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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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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2일 09시 28분 등록
[거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난 오후 2시경 개인적 용무를 위해 사무실을 빠져나와 근처 증권사를 방문했다. 아이들이 그동안 조금씩 모았던 용돈을 아이들 소유의 적립식 펀드 통장에 넣어 주기 위해서다. 2년 6개월 전 아이들이 유치원때부터 모았던 돈과 아이들이 컸을 때를 대비해 매월 10만원씩 불입하는 자유 적립식 펀드를 아이들 이름으로 개설해 주었었다. 그래서 명절 때나 친척집 방문 등 용돈이 모이면 내가 그 돈을 다시 적립식 펀드 통장에 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진 주식상황이 좋아 꽤나 수익이 좋았었는데 요즘은 시장상황이 너무나 안좋다 보니 지금은 수익은 커녕 원금손실까지 보고 있었다. 물론 인생도 고저(高低)가 있듯, 주식시장도 등락이 있어 기다리다 보면 다시 회복되어 원금과 함께 일정부분의 수익까지 낼 수 있겠지만 언제가 그 시기가 될 지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건 사실이다. 또한 나의 경우야 하는 일 자체가 재무업무이다 보니 이런 상품의 특성이나 시장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정답’을 알고 있지만, 이런 펀드의 구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수익이 은행 정기예금이나 적금보다 월등히 좋다’라는 말만 듣고 덜썩 가입했던 그 부모들과 꼬맹이들은 뭔 잘못이란 말인가. 은행 직원의 말을 너무 잘 들은 죄? 알토란 같은 원금이 알을 낳아 새로운 기쁨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제 몸을 깍아먹는 아픔이 되고 있다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이 시장이 더욱 무서울 수 밖에 없다.

입금을 하고 몇가지 더 처리할 용무를 본 후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증권사를 빠져나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덥고 무더운 날씨다. 점심 때쯤 시원한 소나기가 지나갔지만 무더위를 낮춰주기는커녕 더욱 습기찬 도로를 만들어 온통 후덥지근 투성이다. 숨 쉴 때마다 뜨겁고 축축한 열기가 콧구멍으로, 입구멍으로 마구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어느 순간 불쾌감이 울컥 솟구친다.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도로 위를 가득 메운 채 어디론지 달리는 자동차의 행진에 발맞추어 인도(人道)에는 다양한 나이대, 외모, 옷차림, 인상의 사람들이 정신없이 걸어가고 있다. 문득 궁금증이 인다. 다들 어디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걸까. 어디를 어떤 목적으로 가고 있는걸까. 그들의 하루는 이제 시작일까, 진행중일까 아니면 마무리로 들어와 이제 한숨을 돌리고 있는걸까. 이들의 하루는 행복할까. 나처럼, 나보다 더, 아니 나보다 못하게? 행복이란 단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를 포함해서, 나를 제외하고?

양복을 빼입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이는 60대 대머리 아저씨도, 5-6세의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건널목을 건너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40대 아줌마도, 어깨가 노출된 하늘색 티, 짧고 바짝 달라 붙은 쫄 청반바지 그리고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하늘하늘 걷고 있는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도 모두 더운 여름날 뜨거운 폭염과 도시가 내뿜는 한숨을 받아 마시며, 그들의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금연건물 밖으로 나와 1,2시간여 참았던 니코틴을 흡입하며 5분, 10분의 자유를 연기로 날려보내는 3-4명의 화이트 아니, 그레이 칼라의 30대 젊은 남자 직원들도,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장에 넥타이 그리고 서류가방을 들고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헤메는 저 하이에나 영업사원들도 모두 방황치 않고 자신의 길을 똑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길,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문득 깨닫는다. 이런 거리의 풍경이 그리고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지금 이 자리가 그리고 이 시간이 결코 나에게 낯익은 것이 아님을. 새벽같은 출근과 늦은 저녁 퇴근은 나의 일정 동선 이외에는 허락지 않았다. 사무실 안 같은 풍경, 같은 사람만 1년 내내 보고 상대하면서, 그저 이것이 주어진 상황이고 운명이려니 하며 주저 앉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평일은 바깥의 자유로운 세상이 아닌 사무실 안 그 답답한 책상, 의자, 화장실, 옥상 그리고 느려터진 PC 모니터 안에서 쳇바퀴 돌듯 돌고 있었다. 검은 모니터 안 일그러져 보이는 나의 모습처럼 나는 그 안에서 아무 생각없이 주저 앉아 있었다. 그 일러그짐이 나의 원래 모습인듯 착각하면서.

