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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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른 약속이 없어 집에서 식사를 하는 평일 저녁이면, 언제나 혼자서 라디오를 들으며 밥을 먹는다. TV와 신문을 멀리하는 나로서는 라디오가 세상소식을 가장 빠르게 듣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저녁 시간 때면 늘 듣게 되는 방송은 목소리 걸걸해서 정이 가는 DJ 배철수의 음악캠프이다.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이 그렇듯이 그 프로그램 역시 요일마다 다른 코너로 진행이 된다. 하지만 어떠어떠한 코너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날은 노래가 많이 나오고, 어느 날은 임진모라는 음악평론가가 나오고, 어느 날은 초대가수가 나오기도 한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음악인이 아닌 다른 분야의 유명인사가 출연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한두 달 전으로 기억되지만, 정확히 날짜를 알 수 없는 그 날에는 목소리만으로는 도저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여성출연자가 나와 배철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무지 누구인지 감이 안와 밥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보니 임오경이라는 여자 핸드볼 선수였다. 핸드볼 선수로서의 그녀의 경력은 화려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다. 올림픽에서 이룬 성과가 그러했으며, 한국인으로서 일본 실업팀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올 초 개봉해 쏠쏠한 흥행성적을 거두었던, 임순례 감독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된 선수였다. 영화 속에서는 배우 김정은이 그녀의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영화 속 인물과 모든 것이 같지는 않다고 웃으며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배철수가 물었다. "만약 다른 운동을 했으면, 핸드볼만큼 잘 했을까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의 느낌으로는 그녀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와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핸드볼에 미쳐서 너무나 그것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어떤 운동이라도 그 정도 했으면 다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장마철이다. 연일 비가 오다 말다 한다. 비가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방송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뭔가에 항상 미쳐서 살고 싶고, 그래야 한다는 내 욕망이 또다시 떠오른 것일까? 배철수 아저씨의 질문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난 아직 어떤 것도 그녀만큼 성공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다른 것을 했어도 그것만큼 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비교해 볼 것이 없다. 그래도 몇 번은 미쳐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건 그저 단순한 중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영화를 두 편씩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먹고 살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시간과 돈이 허락되는 날이면 아침부터 종로나 충무로의 영화관 밀집지역을 찾았다. 주변 영화관들을 한 바퀴 돌며 그 날의 영화관람 스케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바퀴 돌며 서 너 장의 영화표를 예매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고, 밥 먹는 돈도 아까웠다. 흥행과는 상관없이 내 취향대로 고르는 영화가 많아, 아주 가끔씩 넓은 영화관을 독차지하고 나 혼자서 영화를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은 나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와 가장 절친한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만화책에 대한 기억도 있다. 만화방에 빼곡히 꽂힌 책들을 읽어가며 책장의 한 칸, 책장의 한 줄, 책장 전체, 만화방의 벽 한 면을 서서히 정복해가는 것에 대단한 쾌감과 자부심을 느낀 적이 있었다. 지난 오프라인 수업 때 현웅 형이 발표한 만화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만화책은 열 번, 스무 번을 보며 그 내용을 달달 외우고 다녔다. 당시에 이현세, 허영만, 고행석, 그들도 사부님처럼 연구원을 모집했다면 난 그 곳의 조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나? 당구? 스타크래프트? 얼마 지속되지 못했던 단발성의 미침이 몇 번 있었다. 그것으로 남들에게 어떤 인정을 받아보거나 한 적은 없다. 학창시절에 영화를 꽤나 본다는 놈으로 통해서 친구들에게 종종 영화를 골라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 볼 영화, 가장 무서운 영화, 가장 웃긴 영화, 신나는 영화, 여자친구랑 보기에 좋은 영화 등등 일종의 영화 컨설팅을 하기도 했다.
누가 한지 알 수 없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 나는 미쳤는가? 내 주위의 몇 사람은 철밥통을 걷어 차 버린 나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여기서 말하는 미침은 아닐 것이다. 난 미쳤는가? 나에게 자꾸자꾸 묻고 싶어진다. 아직 미치진 않은 것 같다. 아주 규칙적인 생활에,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모든 게 아주 잘 굴러가고 있다. 내가 미치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책, 글 등등. 하지만 아직 쉽게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미치려면 뭐니뭐니해도 눈에 뵈는 것 없어야 하는데, 아직 눈에 뵈는 것이 많아 그런가보다. 그래도 그거, 꼭 한번 해보고 싶다. 그래서 임오경 선수처럼 뭘 해도 그렇게 하면 할 수 있다는 당당하고 확실한 자신감을 품고 살고 싶다. 배철수의 질문에 대한 임오경 선수의 대답은 참 평범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찌보면 성공도 습관이다. 성공을 한번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그 성공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게 마련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 것처럼, 성공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고, 미치는 것도 미쳐본 사람이 제대로 미칠 수 있는 것 같다. 미쳐보고 싶어하는 나, 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다.
