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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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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30일 23시 24분 등록
시간은 수수께끼입니다. 시간 속에 있을 때는 그 시간이 매우 긴 듯 하지만 그 시간을 벗어나면 지나간 시간은 다만 짧은 한 점의 순간으로 기억 속에 저장될 뿐이니까요. 지난 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그 한 점의 기억 속에 마지막 하루의 아름다운 추억도 농축되어 있습니다.

코펜하겐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루이지애나'라는 현대미술관이 있습니다. 그라츠에 두 주를 머물고 마지막 3일을 코펜하겐에 들른 나는 적어도 현대 미술관 한 곳은 들러보고 싶어 뒤늦게 미술관 정보를 뒤적였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루이지애나 입니다. 도심이 아니라 인구도 별로 없는 작은 타운에 바다를 배경 삼아 자리한 루이지애나는 마치 나를 위해 기다렸다는 듯, 현대 유명 작가들의 다양한 콜렉션 이외에도, 50주년을 맞이하여 <21세기 미술관 건축>에 대한 특별전까지 열고 있었습니다. 그간 일로 쉴 틈이 없었던 나에게는 하루 휴가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요즘은 풍광도 미술관의 중요한 이슈가 되는 시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미술관은 더욱 내 관심을 끌었습니다.

자연과 예술이 하나가 되는 완벽한 장소, 거기에 사람까지 함께 사는 이상적인 세상, 그런 예로 독일의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은 나의 완벽한 이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바티칸 박물관과 같이 큰 박물관보다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와 특징을 가진 작고 프라이빗한 미술관이 좋습니다. 몇 년 전에 일본 나오시마 섬에 위치한 '지중미술관'에서 받았던 충격이 기억납니다. 섬의 외관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지하에 미술관을 만들고, 천정을 유리로 만들어 최대한 자연의 빛을 많이 끌어들인 지중미술관은 작품을 놓을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이 아닌 처음부터 건축(공간)과, 빛(자연)과, 예술(작품)이 함께 기획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미술관입니다. 나오시마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가 후원하고,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하여, 오지 중의 하나인 나오시마 섬을 세계 사람들이 찾아가고 싶은 섬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던 특별한 작품들은 미술관에 대한 저의 통념을 완전히 깨버렸고, 그 때부터 예술하는 사람들과 그들 작품에 깃든 생각이 본격적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내 세대의 보통 사람들이 미술 혹은 미술관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교육의 힘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우리 모두는 고3때지까지는 입시에 밀려 미술 같은 사치 과목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고, 더구나 나 같은 지방 학생들은 제대로 된 미술전시를 단체로라도 관람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이나마 개인적으로 미술에 눈을 떠 학생들을 예술의 세계로 안내할 만한 선생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요. 불행하게도 내 인생에서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나에게서 예술은 참으로 먼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안에 예술적인 감흥이 전혀 일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전시, 편집, 홍보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출판과 디자인, 미술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잘 편집된 책이나 브로셔, 혹은 홍보물, 잡지, 기념품, 혹은 여러 기능적인 상품들의 디자인을 볼 때마다 큰 관심이 일었습니다. 나에게도 미적인 감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예술적으로 전혀 재능이 없다는 애초의 믿음이 하도 확고해서 그런 나를 제대로 인정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요즘 현대 미술에, 그리고 건축에 관심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당분간, 그러니까 2008년 한 해 동안에는 그 어떤 관심도 일절 통제의 대상이라 그 관심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키워갈 형편은 아니지만, 가끔은 그래도 전시회에는 다닐 생각입니다.

어쨌든 루이지애나에서의 하루는 제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곳까지 달리는 해안도로의 아름다움까지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후에 들른, <햄릿>의 배경이 되었다는 크론보르그 성까지 생각한다면, 아니 크론보르그 성을 뒤에 두고 해가 내려앉기 전, 저녁 9시의 그곳 갈대 언덕의 황금 물결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아릿하게 꿈꾸던 미래의 로망까지 생각한다면, 그 하루는 내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다운 사치로 오래 남을 것입니다.


