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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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현충일이 있었다. 현충일은 다 알다시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호국 영령들을 위로하고 기념하는 절기다. 그런데 현충일 기념행사 중계를 방송을 통해 전해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착잡하다. 국가가 한 개인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인 군대가 꼭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언제나 만나기 때문이다. 전쟁은 어쩌면 ‘나라간 힘의 역학’ 이전에 인간의 본성에 맞닿는 근본적인 이슈인지 모른다. <난중일기>와 <칼의 노래>를 읽으며 접어두었던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올라왔다. 적과 적으로 대치하며 서로를 베어야 살아남는 전장에서 작가는 이순신을 빌어 전쟁의 부조리함에 대해 역설한다. 그것이 개별적인 죽음과 보편적인 죽음에 대한 그의 묘사에 잘 드러나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적들이 전장으로 몰려왔고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전장에서 죽었다.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밀물에 물려 바다를 뒤덮었다. 죽을 때 그들은 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일 터였다. 그들이 맞은 죽음이 그들에게 공통된 것이라 해도 개인으로 보면 그 죽음은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으로 기억되거나 위로될 수는 없다. 죽음의 보편성 앞에서 개별적인 죽음을 인식하고 그 죽음에 공감하는 것은 군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은 말한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적이 되는 것'이 전쟁의 실상이다. 사병 하나를 집단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 보는 순간, 적과 적 사이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찌르고 죽여야 하는 전쟁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순신의 일상은 보편적인 죽음에 대응하는 장군으로서의 일상이다. 그에게 있어 매일 마주하는 죽음은 철저히 집단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무의미한 전장의 현실에서 간혹 개별적인 죽음과 대면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장군이 깊이 연민한 4번의 개별적인 죽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아들 면의 죽음, 그리고 면을 죽인 젊은 왜군 아베 준이치의 죽음, 그리고 (허구라고는 해도) 한 때 몸을 섞으며 잠시 위로를 얻었던 기생 여진의 죽음이 그것이다.
어머니를 그가 얼마나 끔찍히 생각했는지는 난중일기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은 뒤의 세 죽음과 다르다. 이른 바 호상이니 다른 죽음처럼 무참할 이유가 없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앞에 놓고 철저히 개별적인 죽음의 슬픔에 젖어 든다. 송장으로 뒤덮인 쓰레기 앞에서 그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씨 내림의 운명에 섬뜩해한다. 그러나 아들 잃은 자신의 슬픔이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처절하게 인식하고 있다. 부하들 앞에서 울 수 없는 그지만 아들 잃은 슬픔을 덮어두기가 힘들다. 노을이 바다를 덮을 즈음, 그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소금창고로 들어가 가마니 위에 엎드려 숨죽여 통곡한다.
아베 준이치의 죽음, 그는 면을 죽인 젊은 왜군이다. 간 밤에 그는 면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면은 자기의 칼을 찾아달라고 애원했다. 면의 원수를 갚아주고 싶은 갈망에 가득 찬 그 앞에, 면을 죽인 왜군이 포로로 잡혀온 건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그의 나이는 23살, 21살의 면과 비슷한 나이다. 그 역시 혼인하지 않은 청년이다. 그가 면을 죽인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다. 이순신은 심문하다 말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봉두난발 아래로 드러난 눈이 크고 맑았다. 이번엔 그의 목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은 굵고 짧았다. 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베를 심문하는 그의 속에는 아베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울음과 죽여야한다는 울음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결국 그는 아베를 베었다. 목숨을 가로지르며 건너는 칼날에서 그는 산 것의 뜨겁고 뭉클한 진동을 느꼈다.
