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Should this life sometime deceive you,
Don’t be sad or mad at it!
On a gloomy day, submit:
Trust – fair day will come, why grieve you?
Heart lives in the future, so
What if gloom pervade the present?
All is fleeting, all will go;
What is gone will then be pleasant.
<대위의 딸>과 같은 고전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시입니다. 유독 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가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한국어로 번역을 잘 해놓은 것이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감되는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또한 이유일 것입니다. 한과 설움, 우여곡절로 가득했던 한국의 격동기를 살아간 한국인들의 정서가 이와 같기 때문일 겁니다.
희망을 노래하지만, 시는 현실의 무게를 토로합니다. 좋아지는 날이 올거라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시를 읽는 독자도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 그 '즐거운 날'이라는 것이 최소한 내일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확장되면 우스개 소리로 '이번 생은 포기했어'가 됩니다. 시에 나온대로 현재는 한없이 우울할 뿐입니다. 공감을 주고, '모두 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라고 위로를 주지만 희망은 현재에 없고 오직 미래에만 있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의 가치를 망각한채, 막연하게 보다 나은 미래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미래가 잘 보이지 않으면, 과거를 뒤집니다. 헛된 과거의 영욕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과거에 괴로워하고, 현재에 불충실함으로써 미래까지 망치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의 자각은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종용합니다. 우리는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헛된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무거운 쇠사슬을 묶인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현재에 고정되지 않고, 미래와 과거만을 향해 튀는 공과도 같습니다. 현재에 머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저 멀리 떨어진 채 현재라는 시간의 사진을 찍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시간 중 일부만을 살아가는데 그치고 맙니다. 대부분의 많은 시간은 미래와 과거속에 묻혀 그냥 흘러가고 버려집니다. 아둥바둥거렸던 그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정작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1분 1초 치열하게 살려는 욕망은 인간에게는 부질없는 신기루일뿐인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급해질수록 오히려 우리의 시간은 빈곤해집니다. 강박관념은 현재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강박은 오직 미래만을 보게 만듭니다.
"낙관론자들은 내일이 낙원이다. 비관론자들은 어제가 낙원이었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이 말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혜로운 이에게 낙원은 바로 오늘입니다. 어떠한 일도 과거속에서 일어날 수 없고, 미래속에서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현재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시간입니다. 나의 온 인생이 집약된 바로 이 순간만이 실존하는 시간입니다. "어제의 일로 오늘을 소모해서는 안된다"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격언은 어제일을 오늘로 미루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일로 오늘 고통을 받아서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늘이 나의 역사에 있어 최고의 날입니다. 비록 어제는 그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말입니다. 오늘을 나의 최고의 날로 만들면, 내일 역시 최고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