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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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많은 역할을 안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에겐 몇 가지의 역할부터 어떤 사람에겐 수 십 가지의 역할이 주어진다. 때로는 너무나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역할도 있고, 너무나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역할도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은 한없이 늘어가고 있다. 요즘엔 역할이 중요하다. 특히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 역할들에 의해서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역할이라도 명함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역할들의 목록은 상대방을 기죽이게 만든다.
명함이나 이력서를 가득 메우는 역할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잘나가는 사람 같아 부러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의 습성 상 많은 역할은 역시 부담스럽다. 나의 삶의 방식은 대체로 선택과 집중 아니던가.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좀 덜어버리려고 노력한다. 역할도 그렇다. 역할이 많아지면, 그만큼 신경써야 될 일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면 어느 하나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고 살고자 하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잘 해내고 있는지 되짚어보고 싶어진다.
변경연 연구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나 직업으로 인해 부여된 것이 아닌 역할 중에 내가 가장 잘 선택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연구원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연구원이니 당연히 연구를 열심히 해야겠지. 연구대상은 물론 나 자신이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탐구와 실험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사부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그것을 매일 실천하려 노력한다. 내가 하는 만큼 얻어갈 것이 무지 많다. 좀 더 열심히 그냥 달리는 것이다. 혼자도 아니고, 아내와 함께, 그리고 9명의 형님 누님과 함께, 그리고 부지깽이를 든 멋쟁이 사부님과 함께 달리지 않는가? 이런 신나는 역할이 그리 많지 않다. 나중에 후회말고 더 달려야겠다. 더 질러야겠다.
(예비)아빠: 이제 몇 달 안 남았다. 아직은 예비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몸이 무거워진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최대한 많이 하기. 잠자리에 들기 전 가끔 아내의 배에 손을 얹고 책 읽어주기. 그리고 냉장고 문에 붙은 초음파 사진을 보며 가끔씩 미소지어주기. 아, 그리고 이번 주 부터는 이름 지어주기에 돌입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나의 어휘력의 빈곤함이 한스럽다. 그래서 사전, 옥편과 시집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다. 아가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기에.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간직할 선물이기에 준비기간이 좀 길어질 것 같다.
친구: 난 친구들과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냥 내 성격이다. 친구들 뿐만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와 연락이 없으면, 잘 지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다. 친구들은 항상 그게 불만인가보다. 전화를 하면 대부분 "연락 좀 해. 임마"가 첫마디다. 그래도 그런 무심한 나를 잊지 않고 챙겨준다. 가끔 난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생각해본다. 결혼식하면 가서 일 거들고 축의금 내는 존재? 아니면 목숨 같은 우정으로 엮인 존재? 그냥 가끔 심심하면 생각나는 존재? 왠지 물어보고 싶지만,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저 누가 그들에게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중 한 명이길 바랄 뿐이다.
아들: 언제나 아쉬움 뿐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자식의 마음도 그렇지 않겠는가?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가는 방향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100% 이해시킬 수 없어 안타깝다.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할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 때문에 활짝 웃으실 날을 기약할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 돈을 많이 벌어드려야 할까? 성공해서 이름 석 자를 날려야 할까? 그저 가끔씩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한 마디 해야할까보다.
사위: 장인어른, 장모님은 날 정말 이뻐 하신다. 언제나 "우리사위가 최고다"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난 그렇게 이쁨 받을 짓을 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최고의 사위로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하고 있는데, 괜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많이 죄송하다. 처가부모님도 부모님이기 때문인지, 마음과 표현이 따로 논다. 그저 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바랄 뿐이다. 이 사위가 진짜 최고의 사위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남편: 난 괜찮은 남편일까?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남자라고 집안일을 소홀히 하거나, 가정에서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힘이 더 좋으니 더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 대부분은 좋은 친구로, 때로는 보호자로, 때로는 오빠같이, 때로는 동생같이 팔색조와 같은 얼굴로 아내 곁에 함께 하려 노력한다. 물론 좀 더 나긋나긋하고 따뜻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가끔씩 생각과는 다른 표현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코치: 내 삶이 너무나 답답했었다. 정말 미치도록 답답했었다. 그래서 그러한 삶에서 탈출할 방법, 정말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 방법을 찾았다. 찾다보니 안개가 살짝 걷히며 희미한 길이 보였다. 아직은 시야가 탁 트이지 않은 그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내 뒤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난 그들의 손을 잠시 잡아주기로 했다. 내가 가는 방향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도 길이 있다고 그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고마워하고, 어떤 사람은 뒷걸음질 친다.