그리고 여진의 죽음. 여진은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 적장의 수청을 들고, 그의 아이까지 몸에 잉태한 채로 죽었다. 적장이 패배할 때 수종 들던 여자들도 함께 목이 베였다. 그 다섯 구의 여자 시체 속에 섞여 여진은 이순신 앞에 실려왔다. 혹시라도 연고를 찾아주려고 부하들이 끌고 온 시체들을 그는 ‘내다버리라’고 명령한다. 여진의 시체는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 위에 다른 시체들이 포개졌다. 저녁 때가 되자 이순신은 여진이 묻힌 밭둑 구덩이로 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한다. 여진의 죽음이 그 안에서 개별적인 죽음으로 부활하는 순간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그는 참담해진다.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들던 그는 따뜻했던 여진의 몸을 떠올리며 울음 같은 성욕을 느낀다. 한 사람의 개별적인 죽음 앞에 선 그에게 세상은 칼로써 막을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 된다. 그는 생각한다. 몸은 벨 수 있지만 죽음은 벨 수 없다고. 여기서 죽음은 죽음과 함께 남겨지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죽은 사람이 세상에 남겨지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진은 이 순신 안에서 적어도 그녀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름없는 병사들, 그들은 모두 어느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그녀의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이스라엘의 예드 바쉠(Yod Vashem)에 관해 썼다. 예드 바쉠은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는 뜻의 히브리어다. 실제로 그곳은 홀로코스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6백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의 이름 뿐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비롯해,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죽은 이들은 짐승처럼 도살되어도 상관없는 이름없는 무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고 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숭고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나탈리는 적고 있다. ‘그들은 아침이면 노란 치즈를 사러 가게로 향했고, 크고 작은 삶의 소망을 품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특별한 개인들’ 이었다고. 워싱턴 D.C 베트남전 기념관에도 베트남에서 죽은 미국 병사들의 이름이 그들의 자세한 개인력과 함께 적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전장에서 죽은 이들을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 기억해주는 것이 남은 자들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는 한, 이런 무의미한 집단적인 죽음은 언제고 되풀이 될 것이다. 어떤 명분을 갖고 있든 전쟁은 근본적으로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안고 있다. 이름 없이 아무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고귀한 생명들끼리 왜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 간 ‘명분’이라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왜 전쟁은 그칠 새가 없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선의란 무엇인가. 전쟁이 인간의 악의 때문이라면 그 악의는 교정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역사의 발전이란 무슨 의미인가.
김훈은 말한다.
"프랑스혁명, 동학혁명, 볼셰비키혁명이 모두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일어났지만 결국 또다시 약육강식에 얽매이는 사회를 만들었을 뿐이다. 악에 저항하고 승복하고 또 저항하고, 그런 모순된 꼬라지가 인간의 역사이고 나 김훈의 꼴이다.”
나 역시 어느 면에서 그의 견해에 동감한다. 어찌 보면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개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선의가 왜곡되고 악의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영원히 꿈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세기를 넘어 성공한 유토피아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가, 없다. 역사가 증명한다. 인간은 아직도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고, 전쟁은 그 자체로는 선악을 논할 수 없는 인류의 총체적인 비극이다.
현충일에 죽은 자를 기리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질문은 그대로 남는다.
IP *.248.75.18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적들이 전장으로 몰려왔고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전장에서 죽었다.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밀물에 물려 바다를 뒤덮었다. 죽을 때 그들은 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일 터였다. 그들이 맞은 죽음이 그들에게 공통된 것이라 해도 개인으로 보면 그 죽음은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으로 기억되거나 위로될 수는 없다. 죽음의 보편성 앞에서 개별적인 죽음을 인식하고 그 죽음에 공감하는 것은 군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은 말한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적이 되는 것'이 전쟁의 실상이다. 사병 하나를 집단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 보는 순간, 적과 적 사이의 팽팽한 대치 속에서 찌르고 죽여야 하는 전쟁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순신의 일상은 보편적인 죽음에 대응하는 장군으로서의 일상이다. 그에게 있어 매일 마주하는 죽음은 철저히 집단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무의미한 전장의 현실에서 간혹 개별적인 죽음과 대면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장군이 깊이 연민한 4번의 개별적인 죽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아들 면의 죽음, 그리고 면을 죽인 젊은 왜군 아베 준이치의 죽음, 그리고 (허구라고는 해도) 한 때 몸을 섞으며 잠시 위로를 얻었던 기생 여진의 죽음이 그것이다.
