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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0일 21시 03분 등록

난 서울 토박이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 태생에겐 불쌍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어릴 때 자라면서 자연과 접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안타깝지만 이건 비극이다. 자연을 느끼며 자라지 못해선지, 자연을 예찬하는 글을 읽다보면 글쓴이가 의도한 감흥과 떨림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슬픈 일이다.

이런 내게 그나마 자연을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고마운 취미가 있으니, 자전거 타기가 바로 그것이다.

어려서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을 알았지만, 철이 들면서 한 동안 자전거를 잊고 살았다. 자전거를 다시 타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TV에서 영국의 여성 총리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비 오는 거리에서 비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신선해 보였다. 멋져 보였다. 교통체증도 피하고 운동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나도 자전거 출퇴근을 한번 해 봐?’ 난 원래 자동차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서울의 교통 체증은 날로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 체증에 걸려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 안에 갇혀 있는 건 지옥에 다름 아니다. 그 때 마침 한강변에 자전거 도로가 생겼다는 뉴스를 들은 지 얼마 안 된 터였다.

자전거를 한대 구입했다. 난 자동차, 옷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은 많지 않은 편인데, 유독 운동 장비에 대해서는 욕심이 많다. 100만원대 고가(?)의 MTB를 구입하고 신반포에서 직장이 있던 잠실까지 자전거 출퇴근을 시도했다. 일요일에 시운전을 해봤다. 13.5키로, 35분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렇게 자전거 출퇴근을 시작한 첫 몇 달간은 내 출퇴근 길 중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집에서 나와 5분 정도면 자전거 도로에 들어선다. 자전거 도로는 잘 뚫려 있다. 그 당시에는 자전거 출퇴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지금은 많이 늘었단다) 출근 시간에는 자전거 도로가 아주 한산했다. 아침 운동하는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이 무리를 지어 자전거를 타거나, 가끔 학생인 듯한 젊은이들이 아침운동 하는 걸 제외하면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른 아침에 아무도 없는 그 한적한 길을 그야말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상쾌함을 생각해보라. 흔들리는 바람소리, 찰랑대는 물결, 가끔 들리는 동호회원들의 환호 소리. 바람에 날리는 머릿결,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들, 철따라 변하는 꽃들... 출근길에 어스름을 뚫고 해가 솟아오르는 광경, 여름날 퇴근할 때 이글이글 끓는 해가 한강 물속으로 풍덩 빠지는 모습은 장관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 입을 벌린 채 달리면서 맛바람을 받으면, 바람이 내 혓바닥을 타고 목젖을 살랑살랑 건드리며, 기도를 통해서 허파꽈리 끝까지, 위속을 지나 작은창자와 대장에까지 들어가는 듯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가슴이 뻥 뚫리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소리지르고 싶고 달리고 싶어진다. 달리고 싶으면 속도를 낸다. 자전거 도로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지만 높낮이가 어느 정도 있어서, 내리막길에서 탄력을 받으면 시속 50키로 넘게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렇게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쌩쌩 달리면 허벅지가 뻐근해 옴을 느낀다. 이 뻐근한 쾌감이 자전거를 타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허벅지 근육, 무릎 관절 양 옆의 근육, 엉덩이, 등뼈 양 옆과 어깨쭉지의 팽팽하게 긴장한 근육들 사이사이에서 땀이 배어 나오면서, 솟아나는 엔돌핀이 가슴으로 머리로 퍼져 나간다.

아! 상쾌하다. 내가 서울 시민인 게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럽다. 한강이 우리 옆에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이 축복받은 환경을 왜 진작 모르고 지냈던가? 이 좋은 걸 만들어 놓은 공무원은 아주 창조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런 사람을 표창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또 자전거 도로를 더 확충하고 주변 단장도 더 잘하지 않겠는가?

