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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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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07시 57분 등록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1년에도 수 차례씩 큰댁을 드나들곤 했다.
그 이유는 명절을 제외하고도 1년에 몇 번씩이나 있는 제사때문..

초등학교 1,2학년 때 학교가 파하면 시외 버스를 타고 큰댁으로 이동하곤 하였는데 그런 날은 바로 할아버지,할머니 혹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제사라던가 하는 날이었다.
학교를 끝나면 엄마의 부탁을 받은 옆집 아주머니 댁으로 가서 점심 밥을 먹고, 버스 터미널에서 태워 주시는 시외 버스를 타고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큰댁으로 갔다.
큰댁으로 가는 길은 얼마나 설레고 즐거웠는지, 책가방은 등에 바짝 메고 버스 차창에 붙어 앉아 버스가 지나고 뒤로 사라지던 그 구불구불한 시골 길들을 바라 보고 또 보았다. 산촌이어서 버스가 다니는 도로도 굽이굽이 참 아찔하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것도 마냥 스릴 있고 즐거워 했던 기억이다. 그런 성향인지 다 커버린 지금도 나는 놀이공원에서 오바이트를 해내는 남편과는 달리 롤러코스터니 자유로드롭이니를 가뿐하게 타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차창 밖으로 다양한 것들을 실컷 구경한 뒤 내려서 도착한 큰댁에는 이미 오전에 도착한 엄마와 큰 어머니들이 고소한 냄새의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며 다양한 제사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셨다. 나는 잘 모르던 친구와도 금새 친해진다는 꼬마였던지라 학교도 다른 그 동네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저녁에 있을 제사를 기다리곤 했다. 여름이면 큰댁 옆에 있는 수심이 얕은 강가로 나가 물놀이를 하거나 머리 감기를 하기도 했는데, 수심이 옅은 강가에 발을 담그고 허리를 숙여 긴 머리카락을 물에 담그면 강의 흐름에 따라 내 머리카락의 거품도 저절로 씻겨 나가던 그 모습을 신기해 하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그 시절에 지금과 같은 샤워기가 없어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담그고 손으로 머리를 흔들어 감아야 했던 것들이 어린 나에게도 불편했던지 그렇게 강가에서 머리감기는 신기함과 편리함, 색다른 재미를 주곤 했다.

이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큰댁은 물론 우리집도 전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제는 학교가 파하면 그쪽 동네에 사는 친구들과 재잘재잘 수다를 떨면서 30분간을 걸어 큰댁으로 이동하곤 했다. 가서 하는 일은 더 이상 강가에서 멱감기, 동네 친구들과 놀기가 아니라 함께 음식 장만하기였다. 이젠 나이도 나이인지라 시키는 것들에 대해서는 바로 바로 충분히, 제대로 해낼 수가 있어서 나름 조수 노릇을 열심히 하곤 했다. 계란을 풀어서 섞는다던가, 전 부칠 생선에 밀가루를 묻혀 낸다거나 나물을 다듬는 일등. 재료를 다듬고 조리하는 음식 만들기의 수많은 과정들이 나에게는 또 다른 독특한 놀이대상이었다. 그때는 더 큰일을 맡겨주지 않는 다는 것이 섭섭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피로한 일일텐데도 그때는 그러한 일들 하나하나가 새롭고 신기했으며 뭔가 내가 보탬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제삿날이 되면 그날은 아침부터 오후에 큰댁에 갈 생각에 들뜨기도 했는데, 그런 마음으로 즐겁게 큰댁에 도착하고, 음식을 장만을 돕고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서 제사를 함께 지내고 식사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어린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만족스럽고 뿌듯한 기분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나에겐 일상 생활과는 다른 제사라는 행위 자체가 매번 즐거운 명절이요, 축제이곤 했다. 즉, 조셉캠벨이 이야기 하는 제례나 의식의 중요성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어린 시절의 내가 깨달았다기 보다는 제사라는 과정 하나하나가 어린 나에게는 모두 신기함이고 배움의 즐거움이며 또, 나에게 주어지는 일들을 해내는 것에 대한 뿌듯한 자기 만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내가 그렇게 즐거워 하던 제사에 자연스럽게 참여하지 않게 되었고 그나마 부모님이 가져오시는 음식 정도로 오늘이 제사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명절에나 겨우 큰댁을 방문하면서도 가서 음식 장만등 도와야 할 일이 생기면 그것들은 점차 나에게 부담이고 귀찮음으로 다가왔다. 또한 다 커서 마주치는 친척 어른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들은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관계가 되어 버렸다.

