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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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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0일 17시 36분 등록

머리칼이 바람에 엉클어지며 산 속에서

 

산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멀리서 보면 새로 빨아 다려놓은 욧잇 같은화강암을 오를 때, 내 몸은 기뻐했다. 주름살 같은 바위 표면에 손끝을 걸고 어쩌면 미켈란젤로를 즐겁게 했을지도 모를 그런 자세로 오른다. 수직의 빙벽 한가운데 제대로 먹힌 피켈(/설벽 등반용 기구, 얼음도끼)의 샤프트(피켈의 손잡이) 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아이젠이 얼음 짝에 먹혀들 때, 나는 환장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한 달도 좋고 두 달도 좋아라 이 땅의 마루금 누비는 일에 빠져 들었다.

 

불안한 밤이 오면 배낭을 둘러맸다. 침낭 위로 쏟아지는 별과 나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았다. 별빛에 가슴이 떨렸고 바위 봉우리 끝에 희미한 텐트 불빛을 마음속 깊이 흠향했다. 엄청난 중량에도 창공에 부각된 화강암 등허리 위를 기어오를 때 흡사 잠들어 있는 거대한 괴물의 등딱지 위를 걷고 있는 착각이 좋았다. 머리칼이 바람에 엉클어지며 산 속에 있다는 것, 그것은 내 몸의 온갖 성감대를 죄다 건드리고 다녔다. 산이 온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여름 능선 길, 굵은 비 맞으며 선배는 후배의 체온을 확인하고 한 겨울 한파를 뜨거운 라면 국물과 힘찬 산가 한 자락으로 날려 버렸다. 추운 겨울, 선배는 자신의 침낭을 후배에게 덮어 주었고 후배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사이 얼어붙은 선배를 위해 김이 나는 밥을 지었다. 힘들 때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고 즐거울 땐 서로를 기꺼워했다. 산에서, 같이 하는 사람들의 마음결이 내 가슴에 무찔러 들어왔다.

 

나는 흰 산엘 가고 싶었다. 극한의 흰 산, 여전히 시간은 느리고 수천 년 전에 일었던 마른 바람이 어슬렁대며 불려 가는 곳, 얼음 주름살이 금빛으로 빛나는 곳. 인간은 신을 사랑하고 신은 인간을 보우하여 신과 인간이 한대 어울려 바람을 타고 달리는 곳. 신의 이야기가 새겨진 오색 깃발 ‘룽다(1), 그 깃발에 출렁이는 흰 산을 보고 싶었다. 인간의 땅이 아닌 곳에 인간의 모습으로 들어서고 싶었다. 나를 그렇게 쏘아보던 그러나, 가슴을 나눈 그들과 함께. 흰 산에 대한 욕망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부터 그 곳을 그리도 가고 싶어 한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 하나가 있다.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헉헉대며 크고 가파른 흰 산을 오르던 모습을 TV에서 보았다. (당시 KBS 일요스페셜, ‘마나슬루를 가다’로 기억하고 있다) 카메라 앵글 저편에는 질리도록 시퍼런 하늘, 수직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절벽,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선 듯한 날 선 준봉들, 그 속에 줄지어 개미처럼 오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브라운관은 포착해 나갔다. 하늘과, 절벽과 설산의 준봉은 그 사람들을 위해 둘러쳐진 광배였다. 먼 하늘에서부터 심호흡하며 절벽에 선 사람이 줌인 되는 순간, 내 눈 앞에서 그들은 쿵 쿵 쿵 소리를 내며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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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룽다 Lungda (‘타르초’ Tharchog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진 티벳불교 경전을 깨알같이 적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 오색으로 매어 놓은 깃발이다. 티벳 사람들은 바람을 타고 경전의 경구가 온 세상에 퍼진다고 믿고 있다. 히말라야,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모든 곳에 룽다가 휘날린다. 세계최고봉 정상에도 어김없다.

 

모든 게 멋있어 보이는 때였지만 그 멋있음은 유난했다. 치기 어린 마음 한 편에 내 모습을 설산에 오르는 저 사람들과 오버랩 시키고 꽉 쥔 손에 흥건히 고인 땀을 닦았고 자세를 고쳐 앉아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그 곳에 선 미물의 사람들이 왜 그리 커 보였는지 나는 모른다. 히말라야(2)에 대한 동경이 그때부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 흰 산의 기억은 그때부터다. 그 곳은 만년도 더 된 눈이 산을 덮고 있고 수천 년 전부터 녹아내리는 회색의 빙하가 흐르고 있었다. 1억년 동안 검은 벽이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시간이 더 이상 그 곳을 지배하지 못하는 땅이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침묵이 사는 곳. 마른 바람이 휑하니 분다. 그 바람은 또 언제 적 바람이던가.

 

산들이 희고 거칠수록 내 가슴은 요동쳤다. 선홍 빛 잇몸을 가진 젊은 날, 나는 내 젊음의 말 하나를 떠올렸다. 나지막이 발음해 보는, ‘히말라야’. 그것은 내 안에서 솟아났고 입 속에 머금어 조용히 반복하니 이내 폭풍이 되어 다가왔다. 순백의 만년설과 눈부신 설경에서 인간이 뱉어내는 메시지는 무력했다. 사유와 이념이 관통할 수 없는 곳이었고 모든 것들은 침묵에 동참했다. 나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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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히말라야(himalaya)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뜻하는 hima와 집, 저장을 의미하는 alaya의 합성어다. 눈을 저장한 곳, 옛 사람들은 설장산(雪藏山)이라 불렀다. 아주 먼 옛날 바다에 떠다니던 판게아에서 인도판 대륙이 아시아판 대륙을 만나며 두 대륙이 맞닿은 부분이 융기했고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 됐다. 6~8천 미터급 고봉들이 동서로 무려 2,500km에 버티고 있어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다. 기류조차 이 높은 산맥을 넘지 못하는데 사람은 넘는다. 히말라야 산맥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는 Everest(8,84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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