매일 매일 출근길이 즐거웠다. 행복했다.
계절 따라 바뀌는 자연도 감상할 수 있었다. 한강 둔치 경사면은 곳곳이 풀밭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 풀밭 여기저기에 꽃들이 피어났다. 난 식물들 이름을 잘 모른다. 이름도 모르는 노란색, 보라색, 빨간색의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누가 그곳에 심고 가꾼 게 아니라, 어디선가 꽃씨가 날아와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내고 피운 아름다운 들꽃들이 내 눈을 즐겁게 했다.

자전거 출퇴근을 3년 동안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달라지는 자연을 즐겼다. 비오는 날에는 비옷을 입고 탔다. 비오는 날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한강에 나 혼자 있었다. 머나먼 우주 속에 혼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눈이 오는 날은 더 신났다. 첫눈이 내릴 때는 자전거를 달리면서 입을 벌려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곤 했다. 어린 시절에 하던 짓이 자전거를 타면 되살아났다. 자전거는 3년 간 많은 에피소드와 즐거움을 내 기억 속에 남겨주었다.

시간이 넉넉한 주말(그 때는 토요일 반일 근무를 할 때다) 퇴근길에는 잠실에서 여의도를 거쳐 행주대교까지 갔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다. 주말이면 반포,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는 항상 사람들로 넘쳐난다. 가족들끼리 잔디밭에 앉아 바람을 쏘이고, 연을 날리고, 드러누워 잠자고, 책 읽고,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고 뒹굴며 놀았다. 한차례 땀을 흠뻑 빼고 돌아오는 길에 여의도쯤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 캔 마시는 즐거움은 또 다른 별미다.

‘자전거’ 하면 떠오르는 추억 중에는 술에 관한 추억이 많다. 자전거도 탈것이니만큼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음주운전을 한다고 해서 누가 잡겠는가? 그게 또 다른 자전거 출퇴근의 매력 아니겠나? 자전거 출퇴근 시에는 술 마시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 당시에 난 술을 많이 마시면 조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술을 많이 마셨는데, 졸음이 쏟아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새벽 1시가 넘어서 자전거를 타면서 졸다가 깨다가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다행인건 그 시간에는 자전거도로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충돌 사고의 위험은 없다는 점이다. 속도를 얼마나 냈는지 모르겠다. 밤이라서 빠르게 달리지는 않았겠지만 평소 익숙하게 다니던 길이라 아주 천천히 가지도 않았던 듯싶다. 좌우로 비칠대며 졸면서 달리다가 뭔가에 ‘쾅’ 부딪히면서 데굴데굴 굴러 땅바닥에 쳐 박혔다. 눈을 뜨고 보니 강쪽으로 쳐져있는 철제 난간에 난 거꾸로 처박혔고, 자전거는 저기 한쪽으로 나뒹굴어져 있었다. 자전거 도로가 강과 맞닿아있는 곳에는 대개 철제 난간이 쳐져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구간도 있었다. 내가 부딪힌 것은 차량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자전거도로 중앙에 박아놓은 쇠기둥이었다. 만약 철제 난간이 없는 곳이었다면 한강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한강으로 굴러 떨어졌으면...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일이다.
그런 사고를 겪고 나서 많이 취했을 때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았다. 물론 가볍게 먹고 하는 음주 운전은 계속 됐다. 그것도 흥겨운 자전거 타는 재미의 하나기 때문에...

몇 개월간 자전거 출퇴근을 하면서 그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 해 여름휴가 때는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다. 휴가를 둘로 쪼개서 한번은 4박5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구미까지, 또 한 번은 3박4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전주까지 여행하는 일정이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선 자전거 타는 게 좋았고, 내 체력을 시험해 보고픈 충동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국토순례를 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혼자서 하는 자전거 여행은 매력적이다. 차량 왕래가 많지 않은 일반 국도를 따라 다니다보면 아무도 없는 길에서 죽은 듯 조용한 적막을 경험하는 것이 좋다. 국도 변의 이름도 모르는 조그만 마을에 들러 동네 구멍가게에서 아이스케키를 하나 사서 입에 물고 땀을 식히며 구멍가게 할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할머니는 시키지도 않은 자기 동네 입구의 바위에 관한 전설을 하도 구성지게 얘기해서 1시간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여러 곳을 도로로 다니다 보니 국도와 지방도의 특성도 알게 됐다. 우리나라 국도는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동에서 서로 가는 국도는 짝수번호, 남에서 북으로 뻗은 도로는 홀수번호가 붙여져 있다. 또 번호가 적을수록 오래된 국도인데, 오래된 국도에는 갓길이 거의 없다. 갓길이 없는 국도를 자전거로 달리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자전거 여행 시에 유의해야 할 점이다.

