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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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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3일 10시 40분 등록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널리 알려진 네루다의 시,〈시〉의 앞부분이다. 이 시는 시라는 신비한 ‘그 무엇’과의 만남을 인상 깊게 그리고 있다. 네루다에게 시는 어떻게 찾아와서 어떤 변모를 겪었으며, 그런 변모 속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된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초기 시를 대표하는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첫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나는 이 시집을 얼마 전에 미리 주문해두었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한 여자의 육체〉에서)

이 시에는 사랑의 관능과 환희가 솔직하고도 과감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로 이어지는 시는 사랑을 실존 이념으로 삼겠노라는 젊음의 선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긴 것’이다.(〈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대지의 생명력과 연애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시대적 상황에 눈을 뜨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 계기는 스페인 내전이다. 내전 중에 반파시스트 진영에서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던 그는 내란이 끝나자 아메리카 대륙의 민중에게로 눈을 돌린다. 이후 그의 연작시들은 대지 위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열렬히 노래한다.

나는 본다, 로타의 탄광에서 흐느껴 우는 걸,/ 땅속 깊은 데 참담한 광맥을 파는/ 굴욕적인 칠레인의 주름진 그림자를, 죽는 걸,/ 사는 걸, 화석화한 광재(鑛滓) 속에서/ 웅크리고 태어나는 걸, 마치 세계가/ 그렇게 오고 또 그렇게 떠날 것처럼/ 검은 먼지 속에, 불꽃 속에 무너져 있는 걸,/ 그리고 거기서 나옴 직한 거라고는 겨울의 기침,/ 유칼리 나뭇잎이 죽은 칼처럼 떨어진 검은/ 물속을 지나가는 말.(〈남쪽에서의 굶주림〉 전문)

나와 함께 올라 다시 태어나라 형제여./ 네 고통이 뿌려진 그 깊은 곳에서 내게 손을 다오./ 이 생명의 잔에 땅에 묻힌 그대들의 오랜 고통을 가져오라./ 그리고 밑바닥부터 얘기해 다오, 이 긴긴 밤이 다하도록/ 내가 닻을 내리고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내게 모두 말해다오, 한땀 한땀,/ 한구절 한구절, 차근차근. 품고 있던 칼을 갈아 내 가슴에 내 손에 쥐어다오./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피로 말하라.(<마추피추의 산정>의 연작시 중에서)

시대와 현실이 그렇게 그에게로 온 것이다. 그에게 시는 투쟁의 무기이자 선동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196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가해 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쿠바 혁명을 옹호하는 시를 수천의 청중 앞에서 낭송했다. 젊은 시절 초현실주의에 기울었던 시인은 이제 누구보다 결연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한 듯 하다. 그렇다면 그는 리얼리즘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그의 마음은 민중에 대한 희망, 열정, 사랑으로 가득하다. 다만 그것들은 이제 거대한 자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여과될 뿐이다. 그는 몸을 낮추고 민중의 언어와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고양된 감정은 양말, 수박, 소금, 질산염, 밤, 책, 새, 나뭇잎, 양파, 과일, 엉겅퀴 속으로 투영되어 점차 차분해지지만 그의 현실 의식은 여전히 투철하다.

네루다에게는 리얼리즘이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입장’이나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일체의 것들에 갇히지 않았다.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그에게 시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휴머니즘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시는 어려운 미학적 연찬과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하며 성장한 것이었다. 그의 시는 칠레 남반구의 깊은 자연에서 발원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흘러 들어갔다. 흘러가는 물살과 함께 그는 어느 것 하나 배척하지 않고 그 열정을 흡수하고 신비한 세계를 천착하며 민중들의 마음과 마음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그는 고통받으며 투쟁했고, 동시에 사랑하며 노래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눈물과 입맞춤을 경험했고, 고독과 민중을 경험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시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시는 그의 투쟁과 사랑의 밑거름이었다. 그는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뼈 속까지 타고난 시인이었던 것이다.

"(1973년 현재) 첫 시집을 출간한지 50년이 지났다. 나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나는 내 수중의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소재들로 작업한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투쟁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391-2)
IP *.127.9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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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3 16:52:12 *.64.21.2
네루다 시를 읽고 싶어 지더군요.
시간이 될때마다 짬짬이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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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6.23 17:10:53 *.117.68.202
나도 몇권 주문해 놔야겠어요...
도서관에서 잠깐 읽어봤는데 참 묘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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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6.23 18:13:01 *.97.37.242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구먼, 어떤 책이 좋은지 추천 좀 해줘요.
난 시를 워낙 안읽었 더래서, 너무 어렵지 않은 놈으로...
부탁해요~ 소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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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6.23 20:19:46 *.122.143.151

독특한 문체, 사상, 슬픔과 희극이 섞인 아주까리한..

그런 오소독사같으며 델리케익틱한 맛이 나는..

환타와 스틱이 얽힌 리얼 진실겜같은..

좋은 시지요...

한수기누나의 칼럼을 다 읽고 나니,

북리뷰의 저자에 대하여를 읽은 듯한 기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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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24 17:00:48 *.244.220.254
공감합니다.
네루다는 거대 담론과 같은 형식적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한수기누님도 이러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시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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