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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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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6일 12시 26분 등록
스페인은 발길을 떼기가 힘든 나라였습니다. 기대도 안 했는데 너무도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가는 곳마다 행운이 따라서 매번 공짜 저녁을 얻어먹었습니다. 게다가 처음에 큰 맘 먹고 시작한 ‘술집 혼자 가기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너무도 성공적이어서 아예 밤마다 낯선 현지인들 혹은 여행자들을 만나서 포도주 한 잔씩을 마시면서 안 통하는 말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었습니다. 그 재미에 푹 빠져 지내다 보니 어느 새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우울증을 모두 떨쳐 버리고 있었습니다. 수중에 돈이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한 달 정도 스페인에 아예 눌러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밤마다 선술집을 찾아서 포도주를 한 잔 시켜 두고 밤을 새워 누군가와 이야기를 했었겠지요.

눈물이 날 정도로 아쉽고 따스한 스페인의 추억을 뒤로 하고 나는 마지막 여행지인 파리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파리로 가는 길엔 밤 열차를 집어 탔습니다. 좀도둑이나 소매치기가 많은 열차 구간이라고 해서 긴장을 좀 했었나 봅니다. 게다가 옆에 타신 할머니들은 화장실을 자주 들락 거리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간이 침대에 누워서도 깊이 잠들지 못했습니다.

스페인과 프랑스, 두 나라의 국경지방에서 다시 한 번 열차를 갈아탔는데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잠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보르도의 포도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배도 고프고, 졸면서 멋진 창 밖의 풍경도 놓치고 싶지 않아 커피를 마셔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심결에 식당간으로 걸어 갔는데, 메뉴판을 훑고 있던 내 눈에 낯선 프랑스어가 들어 왔습니다.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나는 벌써 스페인어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카페 콘 레체’ 하고 ‘우노 보까디요’ 가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 나오려는 순간.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이제 그러니까, ‘까페 오레’, ‘엥 크롸쌍’를 해야 하는 구나

그러니까 나는 벌써 프랑스 땅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둘러보니 따뜻한 느낌의 사람들로 가득하던 스페인과는 다른 느낌의 프랑스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모두들 고독하고 잘난 체 하는 것 같아 보이는 프랑스 인들입니다. 물론 얼굴도 좀 더 못생겼습니다.

누군가 내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당신 차례에요”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제가 불어를 못하거든요”
“하하. 어려울 필요 없어요. 영어로도 주문이 가능해요. 모두 영어가 통한다구요.”
“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이윽고 나는 카페오레와 크로와상을 하나씩 시켜 놓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까 내 앞에서 영어가 통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던 아저씨가 옆에 앉아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했고 우리는 아침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곱슬머리, 라틴 민족의 냄새가 느껴지는 전형적인 이 프랑스 아저씨 눈에는 내가 한참이나 어린 꼬마 숙녀쯤으로 보이나 봅니다. 어디 가느냐? 어디서 왔으냐? 대충 여행객들한테 물어보는 질문들을 하더니 인형을 쳐다보듯 신기해 합니다.

“어쩜,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었는데도 쉽게 말을 할 수 있지? 동양 여자가?”
“동양 여자가?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나요?”
“응, 내가 본 동양 여자들은 안 그런 것 같아.”
“아저씨가 만난 동양 여자들은 어땠는데요?”
“암튼, 너처럼 그냥 말을 걸어서 선뜻 길게 이야기 하는 여자들은 없었어. 그런데 말이야, 너 이렇게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같은 라틴 민족이 사는 동네에서는 남자들이 말 건다고 함부로 답하면 안 돼요. 위험해. 다들 바람둥이야.”
“그럼, 아저씨는요? 아저씨야말로 이상한 사람 아닌가요?”
“나 빼고, 나는 괜찮아. 나쁜 의도가 없거든.”
“그냥 이야기만 하는 건데요, 뭐? 이야기 하는 것은 나쁠 게 없어요. 여행을 다니면서 현지인과 이야기를 해야 진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 알 수 있쟎아요. 그래서 영어라도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데.”
“너 그렇게 마음을 열고 있다면 위험해. 매우 위험해.”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큭큭 웃었습니다.