여행 첫날 잠실을 출발해서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천 쪽으로 가는 길인데 처음에는 갓길이 널찍하더니만 한참을 가다보니 갓길이 형편없이 좁은 구간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차들도 많이 다녔고, 100Km 가까이 속도를 내고 달려서 아주 위험했다. 빨리 갓길이 잘돼 있는 도로를 찾아야 했다. 한참을 허덕이며 가다가 나들목(IC)처럼 생긴 곳을 돌아서 올라가니 갓길 폭이 1미터 이상 되는, 깨끗하게 아스팔트 포장 된 길이 나타났다. '아이고 살았다. 이렇게 좋은 길이 있는 걸 모르고... 역시 새로난 도로에는 갓길이 잘 돼 있군. 앞으로는 새로난 길만 찾아다녀야겠다.' 고 생각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달렸다. 이 도로에는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갓길 사정이 좋고 시원하게 잘 뚫려 있으면 여행일정을 단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힘도 한결 덜 들 것 같았다. 30분쯤을 신이 나서 달리고 있는데 옆을 지나가던 경찰차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저씨 지금 뭐하세요?”
“지방가는 길인데요, 자전거로...”
“아니, 어디로 가는 거냐고요!”
“구미 가는데요”
“어허, 이 양반 참...” (차에서 내린다. 내가 뭘 잘못했나?)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글쎄... 이천 조금 못 미친 곳 아닌가요?”
“아니... 보자보자 하니, 이 양반 큰일 낼 양반이구만!”
“여긴 고속도로예요! 중앙고속도로.” “나 원, 오토바이 타는 사람은 몇 명 봤지만 자전거타고 고속도로 달리는 사람은 첨 봤네!” “빨리 내려가요. 잡혀가기 전에!”
에고!! 난 자전거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던 거다.

그 이후 일정은 수첩에 남긴 메모를 옮겨본다.

7.14일(월) : 2일차
오전 5:30분 출발. 출발 직후 장호원 12키로 표지 발견.
장호원 => 수안보 => 문경새재 휴양림 도착(오후 2:00시)
문경새재를 오르던 중 11:00부터 45분간 오침.(나무그늘 아래 매트를 깔고, 시원하다.)
이동 차량에서 파는 문경새재 찰옥수수와 커피 한잔.
미국의 국립공원을 연상케 하는 통나무집들, 새소리, 물소리... 울창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나무들. 상당히 마음에 와 닿는 곳이다. 한 여름 대낮에도 시원한 이곳. 때묻지 않은 자연. 이것이 피서 아닌가?

문경새재 제3관문 주막집(오후 3:30분)
개 2마리, 졸고 있는 고양이. 수탉과 뒤를 쫓는 병아리들.
거문고, 대금, 징, 큰북의 국악음들.
막걸리 한사발과 닭죽, 파부침으로 점심을 들다.
파리들이 한적하게 날고, 궁중음악 속에 느껴지는 이 한산함.
나른한 오후. 개와 고양이의 낮잠과 느긋한 우리 음악(불교음악?)