거리의 한쪽에서 잠시 앉아 세상을 담고 있는데 할머니 한분이 내게 다가와 근처 안과를 찾고 있는데 혹시 아냐고 물으신다. 벌써 30분째 이 거리를 헤매고 계신단다. 지난 번 한번 왔었지만 서울 건물들이 다 비슷하여 기억하고 계신건 오로지 엘리베이터 타고 7층에서 내린 기억만 있으시단다. 그래, 어차피 간만에 바깥에 나온 것, 회사엔 조금 미안하지만 시간을 좀더 쓰기로 하였다. 할머니와 동행하여 안과 찾기 작전에 나섰다. 찾는 동안 이런 저런 일상적 대화를 주저리 주저리 나누었다. 할머니는 얼마 전까지 건물 청소일을 했었는데 그 건물이 리모델링 들어가면서 일자리를 잃으셨다 했다. 그래서 지금은 하루하루 일감이 나오면 일을 할 수 있지만 거의 다수의 날들이 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놀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의 하나고 집에서 노느니 안 좋은 눈치료라도 받으시려고 이렇게 나오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부탁하나 해도 되냐고 물으신다.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혹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청소 아줌마 구하게 되면 나 좀 꼭 데려다 쓰라고 하신다. 어렵다, 삶이. 피곤하다, 인생이. 노년이 되어도 뗄 수 없는 밥벌이와의 악연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필연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앞선다. 현재 나의 상황이 저 할머니의 삶보다 나아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액면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주저앉는 순간 현재는 사상누각처럼 위태로워질 것이고, 짧은 외마디 바람에도 바닥을 모른채 추락하게 될 것이다. 현재만을 움켜잡는 순간, 미래는 현재보다 못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할머니는 계속 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아’, ‘네’, ‘그래요’, ‘그러셨어요?’ 하는 식으로 말의 장단만 맞춰 드렸다. 세상살이의 힘듬을 말로 다 갚으려는 듯 그렇게 그렇게 할머니의 말씀은 이어지셨다. 할머니와 함께 돌아다니는 거리는 그동안 10년도 넘게 보아왔던 거리와는 달랐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거리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또한 내가 변화하듯 거리도 계속 변화하여 왔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안과는 찾기 어려웠다. 주변의 사람들 또한 다 모른다고 했다. 같이 찾아나선지 거의 30분만에야 비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위치한 그 안과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할머니도 기뻤지만 나도 기뻤다. 비로소 우리, 할머니와 나는 작은 기쁨을 이 거리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할머니와 작별을 고한 후 다시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회사 건물의 웅대한 위용이 눈에 들어왔다. 저 곳은 마치 사람들을 집어 삼키듯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그리고 소화가 다 된, 영양가가 빠진 먹잇감을 다시 거리로 쏟아놓고 있었다. 나는 저 속으로 삼켜져 무엇을 빼앗길까. 더 이상 제공할 영양가가 남은 것일까. 마지막 한방울 남은,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던 비상 영양가마저 내놓는 순간이 기업과 나의 라스트 컷이 될 것이다. 이제 그 클라이막스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머리는 부인하려 하지만, 점점 삐그덕거려가는 몸은 이미 느끼고 알고 있다. 이제는 필사의 각오로 하루하루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 이상의 기다림을 세상은, 거리는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결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현재의 나날들에 의해 나의 미래는 저 깊은 수렁 속으로 서서히 빠져 들어가게 될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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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8.02 12:09:45 *.36.210.11
가만히 있어도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생했구먼. 그래도 훈훈한 인정이 번지는 것은 당연지사겠지?

이미 착실하게 잘 준비하고 있는데 무에 그리 큰일이야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월급장이 입장이야 다 그러하지.

원만한 성격과 성실한 근무 태도로 미래를 향한 자기계발에도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아빠들의 어깨가 편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행이 거대한 빌딩들이 삼킨 것과 토해낸 생활 가운데는 중심 잡히고 발전되어 나가며 진화를 갈망한 자들이 있는 법, 늦기 전에 또 가끔은 한가로이 더 나은 일상의 희망과 꿈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으리.

오늘 하루하루의 점들은 바로 굳건하고 기운차며 쭉 뻗은 직선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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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8.04 11:14:22 *.179.68.77
너무 비장한데요...... 하루를 간절하다 못해 처절하게 임하시는군요.
거리의 풍광들을 고즈넉하게 보고 있노라면, 형님과 같은 감정이 중첩되어 다가오곤 하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숨가쁘게 살고 있는지. 뉴질랜드 여행에서 모두 털어버리고 오시길........

* 추신 : "하이에나 영업사원"이라는 단어 무척 눈에 거슬립니다. 영업사원을 홀대해도 그렇지, 하이에나가 뭡니까? 글쓰기도 어차피 영업이라는 것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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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8.04 16:20:58 *.128.98.93
아무리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마시길....
정신 바짝 차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같이 찾아 보자구요..
혼자서 힘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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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4 23:43:49 *.180.129.173

글이 묵지근, 연수 다녀오면 훨씬 가벼워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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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8.05 11:56:27 *.97.37.242
무겁네. 힘이 들어가면 좋은 샷이 나오질 않지.
힘좀 빼시게. 재우답지 안구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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