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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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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8일 09시 58분 등록
상처는 몇 번의 딱지를 떼어내면서 서서히 새 살을 밀어 올린다.
저마다의 가슴에 쌓인 상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몇 번이고 딱지를 떼어내면서 새 살들이 차 오르고 차츰 잊어져 간다.
허나, 아무리 새 살이 차 올라도 제 살 같을 수 없는 그 자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지난 상처의 그림자들이 있다.
나는 가끔씩 왼손의 엄지 손가락을 들여다보곤 한다.
엄지손가락에는 엄청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진한 상처가 남아있다.
거기에 남아 있는 자디잔 상흔, 아마 초등학교 1학녀이나 2학년즈음 이었을 것이다.
한여름 이었다. 한낮의 태양은 너무나 뜨거웠고 매미들은 단명의 설움을 며칠 사이에 다 토해내기라도 하듯이 울어재끼는 뜨거운 여름이었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일을 하셨다. 밭일, 논일, 아주 조그맣고 깡 마르신 할머니가 마음 편히 쉬었던 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때는.
할머니댁은 부유한 편이었고, 많은 땅이 있었고, 대부분 소작농을 주어 거기서 충분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텐데…할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 노동이, 그 땀방울이 할머니의 삶을 지탱해 줄수 있는 지지대와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한이 많은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너무나 작고 깡마르셨었다. 아마도 내가 작은 것은 할머니의 유전자 영향이 크리라.
반면에 할아버지의 몸집은 너무나 거대했다. 185가 넘는 장신에 100키로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성격은 불같고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분이었다. 반면에 할머니는 작고 약하고 늘 잔기침을 달고 사셨다. 그 기침은 한 여름에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할머니의 그 슬픈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몸은 너무나 약했지만, 소녀 같은데가 있으신 분이었다. 밭일을 하시면서도 노래를 읊조릴 줄 아셨고, 장독대에는 늘 싱싱하고 예쁜 장들을 정성을 다해 때마다 준비하셨고, 철마다 예쁜 꽃들이 항상 피어나는 뜨락을 가꾸실 줄 알았다.
할머니는 한이 많은 분이었다.
큰 아들은 젊디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먼저 보냈다.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어미의 한이 얼마나 컸을지 나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둘째 아들이 버리다시피 한 자식은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그래서였다. 그 어린시절에도 할머니의 애잔한 마음이 내게 울림으로 다가왔기에, 그 한 여름 할머니를 잠재우고 낫을 들고 밭으로 향한 것은, 그 짠한 마음때문이었다.
옛 시골짐은 밖의 날씨가 아무리 무더워도 시원한 대청마루가 있었다. 그곳에 누워서 한 숨 자고 나면 얼마나 단지 더위 같은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대청마루이었다.
점심을 하고 흰 머리 뽑아주겠다고 머리를 고르면 할머니는 잠에 빠져 들고는 했다. 그렇게 할머니를 잠에 들게 하고는 깨기 전에 서둘러 밭일을 마쳐야 한다는 마음에 낫을 들고 밭에 나갔다가 엄지 손가락을 아주 크게 베고 말았다.
낫이 지나간 자리로 허연 뼈가 보이고 피가 뭉클 뭉클 나오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어 엄지손가락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그때 잠에서 막 깨어난 할머니가 너무나 놀라 피를 멎게 하는 약초와 담배잎등으로 지혈을 해주었다.

오늘은 할머니의 기일이다.
오랫동안 잊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서울로 오고 그 해 여름에 돌아가셨으니, 참 오랫동안 할머니를 잊고 살았다. 때때로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대책없이 밀려들기도 했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만 했던 나로서는 잊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이별….상실
내 가슴이 먹먹해져 검푸른 먹빛이 되던 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슬픔이 나를 삼켜버인 날.
마음이 갈가리 찢겨지고 아무라도 밉고 입안에 침이 마르도록 성이 나던 날.
내 자신이 작열하는 태양 빛에 녹아 없어지고 싶은 날.
며칠동안 고열에 시달리고 침마저 삼킬 수 없는 고통이 오랫동안 내게 머문 날이었다.
할머니가 있었기에 나는 뛰어 놀 수 있었고 웃을 수 있었고 노래 할 수 있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내게 유일한 햇빛이었고,
세상과 친숙해지고 걱정없어 보이게 하는 통로였으며 내가 곧 사라져 버리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을 이기게 해 준 존재였다.그 날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정신적 고아가 되었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해 드리고 싶다. 이제 다 괜찮으니 할머니 마음 편히 계시라고 말해 드려야 겠다.

여전히 할머니의 애잔한 마음이 남긴 상흔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피를 쏟던 상처는 다 아물었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다.
왼쪽 엄지손가락의 상처는 그저 작은 흔적일뿐,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듯이 “이젠 다 괜찮아요” “이젠 아프지 않아요” “그러니 편히 쉬세요” 라고…
IP *.161.25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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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7.28 11:11:50 *.244.220.254
가슴 짠~하게 제 할머님을 연상케 하네요.
제가 찾아뵐 때마다, 주머니 안에서 살포시 미국산 카라멜을 주시곤 하셨는데요. 지금도 그녀가 읽어주셨던 구연동화가 귓가를 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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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7.28 11:46:32 *.117.68.202
"상처는 몇 번의 딱지를 떼어내면서 서서히 새 살을 밀어 올린다."

정말 그러내...

나도 할머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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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8 12:36:49 *.64.21.2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할머니의 존재를 잘 몰랐지.
결혼이 늦어서 아이에게도 할머니의 기억을 주지 못했고.
그때서야 알았지... 아이에게 할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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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양
2008.07.28 13:12:28 *.122.143.151
할/머/니... 보고잡다...
그 쪼매하고 거친 손으로 삶은 달걀을 까 주시던 할머니...
소록소록, 새록새록,
살아나는 기억 속에
할/머/니... 보고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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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28 14:44:10 *.36.210.11
그랬구나. 할머니를 닮았구나. 그리고 할아버지도. 더는 그분들로 인한 수직의 또 두 분의 씨내림을.

우리 할매도 억쑤로 쪼매하셨댔다. 내도 가끔 할매를 닮았을까봐 겁이 날 정도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두 눈 부릅뜨고 살아계셨던, 아니 적어도 내게는 늘 살아계시기도 한 유혹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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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8.07.28 20:34:05 *.209.27.164
나도 농활시절의 흔적으로,
왼손 엄지와 검지에 낫자국이 있는데,
다음에 만나면 서로 대봐야겠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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