7.15일(화) : 3일차
상주 => 서산 => 구미 => 서산 => 상주
구미에서 장과장을 만났다.
장마비가 오락가락. 아침부터 시작한 비가 상주 도착할 무렵 다시 시작되더니 거세진다.
비옷을 입고하는 싸이클링은 칙칙하고 힘이 배로 든다.
내일 오후부터는 충청도, 경기 일원에 장마비가 소강상태를 보일 것이라는 예보다.
어떻게 서울로 올라갈까. 오늘 상주, 구미 간 왕복이 약 110 - 120Km 남짓.
Minimum 100Km 잡아도 오늘 속도로 간다면 60Km/4시간으로 시간당 15Km 정도다.
문경으로 간다면 가장 짧은 거리겠지만 또 문경새재를 넘는 것이 싫어서 보은을 경유 우회하는 노선을 계획한다. 무릎에 조금 무리가 가는 것 같다.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자. 가다가 힘들면 고속버스타고 귀향하는 것도 고려해보자.

7.16일(수) : 4일차
상주 => 보은 => 청주
보은 => 청주 구간 중 506 지방도로 이용(착오)
부상 및 비로 청주에서 1박

<각주> 원래 계획했던 도로가 좀 돌아가는 것 같아 어둡기 전에 청주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름길인 듯한 506 지방도를 탔다. 그런데, 이게 실수였다.
그 지방도는 정말 갓길이 10센티도 안됐다. 더구나 관리가 안돼서 도로 양끝의 황색 선 칠한 부분이 군데군데 움푹 꺼져 있었고, 아스팔트 도로와 도로 옆의 흙바닥도 높이가 10센티 이상 차이나는 곳이 많았다. 황색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다 움푹 들어간 옆의 흙바닥으로 앞바퀴가 빠지면서 균형을 잃고 길 위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 도로는 청주까지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도로였던 것 같다. 차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교통량도 아주 많았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어둡기 전에 청주에 도착하려고 페이스를 좀 오버해서 기력이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날은 어스름이 져서 자동차들이 라이트를 켜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대는 자동차 앞의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때다. 만약 넘어질 때 내 바로 뒤에서 차가 달려왔다면 난 죽었을런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다니던 차가 내가 넘어진 순간에는 한동안 오질 않았다. 좀 더 살라는 신의 계시였던가 보다.

7.17일(목) : 청주 1박 후 고속버스 편으로 귀향


그 이듬해, 내 자전거 사랑은 철인 삼종경기 출전으로 이어졌다.
철인삼종은 수영, 자전거, 마라톤으로 구성된다. 3개의 코스가 있다.
올림픽코스(수영 1.5Km, 자전거 40Km, 마라톤 10Km), 하프 코스(수영 2Km, 자전거 100Km, 마라톤 20Km), 철인 코스(수영 3.9Km, 자전거 180Km, 마라톤 풀코스) 다.

난 올림픽코스와 하프코스에 출전해 봤다.
평소 멋있는 운동이라 생각해서 해보고픈 욕구가 있었는데, 그 해가 마흔이 되는 해였다. 나의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수영은 오랫동안 해 온 운동이라 문제가 없었고, 자전거도 1년 이상 출퇴근을 했으니 역시 그랬다. 문제는 마라톤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수영으로 길러진 폐활량과 자전거로 만들어진 하체가 받쳐 주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 됐다. 하지만 약간의 마라톤 연습은 필요했다. 세 가지 운동은 사용하는 근육이 각기 다르다. 마라톤에서 사용하는 근육은 마라톤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단련될 수 있다.

속초에서 매년 개최되는 국제 트라이애슬론 대회에 출전했다.
난 이때 MTB를 가지고 출전하는 미련함을 보였다.(아니 사실 잘 몰랐다.) MTB와 싸이클은 평균 시속이 15키로 이상 차이가 난다. MTB를 가지고 아무리 죽을 똥을 싸며 페달을 밟아도 슬슬 놀면서 가는 싸이클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속초에서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들이 싸이클을 타고 가면서, MTB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홱홱 추월해 가는 수모를 당했다. 그래서 대회가 끝난 후 난 바로 싸이클을 구입했다. 다음 경기를 대비해서...