이 일은 그 누구보다 먼저 날 위한 일이다. 나를 알게 하고,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 난 그 일이 좋다. 슬슬 일과 삶의 구분이 사라져가고 있다. 난 그 점이 좋다. 밥 벌어 먹기 위해서만 일하고 싶지는 않다. 일하면서 놀고 싶고, 놀면서 일하고 싶고, 일하면서 살고 싶고, 살면서 일하고 싶다.
나: 언제나 가장 어렵다. 무엇보다 나라는 역할에 맞추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이르러야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고생 끝에 답 비슷한 것을 찾았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나 답게 살려고 노력중이다. 나 자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가장 쉽게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난 "근무 중 이상 무"를 외친다.
나에게 주어진 이 역할들이 때로는 날 행복하게 하고, 때로는 날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없으면, 난 이세상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것들 또한 나의 일부분으로 안고 그 역할들에 충실해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아무리 줄이려고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안고 가는 것들이다. 인간관계가 하나 맺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수많은 역할이 생기기도 한다. 결혼을 하면 내가 불러야할 호칭과 내가 들어야할 호칭도 몇 개가 생기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아기를 낳으면 나에겐 저절로 삼촌이라는 역할이 생기기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에겐 손자의 역할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역할의 가방에는 수많은 가면들이 시시때때로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역할, 이 가면들은 그저 나의 한 부분인가보다.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면서 가면놀이를 즐긴다. 하지만, 그 어떠한 가면을 쓰던 그 뒤에 있는 사람은 진짜 나 이기를 바란다. 나의 가면 가방에는 '나'라는 가면은 없기를 바란다. 진짜 나는 그저 가면을 쓰지 않은 쌩얼을 하고 있을 것이다.
IP *.34.17.28
명함이나 이력서를 가득 메우는 역할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잘나가는 사람 같아 부러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의 습성 상 많은 역할은 역시 부담스럽다. 나의 삶의 방식은 대체로 선택과 집중 아니던가.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좀 덜어버리려고 노력한다. 역할도 그렇다. 역할이 많아지면, 그만큼 신경써야 될 일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면 어느 하나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최소한의 역할만을 맡고 살고자 하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잘 해내고 있는지 되짚어보고 싶어진다.
변경연 연구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나 직업으로 인해 부여된 것이 아닌 역할 중에 내가 가장 잘 선택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연구원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연구원이니 당연히 연구를 열심히 해야겠지. 연구대상은 물론 나 자신이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탐구와 실험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사부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그것을 매일 실천하려 노력한다. 내가 하는 만큼 얻어갈 것이 무지 많다. 좀 더 열심히 그냥 달리는 것이다. 혼자도 아니고, 아내와 함께, 그리고 9명의 형님 누님과 함께, 그리고 부지깽이를 든 멋쟁이 사부님과 함께 달리지 않는가? 이런 신나는 역할이 그리 많지 않다. 나중에 후회말고 더 달려야겠다. 더 질러야겠다.
(예비)아빠: 이제 몇 달 안 남았다. 아직은 예비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몸이 무거워진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최대한 많이 하기. 잠자리에 들기 전 가끔 아내의 배에 손을 얹고 책 읽어주기. 그리고 냉장고 문에 붙은 초음파 사진을 보며 가끔씩 미소지어주기. 아, 그리고 이번 주 부터는 이름 지어주기에 돌입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나의 어휘력의 빈곤함이 한스럽다. 그래서 사전, 옥편과 시집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다. 아가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기에.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간직할 선물이기에 준비기간이 좀 길어질 것 같다.