어머니를 그가 얼마나 끔찍히 생각했는지는 난중일기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은 뒤의 세 죽음과 다르다. 이른 바 호상이니 다른 죽음처럼 무참할 이유가 없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앞에 놓고 철저히 개별적인 죽음의 슬픔에 젖어 든다. 송장으로 뒤덮인 쓰레기 앞에서 그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씨 내림의 운명에 섬뜩해한다. 그러나 아들 잃은 자신의 슬픔이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처절하게 인식하고 있다. 부하들 앞에서 울 수 없는 그지만 아들 잃은 슬픔을 덮어두기가 힘들다. 노을이 바다를 덮을 즈음, 그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소금창고로 들어가 가마니 위에 엎드려 숨죽여 통곡한다.
아베 준이치의 죽음, 그는 면을 죽인 젊은 왜군이다. 간 밤에 그는 면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면은 자기의 칼을 찾아달라고 애원했다. 면의 원수를 갚아주고 싶은 갈망에 가득 찬 그 앞에, 면을 죽인 왜군이 포로로 잡혀온 건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그의 나이는 23살, 21살의 면과 비슷한 나이다. 그 역시 혼인하지 않은 청년이다. 그가 면을 죽인 것은 명령에 의한 것이다. 이순신은 심문하다 말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봉두난발 아래로 드러난 눈이 크고 맑았다. 이번엔 그의 목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은 굵고 짧았다. 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베를 심문하는 그의 속에는 아베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울음과 죽여야한다는 울음이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결국 그는 아베를 베었다. 목숨을 가로지르며 건너는 칼날에서 그는 산 것의 뜨겁고 뭉클한 진동을 느꼈다.
그리고 여진의 죽음. 여진은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 적장의 수청을 들고, 그의 아이까지 몸에 잉태한 채로 죽었다. 적장이 패배할 때 수종 들던 여자들도 함께 목이 베였다. 그 다섯 구의 여자 시체 속에 섞여 여진은 이순신 앞에 실려왔다. 혹시라도 연고를 찾아주려고 부하들이 끌고 온 시체들을 그는 ‘내다버리라’고 명령한다. 여진의 시체는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 위에 다른 시체들이 포개졌다. 저녁 때가 되자 이순신은 여진이 묻힌 밭둑 구덩이로 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한다. 여진의 죽음이 그 안에서 개별적인 죽음으로 부활하는 순간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그는 참담해진다.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들던 그는 따뜻했던 여진의 몸을 떠올리며 울음 같은 성욕을 느낀다. 한 사람의 개별적인 죽음 앞에 선 그에게 세상은 칼로써 막을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 된다. 그는 생각한다. 몸은 벨 수 있지만 죽음은 벨 수 없다고. 여기서 죽음은 죽음과 함께 남겨지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다. 죽은 사람이 세상에 남겨지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진은 이 순신 안에서 적어도 그녀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이름없는 병사들, 그들은 모두 어느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그녀의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이스라엘의 예드 바쉠(Yod Vashem)에 관해 썼다. 예드 바쉠은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는 뜻의 히브리어다. 실제로 그곳은 홀로코스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6백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의 이름 뿐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비롯해,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죽은 이들은 짐승처럼 도살되어도 상관없는 이름없는 무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고 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숭고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나탈리는 적고 있다. ‘그들은 아침이면 노란 치즈를 사러 가게로 향했고, 크고 작은 삶의 소망을 품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특별한 개인들’ 이었다고. 워싱턴 D.C 베트남전 기념관에도 베트남에서 죽은 미국 병사들의 이름이 그들의 자세한 개인력과 함께 적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전장에서 죽은 이들을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 기억해주는 것이 남은 자들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는 한, 이런 무의미한 집단적인 죽음은 언제고 되풀이 될 것이다. 어떤 명분을 갖고 있든 전쟁은 근본적으로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안고 있다. 이름 없이 아무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고귀한 생명들끼리 왜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 간 ‘명분’이라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왜 전쟁은 그칠 새가 없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선의란 무엇인가. 전쟁이 인간의 악의 때문이라면 그 악의는 교정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역사의 발전이란 무슨 의미인가.