사진 설명
(위의 download를 누르시면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1. 입구를 들어서면 갤러리로 들어가거나 뒤로 쭉 걸어서 이 공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서면 미술관이라기 보다는 아늑하고 전경이 좋은 해변가 시민 공원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가족과 연인, 청소년들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공원에서의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곳에 꼭 미술전시를 보러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잔디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 가족들과 산책하며 담소하는 사람, 선탠을 즐기는 사람,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는 사람... 내 눈에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지만 그들에게 미술관은 휴식의 공간으로 삶 가까이에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2. 공원에는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이 자연과 어우러져 더 멋진 광경을 연출합니다. 앞 사진에는 헨리 무어의 가족상이 보이고, 이 사진에는 루이제 부르주아(1911-)의 <눈>(Eyes- 여인의 가슴이 아닙니다)'이 눈에 띕니다. 루이지애나 미술관 공원 곳곳에는 이 외에도 사이트 스페시픽(site -specific 처음부터 장소를 고려해 제작된) 작품들이 다양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각기 다른 특징으로 디자인된 갤러리마다 휴식 공간이 내부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예외없이 바깥과 통하게 되어 있고, 그 바깥에는 바로 그런 사이트 스페시픽 조각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시 공간이 안으로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루이지애나의 최고의 매력입니다.

3. 이곳은 미술관 내에 있는 서점이자 아트 샵입니다. 루이지애나 탄생 50주년 기념으로 <21세기의 세계 박물관> 특집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어 서점에는 건축과 건축가에 관한 책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흥미로운 건축을 보는 것 만으로도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흥미를 가져다 주는데, 한 시간 이상 공들여 책을 훑어본 다음 값과 무게를 고려하여 단 한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현대의 건축>(Architects Today)'이라는 책입니다.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의 멋진 사진이 표지에 실려 있는 이 책은 현대에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를 단 두페이지씩 대표 작품과 함께 알파벳 순서로 소개한 개론서입니다. 미흡하나마 훌륭한 건축가 디렉토리가 될 것 같아 샀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의 건축가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4. 이스트 윙(East Wing)의 긴 복도에는 <8 works and 4 weeks>라고 쓰여있고, 그 공간에서는 한 달 동안 8명 작가(Louise Bourgeois, Thomas Demand, Helmut Federle, Sam Francis, Sol Lewitt, Juan Munoz, Sigmar Polke, Frank Stella)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5. 이스트 윙 전시는 작품 한 두개에 방 하나를 제공하는 꽤나 한적하고, 의미있는 전시였는데, 사진은 <반원>(Half Circle)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스페인 작가 후안 미노즈1953-2001)의 작품입니다. 미노즈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꽤 명성을 얻었던 작가라고 합니다. 중국 노동자를 보여주는 회색 유니폼의 사람들이 이루는 반원은 점점 작아집니다. 설명을 읽어보니 이는 소통에 관한 작가의 메시지를 드러낸다고 하는군요.

그곳에서 가장 흥미있를 끈 작품 중의 하나는 토마스 데만트의 <나무>와, <다이빙>(누구 작품인지 기억 안남)입니다. 토마스는 매체나, 과거, 자신의 기억속에서 가져온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건축물 외부나 내부의 이미지)로부터 작업을 시작하는 독특한 작가입니다. 그 이미지들을 꼼꼼하게 종이로 다시 만드는데, 실제 모델 사이즈로 공들여서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종이 건축물을 사진으로 찍고나서는 부숩니다. 이 건축물들은 사진이나 영화에 담겨지고 나면, 벽만한 사이즈로 확대되어 전시됩니다. 루이지애나에 전시된 그의 작품은 실제보다 더 풍성한 잎을 달고 있는 거대한 나무였는데 정교하게 제작된 잎들이 사진 속에서 실제보다 더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오점 없는 사진들은 실제 상황처럼 여겨집니다.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기묘하게도 인공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그림이 없는 그의 작품들은 기괴하고 모호합니다.

그리고 '다이빙'이란 작품은 실제 다이빙 기계가 삼면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이스트 윙 마지막 방에 설치되어있습니다. 이 방에서 앞을 바라보면 온통 바다만 눈에 들어옵니다. 다이빙 기계의 초록색 패널은 반은 방 안에, 반은 창을 뜷고 밖으로 나가 있습니다. 그 패널에 시선을 두면 그것은 바로 푸른 바다로 연결됩니다. 출렁이는 바닷물과 다이빙대, 금방이라도 뛰어내리고픈 충동이 일게 합니다. 그 작품을 바라보며 '예술은 아이디어다'란 생각이 마구 들었습니다.

6. 루이지애나는 미술관 주변의 예쁜 정원과 연못, 나무들, 시야를 탁 티워주는 외레순 해협, 현대 유명 작가들의 야외 조각과 모빌들이 서로 어우러져 편안하고 따뜻한 정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진은 카페 안에서 내다본 광경입니다.