어른들도 힘들어 하는 그런 일들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즐겁게 해내던 그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열정, 호기심은 어디로 간 걸까? 어른이 된 지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활에서 발휘되지 않는 그것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아무것도 재단하지 않고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흡수하던 그 때, 그 시절의 경계 없음이 문득 그리워진다. 그래서인지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재미났고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평소의 일상이 편안하고 나의 룰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는 지금은 그 만큼 오랫동안 추억할 것도, 기억할 것도 없어지는 듯 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즐거움이고 진기함이며 환희였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몸은 커버렸지만 그때와 같은 소중한 마음가짐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문득 유치한 게 즐겁고 재미난 것이라던 얼마 전 우리들만의 행사 때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렇게 즐거웠던 우리의 그 하루를 생각한다면 한 달에 한,두번쯤은 일부러라도 엉뚱하고 유치한 행동을 만들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판단하지 않고 순수하게 다양한 일들을 즐겁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비법, 여러분들은 혹시 가지고 계신가요? 분명 당신들은 한가지씩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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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02 12:42:04 *.244.220.254
어린 시절 마법을 그리워하고 말이야~ v.v
벌써 중년(中年)의 나이인가? 지혜낭자~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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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6.02 16:15:36 *.84.240.105
일주일에 한번씩 유치한 짓거리 하는 모임 같은 거 만들면 어떨까?
그거 하면 나 금방 가입할래...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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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6.03 14:41:34 *.97.37.242
애하고 같이 있으면 유치해 질 수 있지.
난 여섯살난 우리 딸하고 있을 때 그런 기분을 느껴.
뭐가 그리 신나고 좋은지...
물가져 오라고 시키면 '응 알았어~' 하면서 신이나서 깡총 깡총 뛰어 냉장고로 가고, 요즘은 똥꼬라는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나만 보면 '아빠 똥꼬 방귀 먹어라! 에있!' 하고 내게 똥침을 놓으면서 좋다고 깔깔대며 웃고, 내가 한번 안아서 휘휘 돌려주면 '꺅~' 하면서 또 자지러질 듯 웃고...

난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일에 그렇게 배꼽잡고 웃는 딸애 모습에 기가막히고 재미나서 웃고...
애 있는 집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지. 그래서 애기 탄생을 축복이라나봐.
애기 잘 크지? 이제 조금만 지나면 애하고 실컷 유치해질 수 있어. 건강관리 잘 해요. 예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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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01:09:36 *.41.62.236
지혜씨 모월모일이 우리집 제사거든. 한 번 오실래요?
좀 즐겁거든요. ㅎㅎㅎ
우리 막내동서의 꼬맹이들이 전부치는 놀이 하는 것과 같은 풍경이라
슬그머니. 미소가. ㅎㅎㅎ

큰집의 제사는 주관하는 것.
작은 댁의 제사는 참관하는 것. 좀 다르죠.

제사를 오래 지내다 보면 제사가 왜 필요한 지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원했던 사이들이 음식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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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6.05 15:27:47 *.36.210.11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글을 쓸 수 있고 이것으로 시작하고 연결되어 동심으로든 노년으로든 넘나들며 더나은 일상을 마음껏 살아보게 하시려고 고생스러움도 애써 즐거운 마음으로 가꿔가시며 우리를 거두시지. 이렇게 깔아놓은 멍석에서도 못 놀면 언제 무엇을 하며 재미나게 놀 수 있겠어? 지금의 그대 생각 옳아요. 인생이 그리 길지 않고 어어 하다보면 어느새 훌쩍 가버리는 게 세월인 것 같기도 하다우. 이제 그대도 여인으로 어미로 살아가게 될테니까 더 실감나게 알 수 있을 걸. 맞아 유치하게 무지 재미난 클럽 만들면 좋겠다. 어디 시작해 봐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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