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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5일
이토록 위험한 닭발
아, 밤 열 시에 닭발이라니.
나이 스물에 중증 위식도역류염 환자가 되어 버린 아들과 반백살 언저리에서 가까스로 야식의 해로움을 절감 중인지라 밤 시간에 힘들 만한 음식은 먹지 않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자꾸 닭발 타령을 하던 남편 때문에 계속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때, 석촌 먹자 골목에 닭발 맛있는 데가 있다는 데. 도대체 본인은 먹지도 않는 음식을 왜 자꾸 권하는 지. ‘그래, 나중에,’라고 답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렇게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반응이 없으면 무시로 비쳐질까 봐 슬슬 신경이 쓰이던 차다. 나름 내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리라 짐작하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래, 어디 한 번 먹어봅시다, 라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랬을 뿐인데. 일요일 밤 막내를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결국 남편은 석촌 호수 인근으로 방향을 틀어 친구가 알려줬다는 맛집에서 닭발을 포장해 왔다. 그리고는 아들과 지난 밤 놓친 ‘코로나특집 버스킹 프로젝트 - 비긴어게인’을 틀어 놓고, 맥주에 한 상을 차려 한밤의 야식 잔치를 위한 만반의 채비를 갖춘 채 용암처럼 불타오르는 비주얼의 닭발을 개봉했다. “자, 도전!”
대.참.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닭발에 갖은 양념이 아니라 캡사이신만 쏟아 부었는지 목이 따끔거려 넘기기 힘들 정도라, 이걸 야식이라 해야 할 지 극한체험이라 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1인분은 팔지 않는다는 바람에 예상보다 한 장을 더 얹어 2인분을 주문했는데, 아… 2인분이라 보기에 어이없는 그 양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중증의 위식도역류염 때문에 고생 중인 큰 아들은 맛만 보겠다며 한두점을 집어 먹었는데, 안 그래도 밤이면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한 증상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애가 오늘 밤 잠들기는 글렀다. 나 역시 그래도 아깝다며 이를 악물고 석 점을 더 먹고 치웠지만 결국 너무 힘들어서 맥주에 물에 결국엔 흰밥과 식빵까지 우겨 넣으며 속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정말 내키지 않았는데, 본인은 잘 먹지도 못 하는 닭발을 자꾸 먹자던 남편의 속마음을 헤아린답시고 결국 거절도 못하고 이 야심한 시각에 호기롭게 먹방에 도전한 결과가 이모양이다.
남편은 부산을 생각했던 걸까. 닭발은, 부산에서 알게 된 나의 절친과 가끔 맥주 한 잔을 나누던 내 최애 메뉴였다. 수영동 시장 맞은 편에 유명한 닭발집이 있었다. 그 이름도 존엄하게, ‘닭발의 지존’! 가면 대기 중인 손님들이 늘 줄을 서 있기에, 매장에서 먹을 엄두는 못 냈고 미리 전화를 걸어 주문한 뒤 시간에 맞춰 가면 포장된 닭발을 받아와 친구 집에서 각자 맥주 한 캔을 앞에 놓고 그 시뻘건 닭발을 비닐장갑 낀 손으로 발라 먹는 재미가 아주 쫀득했다. 가끔은 나의 남편과 내 친구의 남편까지 끼어 화기애애한 술자리였다. 닭발계의 자칭 지존이신 그 닭발도 꽤나 매웠는데, 그래서 저절로 맥주를 부르는 맛이었는데, 이렇게 화생방 경보가 울리는 화학실험실 같은 매운 맛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추가루 뿐 아니라 다양한 밑간과 함께 버무려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기분 좋은 매운맛과 은근한 단맛과 짭조롬함, 그러니까 맵단짠과 닭발 특유의 젤라틴 충만한 쫄깃함, 거기에 불맛이 찰떡같이 어우러진, 밤과 맥주와 수다에 아주 아주 적절한 안주였단 말이다. 그런데 이놈의 서울 닭발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고문과도 같은 체험을 선사했을 뿐 더러, 가격도 오지게 비쌌다. 먹기 전엔 뚜껑을 열자 마자 강펀치처럼 훅 치고 올라오는 강력한 매운내에 코와 눈이 아렸고 먹는 와중엔 혀와 입천장을 폭격하자마자 목이 따끔따끔하게 아려 왔고 먹고 난 후엔 위장에서 수류탄이 터진 듯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밤 열 시에 돈 버리고 속 버리고, 우씨, 결국은 잠도 설치게 만들어 이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게 했으니 선기능이 하나는 있었던 것인가.
여하튼 오늘 아침은 아픈 건지 얼얼한 건지, 그 따위 매운 맛 폭탄을 처넣었다는데 분노해 내 뱃속을 탈출하시려는 듯, 초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계신 위장을 어떻게 달래 드려야 할 지 궁리 중이다. 뭘 먹지 말고 비워 둬야 하는 건지, 뭐든 넣어서 속을 좀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인지 아오… 죽겠다.
그러니까 좋았던 부산 시절을 재현하고 마누라와 자식에게 점수 좀 따보려던 남편의 의도는 이렇게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맛도 그 시절 그 곳의 맛이 아니오, 내 위도 8년 전의 활력 충만, 쌩쌩한 그 위가 아닐진데, 어찌 그 시절이 돌아 오리오. 무엇보다도 우린 그때의 우리가 아니다. 그 닭발이 그리도 맛났던 건 말 통하고 맘 통하는 친구, 가끔 남편 욕도 같이 해주던 절친과의 수다가 곁들여 졌기 때문임을, 남편은 알았으려나? 닭발이 이토록 위험한 존재였음을 아마 그는 꿈에도 몰랐겠지. 몰라야 한다. 여하간 야식이 이토록 위험한 행위임을 통렬히 절감한 오늘 밤, 내 인생의 맥주 친구 닭발에게 드디어 작별을 고할 때가 왔나 보다. 안녕, 그동안 고마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끝, 디엔드. 우리는 이제 닭발도 위험한 나이, 오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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