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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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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1일 17시 04분 등록
스페인 남부의 ‘론다’라는 도시였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정보 수집 차 만난 후배 하나가
너무 적극적으로 권장을 하길레 들러봤는데 특별한 감흥이 일지 않았습니다. 무시무시한 협
곡을 이용해서 도시를 만들어 두어서인지 약간 신기하긴 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습
니다. 길가에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뭐 딱히 재미있을 만한 구경거리도 없었습니다.

사실, 내가 가장 실망한 부분은 누구 하나 나와 대화를 할 사람을 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우중충한 날씨에 누런 황토 빛이 나는 협곡을 혼자 돌아다닌데다가 워낙 말하기
좋아하는 수다쟁이가 수다 떨 상대를 못 찾았으니 괴로울 수밖에요. 게다가 그 도시는 그
겨울에도 시에스타 시간을 영락없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돌아다녔던 대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지요. 낮 한 시가 되니 민방위 훈련이 시작된 서울의 거리 처럼 적막했습니다. 모두들 집으로 들어 갔는지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는 가게집의
문도 모두 닫았습니다. 그나마 시장에 선술집 분위기가 나는 조그만 식당이 열리지 않았었
더라면 그 날은 점심도 굶을 뻔 했습니다.

볼 것도 그리 많지 않은 그 작은 도시를 벌써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젠장, 그
도시에서의 하루는 너무 길기만 했습니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려면 아직 3시
간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데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춥기도 하고 수다를 못 떨어서 약
간 우울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 갈 곳이 없던 나는 별 수없이 터덜터덜 기차역으로 걸어
갔습니다. 역사 안, 작은 간이 식당에서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시켜 놓고 시계를 노려 보았
습니다. 그날 따라 읽을 책도 손에 들고 오지 않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시간아 빨리 가라고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렌지 주스를 한 잔 시켜 놓고 한숨 한 번 쉬고, 시계 쳐다 보고, 한 숨 한 번 쉬고, 엎드
려 졸고 있는 내가 심심하게 보이셨던지 주인 아저씨는 몇 번이나 나한테 말을 걸었습니다.
물론 나는 아저씨의 스페인 말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길이 없었습니다.

“노 에스빠뇰(No espanol)[해석 : 저는 스페인어 못 알아 들어요]”

나는 영어도 아니고 스페인어도 아닌 이상한 답변을 아저씨한테 했습니다. 아저씨는 양 어깨를 으쓱 이시더니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내 컵에 따라 주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풍채가 좋으신 할머니 한 분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할머니는 그
많은 빈 자리 중 내 옆 자리에 앉으시더니 음식을 주문 하시는 듯 했습니다. 손으로 배를
가리키시면서 배가 고프다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저를 보고 웃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이리 저
리 둘러 보시다가 이내 내 테이블로 걸어 오셨습니다. 손가락으로 나를 한 번 가리키고는
당신을 한 번 가리키시더니 다짜고짜로 스페인어로 솰라솰라 해대셨습니다.

아하 그때 내 스페인어 귀가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 단번에
다 알아 들었습니다.

“나도 혼자고 너도 혼자니까 내가 너랑 같이 앉아도 되겠니? 아가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는 웃음을 크게 지으시더니 내 맞은 편 자리에 앉으셨습
니다. 그러시더니 겉옷을 벗으시면서 손으로 부채를 부치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나는 또 그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뛰어 왔더니 덥구나.”

갑자기 내 몸 속에 스페인어 자동 번역기가 들어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어라
고는 ‘에스빠뇰(스페인어)’,’씨(네)’, ’우노 비노 틴토(적포도주 한 잔)’, ’우노 비노 블랑꼬(백
포도주 한 잔)’, ‘우노 아구아(물 한 병) …… 정도의 생존에 필요한 단어만 알고 있는 내가
할머니 말은 어찌나 잘 이해가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있으려니, 할머니가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또 무슨 말을 하셨습니다.
“혼자 먹어서 미안하다 아가야. 내가 좀 배가 고파서.”
나는 또 몸짓으로 답합니다.
“괜찮아요 할머니. 맛있게 드세요.”

한 입 드시더니 표정이 이상해 지셨습니다. 뭔가 상당히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손수건으로 한 번 입을 훔치시더니 할머니는 나한테 불평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분
명 너무 맛이 없으시단 말씀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미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사실을 괘념
치 않으시는 듯, 그 맛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을 하셨습니다. 급기야 할머니는 얼굴을 찡
그리시면서 또 한 말씀 하셨습니다.

“이건 너무 심해서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치? “

그러자 나는 고개를 또 끄덕끄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인장이 우리 테이블에 불려 왔고 할머니는 음식에 대해서 타박을 하시기 시
작했습니다. 주인장은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서 요리를 되갖고 갔고 조금을 후에
다시 요리된 음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번엔 음식이 괜찮은가 봅니다. 할머니는 맛있게
음식을 드시더니 이번에는 시계를 가리키십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기차 시간 놓치기 전에 빨리 일어 나야겠다.”

할머니는 얼른 옷을 챙겨 입으시더니 나한테 작별 인사를 하고서 기차를 타러 가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차 시간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재미있는 스페인 할머니 한 분 때문에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세비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할머니 생각이 나서 빙그레 혼자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너무 심심하던 그 도시에서 그런 재미있는 할머니가 갑자기 튀어나올지는 몰랐었거든요. 이
맛에 나는 배낭 여행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 지 모르는 우연을 그리고 그 우연이 가져다 주는 묘미를 끊지 못하니까요.

~~~~~~~~~~~~~~~~~~~~~~~~~~~~~~~~~~~
재우 오라버니가 재밌다고 하셔서 한 번 써봤습니다. ㅋㅋㅋ
IP *.56.85.43

프로필 이미지
양재우
2008.06.11 17:41:04 *.122.143.151

말도 안 통하는 두 사람이 식당에 마주보고 앉아
과장된 몸짓발짓으로 대화를 하는 모습이 선하다.^^
이미지가 머리에 떡 하니 그려지는 걸~
그리고 두 사람의 표정 너무 재밌었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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