륭한 성적이라는 수단을 쥐어주고 나면 그 아이 또한 쭉정이 같은 회색 인간이 될 게 뻔한데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발버둥을 쳤으나 기어코 빠져 나오지 못한 초라하고 남루해져 버린 나를 아이에게 투사했고 소심하게 작아진 아이가 마치 나인 듯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사는 게 진정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굴곡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유로운지 물어보고 싶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내 답답함을 위로한다. ‘(자유, 사랑, 존재의 참다운 인식 같은)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맞지? 그렇지? 부가의문문을 연발하며 참으로 그렀노라며 무릎을 쳤다. 니체도 거들며 나를 꾸짖는 것 같다. ‘아이란 순진무구함이고 망각妄却 이며 하나의 새로운 출발, 유희,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자유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아이에게 겁 없이 까불거린 어른이었다. 어쩌면, 어른이란 어린아이의 완성된 인격을 꾸준히 파괴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화들짝 놀라 늦기 전에 용기를 내어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빠는 그날 아침의 아빠가 스스로 부끄럽다.’ 공부고 나발이고 그저 아프지나 말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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