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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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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8일 12시 05분 등록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항상 유행하는 것에는 한 발 늦은 나다. 100만부가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를 이제야 읽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웅으로만 남아있던 한 인간의 모습을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도 한 인간이었고, 전투를 앞둔 날 저녁에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칼의 노래'가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들어있을 무렵이었다. 그저 베스트셀러이니까 나도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 동인 문학상 수상 작품, 이 시대 최고의 소설가 탄생 등 그 책을 소개하는 화려한 수식어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순신-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갖고 있던 그 책, '칼의 노래'는 나에게 그리 와 닿지 않았다. 100페이지를 읽지 못하고 그저 책장 속에 장식용으로 남아있는 책이 되었다. 이번 과제로 인해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웬걸? 그때와는 달랐다. 지루해 보이기만 하던 이순신 장군의 일상은 한 인간의 솔직한 내면을 담고 있었고, 치열한 전투장면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책속의 해전도를 번갈아 가며, 지난 주에 읽은 난중일기를 옆에 두고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 비교해 가며 읽는 맛 또한 쏠쏠했다. 오랜만에 읽었던 그 소설은 내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다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제야 이 맛을 알았을까? 똑같은 책이건만, 왜 지금에야 이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때와 내가 다른 것은? 나이를 먹어서 인가? 나이를 먹으니 세상을 좀 더 알게 된 것인가? 아니면 인생의 그윽한 맛을 좀 알게 된 것인가? 그렇다고 그게 이순신과 상관이 있나? 차이라고 하면 가장 크고도 유일한 차이, 지난 주에 읽은 '난중일기'였다. '난중일기'를 읽기 않았다면 이번에도 예전에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난중일기를 통해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을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을 보니 흥미가 더 커졌으리라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생각이 하염없이 뻗어나간다. 그렇다면, 세상을 좀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아야 되는가보다. 요즘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안 읽던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신화, 역사, 자서전 등 인문학 서적들. 한때 컴퓨터로 먹고사는 직업을 택하면서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난 이제 철저하게 논리에 바탕을 둔 사고체계를 가져야 한다. 그때 부터였던 것 같다. 프로그래밍과 숫자, 논리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책들은 어느덧 멀리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가끔씩 소설도 읽곤 했지만, 그야말로 감성은 메말라가고 머릿속에는 0과 1로 가득한 단순한 사고체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접한다는 것은 항상 설레고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처음 접하는 내용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솔직히 굉장히 고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하고 난 후에는 묘한 쾌감이 밀려온다. 이것을 읽어서 어디다 써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안가 반드시 써먹히고 마는 상황이 찾아온다. 아직은 많이 엉성하지만, 책을 한 권 읽고 났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얽히고설키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누구든 자기 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터이니, 그리 남다른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내가 착각해 왔던 것이 있다. 그야말로 전문가, 스페셜리스트는 그것에 대해서만 최고이면 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에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제너럴리스트는 지양했다. 그리고, 한정된 시간에 이곳저곳에 기웃거리는 것이 제너럴리스트가 되길 자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지적 호기심이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어떤 분야의 어떠한 지식이건 자기가 하는 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전문가라는 생각으로 전환되었다. 간단히 말해 의사라면 의학책만 볼 것이 아니라, 의사도 시 속에서 소설 속에서 자신의 일에 대한 실마리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인 잡식성이 이 시대에 나를 진정한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 A Whole New Mind'의 저나 다니엘 핑크는 지식정보화 사회를 넘어 이제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시대라고 한다. 그 책에서 다니엘 핑크는 21세기의 인재의 요건으로 6가지를 뽑고 있다. 그 중에 조화라는 항목이 있다. 다름 아닌 조화의 능력, 서로 달라 보이는 많은 것들 중에서 공통점을 뽑고 이를 조화시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이것이 바로 경계를 넘나드는 창의성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수 없이 많아 보이는 것들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일 것이다.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다양한 시각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것, 또 그러한 다양한 시각 속에서 하나의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 또 그 다양한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 이러한 능력들이 돈보다, 안정된 직장보다 이 세상을 좀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칼의 노래'를 읽고 생각이 널을 뛰듯 이리저리 뛴 듯하다. 하지만 이것도 나의 도약이라고 생각하면 기분 좋은 일 아닌가. 꼭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나만 파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진정한 전문가는 세상 그 무엇을 재료로도 자기가 하는 일에 가져다 쓸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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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6.08 23:36:01 *.36.210.11
88년도에 올림픽을 위해 태릉에 있는 국가대표 선수촌에 들어가 일을 한 적이 있어요. 전국체전 등을 통해 3번 연속 좋은 성적을 내어야만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는 것이지요. 그때 나는 육상팀 전체를 맡아 관리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후원하는 공사의 회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선수들은 나이 어린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정상이란 곳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보통의 일반 아이들이나 어른들과도 다르다"고 말씀 하셨지요.

즉 한가지 일만 통해서라도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것으로 인해 다른 일들에 대한 이해나 보편적 시각을 갖게 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거에요. 물론 너무 연구에만 집중한 공부벌레 박사들의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집안 내력이나 성격이지 능력의 차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되거든요. 모든 것을 다 접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요. 나 역시도 나이를 먹다보니 주변 상황들이 미루어 짐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젊어서는 다양하게 능동적으로 접해보는 다채로운 경험도 남을 돕는 일에 유용하고 좋겠지요. 아우님의 필요와 의욕이 마구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기운으로 뻗치시나 보네. 어쩐지 좋은 기운인 것 같으이. 튼튼이 아빠도 튼실하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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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09 12:58:37 *.244.220.254
나도 책을 접할 때마다 매번 너와 같이 다른 느낌을 받는단다.
'지적 잡식성'이라는 단어. 원초적이지만, 마음에 드는데~ ^^
'지적 잡식성'이 '전문가'를 만든다는 문구 가슴 안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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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6.09 14:08:04 *.248.75.18
칼럼 제목이 흡입력이 있네요.
진정한 전문가는 세상 그 무슨 재료도 자기가 하는 일에 가져다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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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6.09 16:04:46 *.97.37.242
지환, 나하고 같은 경험을 했네...
나도 2002년에 칼의 노래를 반 정도 읽다가 중간에 덮었거든.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군. 몇년 전 읽었던 "두얼굴의 이순신"이란 책과 난중일기를 통해서 이순신 장군을 좀더 알게된 때문일 거란 생각이야.

"지적 잡식성 " 참 마음에 드는 제목이네.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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