7. 카페 안과 카페 밖의 풍경이 아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깥에 보이는 구조물들은 모두가 작품입니다.

8.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조각들입니다. 루이지애나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여기저기 자코메티 작품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습니다. 자코메티는 사르트르와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이전의 로뎅 작품에 보여지는 인간의 강인함이 없습니다. 그가 만들어내는 인간 군상들은 하나같이 갸냘프고 길게 늘어진 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실존을 버텨낼 힘도 없어 보입니다. 그들이 서있는 텅빈 공간의 사이즈는 그들의 존재와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9. 웨스트 윙의 복도 모양입니다. 자연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모든 공간은 유리로 되어있습니다.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함께 바뀌는자연 풍광도 미술관 작품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건축가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이미 마음에 품고 설계를 하지 않았을가요. 그렇지 않고 루이지애나가 코펜하겐에서 수십킬로나 떨어진 그곳에 위치할 이유는 없을테니까요.

10. 안젤름 키퍼의 작품입니다. 1945년생인 작가는 직접적인 전쟁 세대는 아니지만 항상 전쟁이 남긴 그늘을 인식하며 독일 나치정권에 대한 집요한 고발과 속죄정신으로 작업해온 예술가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을 잘 보면 어두운 나무 줄기 위에 35개의 초상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찌즘에 의해 왜곡된 독일 역사와 문화의 부분들을 표상합니다. 키퍼는 이 작품을 통해서도 그의 중심주제인 나치즘을 고발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캐릭터들의 모자이크를 통해 독일의 재앙을 부른 복잡한 인간들의 상호관계를 주목하 하고, 동시에 잊혀진 과거를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전망으로 역사를 세워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키퍼를 보면 그의 스승 요셉 보이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이스는 독일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이자 독일 현대미술의 신과같은 존재입니다. 의식있는 독일의 젊은 작가들은 그의 철학에 열광하였습니다. 위의 키퍼를 비롯, 시그마 폴케, 토마스 쉬테, 요르그 임멘도르프, 레베카 호른 등 독일 현대미술을 이끄는 대표적인 작가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입니다. 예술은 예술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각 영역 간의 상호 소통과 순환 속에서만 그 존재가치가 있다고 보았던 보이스는 예술과 삶의 일치를 평생토록 추구한 적극적인 행동주의 예술가였습니다. 키퍼는 그런 스승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해가는 최고의 제자입니다.

11. 이 작품은 일단 독특한 주제로 눈을 잡아당깁니다. 제목이 입니다. 말그대로 남자의 손, 여자의 엉덩이, 여자의 무릎, 남자의 손응 소재로 작업한 후에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이 사진은 이미 여러번 보아 친숙했지만 작가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습니다. 이 사진 작가의 이름은 올라프 브로닝(Olaf Breuning)입니다. 유튜브에 올려진 그의 작업 광경을 들여다 보니 이 친구 참으로 호기심이 많습니다. 모든 오브제에 관심이 있고, 그걸 가지고 식상하지 않은 놀이를 만들어서 혼자 정말 즐깁니다.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기뻐합니다. 그리곤 그것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하는 작업이 마치 어린아이들의 놀이 같습니다. 놀이하듯 예술하기, 그는 그런 아티스트인가 봅니다.

12. 이 역시 부르주아의 작품입니다. 브론즈로 만든 대형 거미는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도 있고 삼성 리움 박물관에도 있습니다. 이 대형 커플 거미는 사실 복제가 많이 되어 유럽과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학대로 고통 받던 어머니에 대한 그녀 자신의 연민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그 느낌이 여러분들에게도 전달이 되는지요.


IP *.127.99.61

프로필 이미지
현정
2008.07.31 14:10:29 *.128.98.93
안젤름 키퍼는 올봄에 국제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했었습니다. 한참 조셉 캠벨을 읽고 있었던 때였는데, 그녀의 많은 작품들이 신화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들이었습니다. 한국의 옹기들이 내는 듯한 은근한 색깔들과 말린 식물들로 내어 놓은 색들이 어우러진 그녀의 작품은 저를 제 내면의 세계로 옮겨다 주었습니다. 이 생 말고 그 이전의 생과 또 그 이전의 생 그러니까 억겁 만겁의 나의 생과 이 우주와 우리들이 모두 하나라는 것을 그녀의 작품을 통해 느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글로 못써 놓았었는데 한숙 언니 글을 보니 다시 생각나네요. 그녀의 묘한 작품과 함께 그 모티브가 되었던 쌍동이 신의 신화들...

정서적으로 한국인들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그런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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