“아저씨야 말로 위험한 사람 같아요. 생각이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 사실 나 꿈이 하나 있어.”
“……..”
“일본 여자랑 결혼하는 것. 진짜 오래된 꿈이야.”
“근데 내가 보기엔 아저씨 결혼한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요.”
“응 결혼은 아니고 동거 중이지.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러면서도 일본 여자랑 결혼하는 꿈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구요? 이상한 정신 세계야. 그런데, 일본 여자가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어요?”
“얌전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내면은 정열적이라는 거지. 매우 신비로워”
“응, 그런 거구나. 난 한국사람이라서 그게 그런 건지 잘 모르겠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그렇게 다른가?”
“당연히 다르죠? 스페인 사람과 프랑스 사람이 다른 것처럼.”

나는 실실 웃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꼭 이렇습니다. 서양 남자들이 생각하는 동양 여자들이란 조신하고 얌전하지만 내면에 뭔지 모를 신비스러운 면이 있는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동양 여자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 여자에 대한 환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아저씨는 딱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

이럴 때 난 꼭 그들의 환상을 깨어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환상을 부풀릴 대로 부풀린 다음, 바늘로 풍선을 터뜨리듯 ‘팡’하고 터뜨려 주고 싶습니다. 난데없는 고민 하나가 생긴 셈입니다. 답이 쉽게 떠오르진 않아 이내 포기하고, 대신 웃으면서, 속으로 말해주었습니다.

‘환상에서 벗어나시오. 이 아저씨야! 동양 여자들도 다 같은 인간이에요. 그리고 여자 친구한테나 가서 잘 하세요. 도대체 옆에 있는 여자를 두고 아직도 일본 여자랑 결혼하는 꿈을 꾸고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린 집어치우란 말에요.’

문득, ‘환상’이라는 것이 삶에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란 누구든 어떤 환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나만해도 아직 떨치지 못한 환상이 참 많이도 있습니다. 부유한 삶에 대한 환상, 잘 생긴 남자 친구에 대한 환상, 성공한 삶에 관한 환상,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에 대한 환상, 멋진 직업인으로서 성공하는 것에 대한 환상, 세계 여행에 대한 환상….. 그 환상 속으로 들어가 살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환상이란 인생에 있어서 약간 필요한 양념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한테 ‘일본 여자와의 결혼’에 대한 환상은 자신의 지루한 삶에 있어서 약간의 휴식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한테 그냥 웃어 주기로 했습니다.

‘잠시 나를 통해 일본 여자를 꿈 꾸면서 아저씨의 지루한 삶에서 휴식을 하시길…’

참, 아저씨는 지하철 회사에서 일한답니다. 나는 파리로 오는 그 기차 안에서 공짜 지하철 표를 잔뜩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건 아저씨의 소중한 환상을 깨뜨리지 않았던 덕분이었습니다.

P.S. 사실 아저씨래 봤자 내 나이보다 3~4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하도 어린 아이 취급 하길레 그냥 그것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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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6.07 00:53:24 *.178.33.220
스페인이 좋다고 하더니만, 바로 스페인 야그가 올라왔네.
왜, 그 할머니 얘기는 안썼어? 재밌던데..
몸으로 다 통하는 대화.. 역시나 만국공통어지?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술 읽혀져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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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6.07 05:05:47 *.117.4.35
와~~ 대단대단..
현정이 글은 소설같다.
그림이 연상되내....
아저씨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았던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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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09 12:49:30 *.244.220.254
대학때 꼭 가보고 싶은 나라가 '스페인'이었는데......
특히 바스크 지방이라는 곳에 꼭 가고 싶었지~
(혹시 바스크 지방에 대해 알면 나중에 이야기 좀 해줘~)
여행 소설이 나날이 금빛 날개를 펼치는 군! 현정낭자~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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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6.09 13:49:03 *.248.75.18
메모한 것도 없다면서 어찌 이리 기억을 잘 하누,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픽션의 천재.

아저씨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은 덕분에 얻은 공짜 지하철 표, 압권!!
잘했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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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
2008.06.09 15:02:51 *.161.251.192
현정씨는 정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것 같아
이 경험들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고...
점점 더 기대되는 현정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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