철인삼종을 했다고 하면, ‘대단하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받기 마련이다. 헌데 실제 해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고, 그다지 힘든 것도 아닌 게 철인삼종이다.(물론 꾸준히 운동을 해온 사람의 경우다.) 실제 경기에 나가보면 50, 60대 출전 선수들도 아주 많다. 나이 많은 선수들은 경기에 출전하는 자세가 젊은 선수들과 좀 다르다. 중장년층 선수들은 그야말로 ‘즐기는’ 경기를 한다. 힘들면 쉬엄쉬엄 가고, 안될 것 같으면 그냥 중도에서 포기하고 만다. 자신이 즐기는 축제로 경기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래도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한동안의 연습기간이 필요하긴 하다. 축제 준비를 위한 연습과 축제로서의 경기출전,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게 중장년층의 철인삼종경기 모습이다. 난 이걸 ‘웰빙 철인삼종’이라 부른다. 기록은 별 상관없다. 그냥 내가 좋으면, 즐기면 그만이란 뜻이다.

실제 난 양구에서 열린 철인삼종 대회에서 즐기는 경기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처음 하프 코스에 도전했는데, 연습기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당연히 시합 당일에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소극적인 경기 운영을 했다. 처음부터 체력안배를 생각해서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지막 종목인 마라톤을 하면서는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8월 한 낮에 아무도 없는 양구의 외곽도로를 천천히 걸으면서 숲과 새소리, 혼자만 있는 적막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래도 완주에 의미를 두고 꾸준히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골인지점인 공설운동장 메인스타디움이 눈에 보였다. 다시 뛰기 시작했다. 거의 6시간 반이 경과했던 시점인데, 체력 안배를 너무 잘해서(?) 난 힘이 남아있었고, 땀도 다 말라버려 삼종경기를 치룬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골인지점에서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려면 좀 지쳐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난 박차를 가해 뛰기 시작했다. 멋진 모습으로 골인 지점을 통과하려고... 멀리서는 잘 들리지 않던 마이크 확성기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내가 메인스타디움에 막 입장 할 때 확성기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그럼 이것으로 제 **회 철인삼종경기 대회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박수를 받기는 커녕, 벌써 폐회식까지 다 마친 상태에서 난 들어간 거다. 뛰는 게 창피해서 걸어가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완주 메달 받으려면 어디 가서 받아야 해요?” “아까 다 나눠 줬는데... 집행부 사람들이 장비들을 다 차에 싣던데요. 스타디움 뒤쪽에 있는 버스에 가보세요. 근데 아까 떠나는 거 같던데...”
하마터면 완주 메달도 챙기지 못할 뻔 했다.

글을 쓰다 보니 자전거에 대한 추억은 참 많기도 하다.
이만 줄여야겠다. 너무 길어지면 읽는 사람이 힘드니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결혼하고, 강북의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오면서 자전거를 탈만한 환경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 자전거를 못타고 있다. 익산으로 내려오면서 자전거를 다시 탈 생각을 했는데, 여기도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못해 망설이고 있다.

올해 난 또 다른 10년을 기념하는 철인삼종경기 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 초에 덜커덕 연구원에 합격해 버리고 말았다. 철인삼종은 커녕 ‘배둘레햄 삼종’이 돼가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난 지금 연구원 생활을 철인삼종경기 출전만큼이나 즐기고 있다. 난 요즘 ‘지적 철인삼종’경기를 치루고 있는 게다. 이 경기의 종목은 ‘읽기’, ‘생각하기’와 ‘쓰기’다. 이 삼종 경기를 통해 이전에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육체적인 건강함과 자신감에 비할 수 있는 정신적 강건함과 지적 자신감을 키워볼 생각이다. 아쉽지만 ‘육체적 철인삼종’은 내년으로 계획을 미루었다. 아! 벌써 내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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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20 21:49:19 *.36.210.11
대단해요~ 어쨌든 계속해서 자전거에 대해 끝을 내야징.
순신 형아 못지않은 일지의 힘도 좋고.

