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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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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2일 18시 18분 등록

월급쟁이 무기력

 

그건 저의 일이 아닙니다. 보내 드린 메일 보셨지요? 그건 그쪽 부서에서 담당하는 일이니, 모레까지 작성해서 주세요. 작성 내용의 아웃라인에 관해 저는 모릅니다. 다큐멘테이션 포맷, 템플릿, 차트 테이블 정해진 건 없어요. 저는 관련 내용을 알려드리고 취합하라는 지시만 받았습니다. 다만 제가 두 번 일하지 않게만 해주세요. 그 외에 전달받은 바 없어서 더는 답변 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따로 연락하는 일이 없도록 기한은 꼭 지켜주세요.’

 

월급쟁이, 그들은 자신을 덮쳐오는 파괴적 미래가 두렵다. 당장의 어려움과 번거로움, 지루함을 벗어나기 급급하다. 자기 스스로 어떠한 결정도 내려 본 적 없고 주변을 명령으로 둘러싸이도록 만들어 놓고 편안해한다. 항상 극단적으로 조심한다. 자발적 제안조차 원하지 않아서 늘 누군가 지시해 주기를 바란다. 찬란한 오후의 햇빛이 그들의 구부러진 등판을 비출 땐 더 서글프다.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눈은 누군가의 명령을 잘 따르지 못한 자책 같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완충시킬 힘이 없다. 자신에게 유리한 삶으로 이끌어 갈 방법이라곤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 눈치뿐인데 자기계발서를 향한 발작적 열광은 여기서 기인하는지 모른다. 열광의 뿌리는 뜻밖에도 좌절에서 번져 나온 냉소다. 그들이 욕하는 부류, 자신들과 다른 계급, 명령하는 자 (임원, 사장, 부자 등)의 소비, 지식, 문화적 수준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뱁새적 상황인식, 그런데도 그들을 추종하는 배반적 자기투사의 냉소.

 

그리하여 명령하는 자가 그들에게 명령하면 자신의 성격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성심성의의 수행으로 옮기고 틀림없이 해낸다. 그다음 모든 일은 경로의존성에 따라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 편차는 무의미하다. 좌절, 냉소, 열광, 명령, 복종마치 나치즘에 혼이 나간 독일 대중과 같은 경로를 따르는 것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아이히만이 복종하듯 대부분의 사람이 월급쟁이의 이 야만적 경로를 자신과 무관하게 따라간다. 이것이 월급쟁이의 가장 깊숙한 무기력이다.

 

지시받는 자의 무기력, 명령에 따라야 하는 자들의 무력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따르는 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명령하는 자의 명령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명령하는 자의 존재는 누가 승인하는가? 명령하는 자를 명령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 물건을 파느냐에 목숨 거는가? 물신은 물신의 존재를 누구로부터 부여받았는가? 묻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내 직장 동료에까지 퍼진 뿌리 깊은 무기력은 노예성이었다. 대부분의 월급쟁이는 누군가로부터 철저하게 가두어진 노예성으로 신음한다. 노예성의 반대는 자유로움일 텐데 역설적으로 전 세계인이 자유롭다고 자부하는 오늘, 자유는 퇴보하고 불행은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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