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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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행복의 정복』의
챕터는 두 개뿐입니다.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Causes of
Unhappiness), 그리고 행복으로 가는 길(Causes of Happiness)입니다. 영어 챕터명으로 보면 훨씬 간단합니다. 이 명쾌함이, 제가 러셀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복이 우리를
떠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선시해야 할 ‘행복’의 자리에 비슷하게 생긴 다른 게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행복감의 판단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러셀이 말하는
행복 이외의 다른 것들을 제 언어를 조금 섞어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의 찬사, 사랑의 대차대조표, 권태를 이길 큰 자극, 경쟁자의 견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가지 모두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행동합니다. 대체적으로 인정욕구는 훌륭한 자기개발의 동기입니다. 이것을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분야를 감지해 단련하고, 전문성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인정을 다시 받는 순환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과 찬사를 갈구하는 사람을 저녁 식사에서 만나게 되면 10분만에 그 자리는 매우 따분해집니다. 인정욕구가 과도한 사람들을 부르는 답정너(내가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그걸 말하기만 바라는 사람)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이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과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대차대조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지난 번에 밥을 친구가 샀으면, 이번에 내가 사야겠다고 생각하는 감지능력은 사회성에 꽤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만날 때마다 술 얻어먹는 친구에 대한 평이 얼마나 바닥을 치는지를 기억해보세요. 반대로 누가 나한테 밥을 사면 뭔가 그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야 할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관계에서,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자주 대차대조표가
등장한다면, 그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르기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받는
빈도와 양이 굉장히 많고, 그것은 한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차대조표가 끼어들면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는 주체가 아니라, 수금원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권태를
이길 자극을 끊임없이 찾는 것도 1930년보다 더 빈번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주말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고 SNS를 플랫폼별로 체크하다가 게임도 좀 하면 어느새 일요일 저녁입니다. 이제는
주말에 책 한 권 읽어내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방식으로 시간을 슬슬 써버리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첫 스마트폰을 사주는 시기를 늦추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늘 곁에 있는 풍성한 유혹이 인내를 기를 기회를 완전히 없애 버릴
것을 우려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경쟁자의
견제 또한 너무 자주 보는 일입니다. 저는 태생적으로 경쟁이랑은 잘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오직 누군가를 견제하기 위해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적이 꽤 많았습니다. 생존을 위한 암투와 정치가 정적을 물리쳤다는 순간의 기쁨은 줄 수
있겠지만, 만약 실패할 경우 쓰디쓴 실패의 재를 입에 머문 채 쓸쓸하게 퇴장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정적을 하나 물리치면 곧 새로운 적이 등장하게 됩니다. 제가
경쟁의 가장 싫어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 속에 생기는 잡스러운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정복하기 어려운데, 다른 방해꾼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입니다.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라는 논문결과가 있습니다. 실제로 개인주의 문화를 가진 서구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은 경제수준을 갖고 있음에도 집단주의 문화의 일본과 한국, 싱가포르
국민들의 행복감의 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우리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릅니다.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쓴 서인국 교수는 개인주의문화에는 있고 집단주의문화에는 없는 것이 ’심리적 자유감’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그려지던 우리나라처럼, 우리는 서울대 의대를 나와 의사로 살아가는 몇 가지 종류의 삶
이외의 많은 삶들을 거의 멸시하고 있지요. 내가 어떻게 살지 내가 결정하기 어려운 문화 속에서 우리는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1930년에 출판됐습니다. 저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영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1872년생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지금의
저와는 전혀 다른 배경, 전혀 다른 상식의 시대에서 나온 책이 저에게도 깊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특히 귀족, 백작, 왕족 등 높으신 분들이 쓴 고전들은 엘리트주의적 관점이 강합니다.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서 존경받고,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좋은 인생(Good life)에 대한 성향이 강하게 마련인데, 귀족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몇 가지 예시를 제외하고 러셀은 누구나 자기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는 행복한 인생(Haappy
life)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며, 누구나 정복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제 생각에 이 범용성은 러셀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만나는 놀라운
명쾌함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따뜻한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원천인 것 같기도 합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첨언을 덧붙이자면, 『행복의 정복』에서 이야기한 ‘행복’을 한 차원 더 덧붙여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행복
그래프의 x축에 ‘평가에 나 자신이 개입한 정도’, y축에 사이비들이 아닌 ‘행복감 그 차체의 양’이라고 놓고 여기에 z축 ‘내가
이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영적/정신적 성숙도’를 놓는다면, 행복한 인생이 깊은 인생(deep life)로 가는 놀라운 순간을
우리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행복의 기쁨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가다 보면, 분명 아무것도 없던 막다른 길 끝에서 오직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모퉁이 길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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