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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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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3일 18시 28분 등록

산과의 첫 만남

 

덜컥 산에 관해 쓰겠다고 선언한 뒤 며칠을 자책했더랬다. 산을 조금 다녔다고 산을 아는 체 하려는 마음이 앞선 것 같다, 산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던 차에 스무 살 이후로 내 따라다닌 산 말고는 또 내가 쓸 수 있는 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라는 말은 합당하다. 나보단 멀고 보다는 가까운 게 이라면 산은 사이, 그 언저리에 늘 있었으니(‘에는 항상 이 있어 운명을 같이한다) 에 있는 그 무엇보다 나와 가까웠다고 소심하게 주장하는 바, 그 처음은 이랬다.

 

꿈이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까지 가고 싶었다. 대학교 1학년, 나는 전공 책보다 산바람이 좋았다.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온 팔이 반짝반짝 저려 와도, 풀풀 날리는 마른 먼지를 흠뻑 마셔도 산길을 걷는 건 나에게 뻑 가는 즐거움이었다. 그 시작은 친구 손에 이끌려 찾았던 산악회가 화근이었다. 그곳은 새내기를 향한 호들갑스런 환영, 왁자지껄한 캠퍼스 분위기와 동떨어진 심각한 아웃사이더들의 공간이었다. 여느 동아리에 만연하던 화사함과 웃음은 없었다. 동아리 방이라는 곳은 사방 벽에 걸린 날 선 도끼와 치렁치렁 매달린 알 수 없는 로프들로 둘러싸인 옛날 푸줏간의 그것이 아니던가. 충격적인 칙칙함이라 말할 수밖에.

 

무뚝뚝한 선배의 성의 없는 인사는 그곳에 들어섬과 동시에 일었던 호기심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들이 쏘아대는 매서운 눈빛은 한눈에 나를 읽어 내리고 마리라는 의지가 들어 차 있었다. 한 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들은 이내 제 하던 일을 다시 했고 그리하여 나는 적막 속에 한동안을 앉아 있게 되었다. 쭈뼛쭈뼛 눈알을 굴리니 도끼가 번쩍거리는 벽에 어지럽게 걸린 저 로프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쇠 덩어리들이 나를 쏘아 본다. 조용히 손은 모아지고, 벽면 360도를 스타카토로 둘러본 뒤 주눅 든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순간, 떨어지던 시선의 두 배 속도로 고개를 들어 사진 하나를 보았다. 모두가 나를 노려보는 중에 유일하게 따뜻한 눈길을 건네는 사진이 있었다. 벽면 구석에 자욱한 먼지를 덮어쓰고 수천 년간 주인을 기다려 온 듯한 사진 한 장, 그것과 나 사이에 스토리가 훅하고 들어왔다. 사진과 튀었던 스파크를 아직 기억한다. 선배들은 나를 힐끗 보았고 나는 멍하니 벽만 응시했다. 자세히 보았다.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머리 위로 한참 높이 올라간 빨간 배낭을 멨다. 만년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던 두 사람은 잠시 멈춰 서서 뭔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급박해 보이지만 사진 속 그들은 손을 슬며시 맞잡으려 하는 순간에 멈추어 있다. 박제된 그 상황에서 그들은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사진은 영상이 되어 나에게 말을 했다. 그들의견고한 고독감과 함께 거친 호흡이 귀청에 어른거렸다. 사진 속 설산, 위태한 벽을 오르는 그들은 사진에서 튀어나와 방안 천정 가득 나와 3D로 마주했다. 그 사진 한 장은 대학 1학년의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극한의 추위를 잠재우는 저 부동의 눈빛, 사람들은 저 눈빛을 하고 풀 한 포기 품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설벽에서 인간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렇게 서로를 살피고 같이 하고 있었다. 산은 저렇게 희구나. 말이 없는 그들의 생리가 지금 내 앞에서 째려보며 인사한 저들의 시큰둥함의 진의였다. 어쩌면 사진 속 저들이 지금 나를 노려본 사람인지 모른다. 사지(死地)를 함께 건너온 무뚝뚝한 산재이들에겐 그리 긴 말이 필요하지 않을 테고, 산을 내려와서는 서로가 그리워 찾고, 찾지 못해 볼 수 없다면 수화기 너머의 표정을 헤아리는 일로 사무침을 대신하는 그런 류의 사람들. 그들이 나를 모멸 차게 쏘아본 건 자신과 생명을 나누고 그 사무침을 담보할 가슴을 지닌 놈인지를 판단해 보려는 걸 게다.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산이 떨려왔다. 이후 우연히 길가 서점에 들러 생각 없이 넘기는 잡지에 흰 산이라도 있을라치면 사정없이 뛰는 가슴에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내 젊음은 내 등에 착 달라붙은 배낭이 되었다. (졸작 딴짓해도 괜찮아내용 일부를 인용)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렇게 어찌하여 나는 훗날 히말라야에 갔고 또 어찌하여 세계최고봉(Mt. Everest, 8,848m)에 올랐다. 지난 일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글들은 주로 내 두 발로 직접 올랐던 산에 관해 말하여질 터인데 내 첫 번째 졸작에서도 빌려 오고 그간 산악 잡지 객원기자 노릇을 하며 게재했던 글도 소개할 작정이다. (다음 주에 계속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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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4 17:48:23 *.133.149.97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많이 기대되고  궁금하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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