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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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이 되면 이런 저런 관계와 구성원으로서 정체성 만큼은 가득 찬 삶 속에 놓이게 된다. 가장 중요하게는 가족, 회사 및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태어나서 만들어진 혹은 주어진 부분들이 많지만 더 이상 벗어나기 힘든 정체성이 때로는 감옥들이 삶을 힘들게 할 때가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정체성들 간에 경쟁하고 서로 더 중요하다고 아우성이다. 무엇 하나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 정체성들 속에서 점점 자기 자신은 사라져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더욱 이 정체성을 붙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연령대보다 40대 중반은 직장에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있다. 20대 혹은 30대에 시작한 직업이 40대에 연속되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나름 열심히 노력하여 닦아 놓은 업무 경험과 사내 네트워크들이 있고, 무엇보다 그동안의 실적들이 훈장처럼 나를 대변한다고 믿게 되는 시점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지속적인 성장이 한계에 부딪히고 변화되는 조직, 기술, 업무 방식에 불안해 하면서 과거 성공에 기대어 안도하기 쉬운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니, 40대 중반은 더욱 지금까지 만들어 온 정체성과 성공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새로움과 패기로 새로운 업무 방식과 문화로 밀물처럼 다가오는 후배들과 그들과의 공존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이전까지의 관계 변화와 일하는 문화의 변화를 적극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 과거의 성공 방식을 들고 나와 그들과 차별화를 하려고 하는 잠재적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이럴 때 꼰대라는 말이 주위에서 돌며 나와 사람들간의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40대 중반에 회사 내에서 업무를 변경하였다. 15년간 설계 업무를 하던 개발 조직에서 새로운 제품과 기술을 기획하는 새로운 조직을 맡기로 하고 자리를 옮겼다. 40대 중반에는 다양한 사내 조직 개편과 변화 대응을 이유로 피할 수 없는 조직 이동이 발생하기도 한다. 때로는 새로운 업무 경험과 경력을 위해 자발적으로 옮기기도 한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조직 이동을 위한 방법이 다양해져서 한결 수월하게 새로운 경력을 쌓기가 좋아진 면도 있다. 하지만 실무자로 옮기는 것이 아닌 새로운 조직의 팀장으로 옮기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임 초기에 팀원보다 관련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적고 의사 결정 포인트를 빨리 캐치하기도 어려우며, 조직 문화를 리드할 수 없어 자칫 주변인으로 전락하기 쉬운 점이 있다. 사실 잘해보려다 망하기 딱 좋은 시점인데 신임 팀장이 3개월 내에 조직에 융화되지 않으면 결국 조직의 암적인 존재가 된다고 했던가? 더 나아가 발암물질이 되지는 말아야 했다.
지코의 '아무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 최근 단연 Top 10 중 하나이다. 이 노래의 가사 중 중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아무 노래나 일단 틀어,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아무렇게나 춤춰,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아무 생각하기 싫어, 아무개로 살래 잠시" 모두들 경쾌한 리듬과 같이 막 놀아보자는 가벼운 마음이 들게 하는 흥겨운 가사들이 정말 좋다. 이 노래 중 나는 마지막의 아무개로 살래 잠시라는 말이 참 좋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했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자리에 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 시간을 즐기고 함께 놀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조직을 변경한 후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며 같이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난 아무개가 되기로 했다. 나 자신을 아무개로 생각하기 시작하니 나의 경험도, 과거 약간의 성취도 몇 가지 익혔던 배움도 점점 중요해지지 않았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과 그들이 힘들어하는 문제와 같이 해나가야 할 일들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지도 않고 실체가 없는 막연한 정체성에 갇혀 자꾸 나를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난 그저 어느 회사의 어떤 작은 팀의 팀장인 아무개였기 때문이다.
아무 노래나 일단 틀어서 같이 듣고 신나게 놀고 즐기면서 피로를 풀고 외로움을 달래고 한 시점을 잘 넘기면 이 또한 행복한 것이라고 본다. 회사의 일은 늘 바람 같아서 나에게 불어오지만 머물지는 않았다. 매일 새로운 바람이 불 때도 있고 비슷한 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결국 모두 지나가고 기억조차 남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 바람에 같이 일하고 토론하고 결정해서 추진하고 결과를 만드는 일에 나의 정체성이 왜 필요하겠는가? 잠시 그 바람을 잘 머물다 가면 그만인 것이지? 오늘도 아무 노래나 들어야겠다. 바람이 많이 분다.
오~희동님, 아무개 이야기 넘 좋네요. 저도 요즘 출퇴근하면서 지코 많이 듣는데 엄청 반갑네요. 시기마다 필요한 대처가 달라져야 한다는 유연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익명의 아무개로 폴리페모스의 동굴을 탈출한 오디세우스 이야기도 생각나요. 내가 뭘 했다보다 함께 무엇을 해나갈까에 대한 이야기가 새로운 팀에는 더 필요한 게 아닐까요. 10기 연구원 때 만들었던 희동님의 여섯조각 자기 신화가 생각났어요. 그 때도 오디세우스 생각이 나는 이야기였는데... 새로운 도전도 훗날의 희동님이 돌이켜보았을 때는 멋진 무용담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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