IP *.34.17.28
한두 달 전으로 기억되지만, 정확히 날짜를 알 수 없는 그 날에는 목소리만으로는 도저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여성출연자가 나와 배철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무지 누구인지 감이 안와 밥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보니 임오경이라는 여자 핸드볼 선수였다. 핸드볼 선수로서의 그녀의 경력은 화려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다. 올림픽에서 이룬 성과가 그러했으며, 한국인으로서 일본 실업팀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올 초 개봉해 쏠쏠한 흥행성적을 거두었던, 임순례 감독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된 선수였다. 영화 속에서는 배우 김정은이 그녀의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영화 속 인물과 모든 것이 같지는 않다고 웃으며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배철수가 물었다. "만약 다른 운동을 했으면, 핸드볼만큼 잘 했을까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나의 느낌으로는 그녀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와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핸드볼에 미쳐서 너무나 그것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어떤 운동이라도 그 정도 했으면 다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장마철이다. 연일 비가 오다 말다 한다. 비가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방송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뭔가에 항상 미쳐서 살고 싶고, 그래야 한다는 내 욕망이 또다시 떠오른 것일까? 배철수 아저씨의 질문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난 아직 어떤 것도 그녀만큼 성공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다른 것을 했어도 그것만큼 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비교해 볼 것이 없다. 그래도 몇 번은 미쳐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건 그저 단순한 중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영화를 두 편씩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먹고 살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시간과 돈이 허락되는 날이면 아침부터 종로나 충무로의 영화관 밀집지역을 찾았다. 주변 영화관들을 한 바퀴 돌며 그 날의 영화관람 스케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바퀴 돌며 서 너 장의 영화표를 예매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고, 밥 먹는 돈도 아까웠다. 흥행과는 상관없이 내 취향대로 고르는 영화가 많아, 아주 가끔씩 넓은 영화관을 독차지하고 나 혼자서 영화를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은 나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와 가장 절친한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만화책에 대한 기억도 있다. 만화방에 빼곡히 꽂힌 책들을 읽어가며 책장의 한 칸, 책장의 한 줄, 책장 전체, 만화방의 벽 한 면을 서서히 정복해가는 것에 대단한 쾌감과 자부심을 느낀 적이 있었다. 지난 오프라인 수업 때 현웅 형이 발표한 만화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만화책은 열 번, 스무 번을 보며 그 내용을 달달 외우고 다녔다. 당시에 이현세, 허영만, 고행석, 그들도 사부님처럼 연구원을 모집했다면 난 그 곳의 조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나? 당구? 스타크래프트? 얼마 지속되지 못했던 단발성의 미침이 몇 번 있었다. 그것으로 남들에게 어떤 인정을 받아보거나 한 적은 없다. 학창시절에 영화를 꽤나 본다는 놈으로 통해서 친구들에게 종종 영화를 골라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 볼 영화, 가장 무서운 영화, 가장 웃긴 영화, 신나는 영화, 여자친구랑 보기에 좋은 영화 등등 일종의 영화 컨설팅을 하기도 했다.
누가 한지 알 수 없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 나는 미쳤는가? 내 주위의 몇 사람은 철밥통을 걷어 차 버린 나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여기서 말하는 미침은 아닐 것이다. 난 미쳤는가? 나에게 자꾸자꾸 묻고 싶어진다. 아직 미치진 않은 것 같다. 아주 규칙적인 생활에,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모든 게 아주 잘 굴러가고 있다. 내가 미치고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책, 글 등등. 하지만 아직 쉽게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미치려면 뭐니뭐니해도 눈에 뵈는 것 없어야 하는데, 아직 눈에 뵈는 것이 많아 그런가보다. 그래도 그거, 꼭 한번 해보고 싶다. 그래서 임오경 선수처럼 뭘 해도 그렇게 하면 할 수 있다는 당당하고 확실한 자신감을 품고 살고 싶다. 배철수의 질문에 대한 임오경 선수의 대답은 참 평범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찌보면 성공도 습관이다. 성공을 한번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그 성공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게 마련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 것처럼, 성공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고, 미치는 것도 미쳐본 사람이 제대로 미칠 수 있는 것 같다. 미쳐보고 싶어하는 나, 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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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그래서 난 헝그리 정신만으로는 오래 미치기 어렵다고 생각해. 나름대로 즐길수(?)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어렵지? 미치는 것도 허기짐만으로 채울 수 없고 길게 끌어갈 수 없다는 생각 뭐 그런거지. 몰입을 위한 몰입 빠져들기 위한 빠짐/사랑 같은 것이랄까.
좋은 놈이 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동안은 나쁜 놈일 수 있어야 견디는 것 아닐까. 때로 그 모습을 두고 타인들은 이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잣대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정신없이 미쳐서 똥인지 된장인지에 깃발을 꽂을 더러운(?)/찬란한 끝장을 보아야만 한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
늦기 전에 늦기 전에
좋은 놈이 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동안은 나쁜 놈일 수 있어야 견디는 것 아닐까. 때로 그 모습을 두고 타인들은 이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잣대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정신없이 미쳐서 똥인지 된장인지에 깃발을 꽂을 더러운(?)/찬란한 끝장을 보아야만 한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
늦기 전에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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