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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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의 스승
한 시인이 있었다. 나는 지독하게 평범했는데 그 시인은 나에게 너의 평범이 위대함으로 가는 길이라 늘 말했다. 나는 믿지 않았으나 돌이켜보니 그 말은 무섭고 아름다운 주술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천둥벌거숭이였는데 시인은 나에게 북극성으로 향하는 떨리는 나침반 하나를 툭 던졌다. 시인도 오랫동안 너저분한 월급쟁이의 삶을 살았는데 내게 던져준 나침반은 그가 쓰던 그것이었다. 그가 월급쟁이를 뛰어넘었던 방법을 알려줬던 것이다. 지저분한 삶을 헤어나오지 못하던 나는 냉큼 그 나침반을 받아 들고 삶의 지도를 정치하고 자북磁北을 맞추었다. 내 안에 조금 특별한 하나를 스스로 끄집어 내어설랑은. 아, 시인아 어디 있는가. 스승은 끝내 시인이 되었다.
나는 스승이 좋아했던 제자는 아니었다. 분명 그랬을 테다. 그가 그토록 제자들로부터 기다리던 천진한 질문 하나 하지 못했고 살갑게 다가서지도 못했다. 살갑기는커녕 인사치레라도 제대로 한 적이 있었다면 이토록 그립진 않았을 테다. 그의 제자라면 한번쯤은 몰려가 본 적 있을 스승의 가택도 가보지 않았고 자연스레 깊게 나눈 대화의 기억이 없다. 식사할 때 그의 면전에 앉기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졸렬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스승에겐 나는 별 볼 일 없는 제자 중에 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나에게 스승은 그의 작은 흉터마저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 글을 끝내려니 내 눈앞에 갑자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얼굴 무너지도록 웃는 시인이 나타난다. 항상 그의 오래 된 책상에 앉아 무엇을 쓰거나 읽는 한 시인. 스승은 시인이었고 마지막 그의 삶은 시였다. 그 해 봄, 병색 짙은 스승의 초췌한 모습에 눈물 보이는 우리에게 춤을 추라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힘을 내어 눈으로 말했다. ‘이것이 시와 같은 삶이다.’ 행간의 도약과 함축, 복선과 반전이 있는 시와 같은 삶 말이다. 모레, 스승의 날엔 실로 오랜만에 아주 멀리 떨어진 그와 마주해야겠다. 요새 비대면이 유행인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간지나는 그 목소리, 성대모사라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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