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장재용
  • 조회 수 1040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20년 9월 8일 18시 39분 등록

잔디밭 익어가는 수박을 위한 변증법

 

어느 날, 늦은 저녁을 먹은 뒤 물이 많은 수박을 한입 베어 먹었다. 유난히 청량하게 바삭거렸다. 입속엔 붉고 맑은 물이 넘친다. 넘친 물이 침과 함께 입가로 한 줄기 나왔다. 급하게 얼굴을 들어 올리지만, 닦지 않는다. 씨를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빨간 수박에서 까만 수박씨를 발라내고 물 먹은 휴지에 뱉는다. 투득, 콩처럼 쪼개진 반쯤 씹힌 서너 개와 도마뱀 눈알처럼 까만 두어 개. 그날따라 왜 그 수박씨를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이튿날, 검은색 직사각형 모종 대야에 어제 모아놓은 수박씨를 손가락 한 마디 깊이로 쑤셔 넣고 흙을 덮었다. 순전히 심심했다. 외롭다 하기엔 내 마음은 천진했고 허전함이라 하기엔 내 양팔은 쳐지지 않았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떤 목적이 나를 이끌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입에서 걸러진 수박씨를 흙에다 심었다. 마침 엊그제 이미 오래전에 심은 식물 모종을 갈아엎은 탓에 흙은 막 깨어났던 참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히려 다라이를 낑낑대고 옮겼다. 햇살이 강하다 싶으면 응달로 옮겼다. 몇 번을 이리저리 옮기다 귀찮아서 양지바른 곳에 그냥 두었다. 소식은 한참 동안 없었다.

 

싹이 돋아난 건 이젠 틀렸다 싶을 때였다. 한번 육중한 흙을 밀고 올라온 연두의 싹은 거침없었다. 흙의 압력에서 벗어난 싹은 금세 줄기가 되어 모종 다라이를 넘어섰다. 불퇴전을 감행하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이 잔디밭을 기어 다니며 돌진하더니 어느 날, 줄기 중간에서 혹처럼 수박 열매가 맺혔다. 새로운 가족이 된 듯 우리는 환호했다. 연두의 콩처럼 조그맣던 수박 열매는 삼 일이 지나 수박 특유의 세로줄이 희미하게 나타났고 일주일 지나더니 탁구공만큼 커졌다. 혀를 내둘렀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제법 수박다운 검은 세로줄을 세기고 야구공이 되었다. 지금 마당에서 금이야 옥이야 커가고 있는 저 수박을 훗날 배를 갈라 먹을 수 있을 것인가, 먹지 않으면 섞을 텐데, 섞게 두느니 먹어야 할까? 그때 가서 생각해볼 일이지만, 태어나고 커가고 산다는 건 그야말로 환희다.

 

수박씨가 싹으로 되더니 싹이 줄기가 되었고 줄기에서 열매가 열렸다. 내가 경이로움으로 수박이 커가는 모습을 확인하듯 꼭 그와 같이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말해 줄 수 있을 텐가, 내가 다 전개되고 나면, 삶을 다 살 게 되면,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나는 수박을 보던 중에 궁금한 것이다. 나의 지금은 미래의 나를 위한 필연적 계기인가? 그저 허송일까? 쇼펜하우어처럼 보이지 않는 의지라는 게 있어서 수박도 나도 그 의지에 따라 살아지게 되는 건가? 수박씨를 딛고 싹이 되는 것처럼 나를 딛고 일어선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나를 관망할 수 없다. 그것은 언어와 사유 너머에 있는 것이어서 지금의 나는 다가갈 수 없을 것 같다. 진리라는 것이 있어서 나의 생멸 전체를 안다고 그 진리가 말할 수 있다면 그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누구인가. 나는 플라톤이 말한 미메시스 mimesis를 믿지 않는다. 그 어딘가에 이상세계 eidos가 있어서 내가 한낱 그 에이도스의 모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일찌감치 수박과 같이 나를 보는 누군가가 나타나 그리 살지 마라 했을 테다. 마찬가지로 무수한 들이 그려내는 이 세계 전체를 그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 너머의 것들을 사유하려 했던 무리한 시도는 플라톤에서 멈추지 않았지만, 인간 너머의 인간이 없듯 나를 넘어 나를 보는 내가 없는 건 확실해 보인다.

 

부디 잘 익어라. 지나는 개에게 먹힐지, 애꿎은 고양이에게 줄기가 뽑혀 나갈지, 마당에서 체조 연습하는 딸래미 뒷걸음질에 으스러질지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익어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마라. 이상적인 수박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이미 알지 않느냐. 쏟아지는 열대의 비를 핏물처럼 빨아먹고 자라라. 나는, 한때 이상적인 를 꿈꾼 적이 있다. 너를 보면 그런 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고맙다, 나도 너처럼 지난날도, 앞으로의 날들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지금의 정신으로 살겠다. 다른 삶을 곁눈질 하지 않겠다.



IP *.161.53.174

프로필 이미지
2020.09.10 07:42:48 *.52.38.80

'그것이 거기에 있다'  ^^

프로필 이미지
2020.09.16 15:45:44 *.161.53.174

'이것'으로부터 '그것'으로 가는 게 이리 어려울 줄 몰랐네요.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616 오파티야(Opatija)에서 온 편지 file [4] 이한숙 2009.08.11 4746
3615 기회를 잃기 전에 다시 한 번 [4] 게시판 관리자 2009.08.12 2958
3614 위험 너머를 보자. file [15] 김용규 2009.08.13 3181
3613 스스로 그어 둔 절제의 금 [3] 구본형 2009.08.14 3095
3612 작은 기적 [2] 신종윤 2009.08.17 2843
3611 인터뷰: 슬로베니아 기사 스탕코는 천만다행! file 단경(소은) 2009.08.18 3540
3610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있는 존재 file [2] 게시판 관리자 2009.08.19 2993
3609 나는 무엇으로 상징될 수 있을까? file [4] 김용규 2009.08.20 4768
3608 인생이 당신에게 요구한 것 file [1] 부지깽이 2009.08.21 3290
3607 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안될까? [1] 신종윤 2009.08.24 3373
3606 독자 여러분들께 작별 인사를 보내며 [6] 단경(소은) 2009.08.25 3076
3605 위대한 승리자 앤. 2009.08.26 2833
3604 그대가 외로움이라 부르는 것에 대하여 file [3] 김용규 2009.08.27 2982
3603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file [3] 부지깽이 2009.08.28 3001
3602 위험이 나를 깨운다 신종윤 2009.08.31 2885
3601 책에 자신을 비추어보라(鑒於書) [4] 승완 2009.09.01 2887
3600 1호봉의 꿈 [2] 앤. 2009.09.02 3090
3599 모래알을 뭉쳐 기둥을 세우려는 시도 file 김용규 2009.09.03 3152
3598 클레오파트라 - 아름다움의 연출에 대하여 file [1] 부지깽이 2009.09.04 3150
3597 좋은 직업의 딜레마 [1] 신종윤 2009.09.07 2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