친구: 난 친구들과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그냥 내 성격이다. 친구들 뿐만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와 연락이 없으면, 잘 지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다. 친구들은 항상 그게 불만인가보다. 전화를 하면 대부분 "연락 좀 해. 임마"가 첫마디다. 그래도 그런 무심한 나를 잊지 않고 챙겨준다. 가끔 난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생각해본다. 결혼식하면 가서 일 거들고 축의금 내는 존재? 아니면 목숨 같은 우정으로 엮인 존재? 그냥 가끔 심심하면 생각나는 존재? 왠지 물어보고 싶지만,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저 누가 그들에게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중 한 명이길 바랄 뿐이다.
아들: 언제나 아쉬움 뿐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자식의 마음도 그렇지 않겠는가?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가는 방향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100% 이해시킬 수 없어 안타깝다.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할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 때문에 활짝 웃으실 날을 기약할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 돈을 많이 벌어드려야 할까? 성공해서 이름 석 자를 날려야 할까? 그저 가끔씩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한 마디 해야할까보다.
사위: 장인어른, 장모님은 날 정말 이뻐 하신다. 언제나 "우리사위가 최고다"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난 그렇게 이쁨 받을 짓을 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최고의 사위로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하고 있는데, 괜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많이 죄송하다. 처가부모님도 부모님이기 때문인지, 마음과 표현이 따로 논다. 그저 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바랄 뿐이다. 이 사위가 진짜 최고의 사위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남편: 난 괜찮은 남편일까?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남자라고 집안일을 소홀히 하거나, 가정에서 어떠한 특권도 누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힘이 더 좋으니 더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 대부분은 좋은 친구로, 때로는 보호자로, 때로는 오빠같이, 때로는 동생같이 팔색조와 같은 얼굴로 아내 곁에 함께 하려 노력한다. 물론 좀 더 나긋나긋하고 따뜻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가끔씩 생각과는 다른 표현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코치: 내 삶이 너무나 답답했었다. 정말 미치도록 답답했었다. 그래서 그러한 삶에서 탈출할 방법, 정말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 방법을 찾았다. 찾다보니 안개가 살짝 걷히며 희미한 길이 보였다. 아직은 시야가 탁 트이지 않은 그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내 뒤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난 그들의 손을 잠시 잡아주기로 했다. 내가 가는 방향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도 길이 있다고 그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고마워하고, 어떤 사람은 뒷걸음질 친다.
이 일은 그 누구보다 먼저 날 위한 일이다. 나를 알게 하고,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 난 그 일이 좋다. 슬슬 일과 삶의 구분이 사라져가고 있다. 난 그 점이 좋다. 밥 벌어 먹기 위해서만 일하고 싶지는 않다. 일하면서 놀고 싶고, 놀면서 일하고 싶고, 일하면서 살고 싶고, 살면서 일하고 싶다.
나: 언제나 가장 어렵다. 무엇보다 나라는 역할에 맞추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이르러야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고생 끝에 답 비슷한 것을 찾았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나 답게 살려고 노력중이다. 나 자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가장 쉽게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난 "근무 중 이상 무"를 외친다.
나에게 주어진 이 역할들이 때로는 날 행복하게 하고, 때로는 날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없으면, 난 이세상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것들 또한 나의 일부분으로 안고 그 역할들에 충실해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아무리 줄이려고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안고 가는 것들이다. 인간관계가 하나 맺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수많은 역할이 생기기도 한다. 결혼을 하면 내가 불러야할 호칭과 내가 들어야할 호칭도 몇 개가 생기는지 모르겠다. 동생이 아기를 낳으면 나에겐 저절로 삼촌이라는 역할이 생기기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에겐 손자의 역할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역할의 가방에는 수많은 가면들이 시시때때로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역할, 이 가면들은 그저 나의 한 부분인가보다.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면서 가면놀이를 즐긴다. 하지만, 그 어떠한 가면을 쓰던 그 뒤에 있는 사람은 진짜 나 이기를 바란다. 나의 가면 가방에는 '나'라는 가면은 없기를 바란다. 진짜 나는 그저 가면을 쓰지 않은 쌩얼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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