김훈은 말한다.
"프랑스혁명, 동학혁명, 볼셰비키혁명이 모두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일어났지만 결국 또다시 약육강식에 얽매이는 사회를 만들었을 뿐이다. 악에 저항하고 승복하고 또 저항하고, 그런 모순된 꼬라지가 인간의 역사이고 나 김훈의 꼴이다.”
나 역시 어느 면에서 그의 견해에 동감한다. 어찌 보면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개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선의가 왜곡되고 악의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영원히 꿈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세기를 넘어 성공한 유토피아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가, 없다. 역사가 증명한다. 인간은 아직도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고, 전쟁은 그 자체로는 선악을 논할 수 없는 인류의 총체적인 비극이다.
현충일에 죽은 자를 기리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질문은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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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수
삶과 죽음....
통일되기전 신라시대를 살았던 원효가 출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효는 그 당시 적국이었던 고구려병사들에게 죽음을 당한 절친한 친구 화랑을 보면서 한없이 슬퍼서 울었습니다.
그 순간 고구려에서는 승리를 이끈 병사들이 한바탕 잔치를 벌리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원효 본인도 일전에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잔치를 벌리는 것이 동시에 떠 올랐습니다.
삶과 죽음...
원효는 그것이 궁금해서 출가했습니다.
...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생(삶과 죽음)은 고(고통)이다.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고통이고,
죽지 말지어다. 사는 것이 고통이다.
통일되기전 신라시대를 살았던 원효가 출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효는 그 당시 적국이었던 고구려병사들에게 죽음을 당한 절친한 친구 화랑을 보면서 한없이 슬퍼서 울었습니다.
그 순간 고구려에서는 승리를 이끈 병사들이 한바탕 잔치를 벌리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원효 본인도 일전에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잔치를 벌리는 것이 동시에 떠 올랐습니다.
삶과 죽음...
원효는 그것이 궁금해서 출가했습니다.
...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생(삶과 죽음)은 고(고통)이다.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고통이고,
죽지 말지어다. 사는 것이 고통이다.

정산
칼의 노래를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네요.
나도 그랬거든요.
전쟁은 남을 죽임으로써 사는 인간 본성에 관련된 문제란 생각. 총칼을 이용한 전쟁이 지금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고, 총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경제전쟁이란 또다른 전쟁이 항상 일어나고 있죠.
인류는 문명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순화시켜 왔고. 수많은 종교는 사랑과 자비란 이름으로 인간을 교육하고 순화시켜 왔는데... 그런데 이게 과연 교육되어지고 순화되어질 성격의 것인가?
김훈은 이순신을 통해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바랐다"고 얘기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저자에게 동감이지요.
질문은 남아있지만, 우린 항상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삶을 산다는 것.
나도 그랬거든요.
전쟁은 남을 죽임으로써 사는 인간 본성에 관련된 문제란 생각. 총칼을 이용한 전쟁이 지금도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고, 총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경제전쟁이란 또다른 전쟁이 항상 일어나고 있죠.
인류는 문명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순화시켜 왔고. 수많은 종교는 사랑과 자비란 이름으로 인간을 교육하고 순화시켜 왔는데... 그런데 이게 과연 교육되어지고 순화되어질 성격의 것인가?
김훈은 이순신을 통해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바랐다"고 얘기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저자에게 동감이지요.
질문은 남아있지만, 우린 항상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삶을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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