지적 철인삼종경기라... 지적 철인이라는 거네.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억쑤로 멋지당.ㅎㅎㅎ

씽씽 쌩쌩 달려라 달려라~ 변.경.연 지적 철인들~ 으랏차차 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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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7.21 21:49:02 *.64.7.213
정산 큰형님 존경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었습니다.
흥미진진한 휴먼스토리였습니다.
정말 멋지세요. 큰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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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2 00:42:28 *.41.62.203

어딘지 다부져 보이는 형아님의 체격이 바로 자전거로 다져진 것이군요. 멋지세요. 앞으로도 주욱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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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7.22 09:15:37 *.128.98.93
점점 흥미진진 해지시는 우리 큰 오라버니의 경험담들..
제 일천하고 자질구레한 경험담들에 비할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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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양
2008.07.22 15:21:01 *.122.143.151
저두, 저두~!!!!
초등5학년부터 고등3학년까지 8년 자전거 통학경력을 보유했음다!!
글쿠 원주에서 부산까지 2박 3일로 돌파한 경험도 있슴다!!
하지만 철인3종과 지적 3종은 아직....

정산형님의 글을 읽으며 지난 주 오프모임 때
'아무리 봐도 운동을 한 몸이 아닌데~~' 했던게 왜 그랬는지
이제사 명확해 집니다..ㅋ

저도 근질근질한데여.. 언제 떼잔차질 함 할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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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7.22 16:19:49 *.97.37.242
써니 선배. 나 개띠여. 간을 배밖으로 내놓고 다니는 건 퇴끼들이나 하는 짓이제... ㅎㅎ

선배 덧글 보고 "아차!" 했네요. '육체적 철인삼종'의 상대적 표현은 '정신적 철인삼종'이 더 맞는데... 북리뷰 정리하다가 '정신적 여행자'란 단어를 보고 왜 '지적'이란 말을 썼을까? 당장 고쳐야 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냥 놔 뒀어요. 실수도 배우는거니까. 그리고 평소에 지적이지 못해서 항상 지적이란 단어에 굼주리고 있었던 내 속마음의 표출이겠거니 생각하고...

차칸양, 이제보니 자전거타기 고수네. 원주에서 부산이면 2박 3일 빡빡할 텐데... 여하튼 이제 구성원이 슬슬 모아지고 있는 것 같네.

함 하자. 향인선배, 차칸양, 사부님도 몸매를 보면 한 자전거 하실 것 같은데... 더위 좀 식으면 9, 10월 중에 한강에서 한번 하자.
그동안 공지를 통해 미리 알리고, '변경연 자전거 축제'를 함 열자. 사실 변화경영도 좋고, 발전도 좋지만 중요한 건 즐거운거 아니것냐?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사부님이 항상 가르치시지 않더냐?

향인선배, 오케이?
차칸양 오케이?
사부님 오케이?
써니선배 오케이?
같이놀고 싶은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하나둘셋넷, 짱!(우리 딸네미 표현이야)

됐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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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8.07.22 23:52:56 *.215.56.230
번개가 쳐 주삼!
은근 꽤 많을 듯 싶은 데..

지는 무조건 참석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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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7.24 12:42:19 *.247.80.52
저도 끼워주세요.
저도 자전거 좋아해요.

익산 근처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전주에 오래 살아서요. 전주, 익산, 김제, 군산... 그쪽은 산이 거의 없이 평지라서... 가을에 라이딩할 때 황금물결 보는 즐거움이 크답니다. 익산에서 김제 40km, 태인을 돌아서 전주를 거쳐 익산으로 이렇게 삼각형으로 돌아도 좋을 듯해요. 거의 대부분이 40km 거든요.

전주에서 모악산 가는 길 을 지나서 구이저수지쪽으로 가는 길을 추천합니다. 개나리가 핀 동네를 찾아 들어가는 게 좋아요. 봄 여행 코스입니다. 길은 자전거 타기에 아주 위험합니다. 경치는 멋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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