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조회 수 3267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08년 8월 3일 21시 21분 등록

찌는 듯한 삼복더위가 이어지는 밤. 한 무더기의 일과, 한 무더기의 술과, 한 무더기의 소외감과, 한 무더기의 실의와, 한줄기의 가느다란 긍정심리학에 실어놓았던 몸을 집에 부려놓는다. 하루하루가 그렇다. 거의 다르지 않게. 긍정심리학이 하루를 지배하는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음을 어쩌랴.
세상에 시달린 몸을 씻고 침대에 누우니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가볍게 한다. 아파트 뒤에 녹지가 있어서인가. 한여름에도 열대야에 시달리는 날이 많지 않아 좋다. 그렇다고 한들 삼복더위에야 별 방법이 없지만 창을 앞뒤로 열어놓으면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휘돌아 나간다.
침대에 누워 창으로 솔솔 들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몸은 쾌적해지고 마음도 상쾌해진다. 몸을 씻기 이전의 무거웠던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다. 지금은 이렇게 가볍고 상쾌한 기분이지만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몸과 마음은 또 어떤 경우를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 속에서 이 시원한 바람은 작은 행복이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대개 이런 것 들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잠시의 달콤함. 피곤한 삶 속에서 맛보는 아주 작은 상쾌함. 알고 보니 행복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짧고 작은 것 들이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 중의 하나가 행복론에 대하여 짧은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읽은 책에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써있었단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었다. 뒤에서 호랑이가 잡아먹겠다고 달려오니 도망을 칠 수 밖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리는데 어느 순간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사냥꾼이 동물을 잡으려고 파 놓은 구멍을 못보고 그대로 빠진 것이다. 제법 깊은 구멍으로 미끄러지다 엉겁결에 흙벽에 붙어있는 나무뿌리를 붙잡았다. 간신히 나무뿌리를 붙잡고 매달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밑을 보니 설상가상이다. 바닥에는 독사가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머리를 들어 위를 보니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아래를 보니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팔은 갈수록 힘이 빠진다. 어디를 둘러봐도 고통과 괴로움뿐이다. 잠시 후에 닥칠 자신의 운명은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공포와 한숨 속에 넋을 놓고 있다가 옆을 보니 나무뿌리 옆에 조그만 벌집이 있다. 벌집 속에는 제법 충실하게 꿀이 담겨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대어본다. 달콤하다. 맛있다. 위에는 호랑이 아래는 독사가 목숨을 노리는데 한줄기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 벌집에서 맛보는 꿀의 달콤함. 그것이 행복이다.’

그게 무슨 행복이냐. 그게 왜 행복일까. 현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는 게 아닐까. 아마 이정도의 논란을 벌이다 흐지부지 되었던 기억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으면서 ‘행복이 무엇입니까’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역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게 행복일까. 도대체 그게 왜 행복일까. 아니라면 그럼 행복은 뭘까.

한해 두해가 더 지나고 또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그 ‘구덩이 속의 꿀’이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행복을 찾으러 떠난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파랑새와 같았다. 분명히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이 맞는 것 같다. 손에 무언가 들어온 순간, 옆에서는 그게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스스로 보기에는 이건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보이지도 않고 어느 곳에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그 길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찾으러 가는 대상은 하나인데 서로 다른 길을 택해서 떠난다. 가족과 함께 떠나기도 하고 가족을 버리고 떠나기도 한다. 친구와 함께 떠나기도 하고 동료들과 떠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도가 있다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가기도 한다. 맨손으로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먼 길에 대비해서 잔뜩 짊어지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으러 가는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되레 불행을 겪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도중에 돌아서는 사람도 흔하다. 그 길에서 중요한 것은 길의 끝까지 도달 하는가 못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빨리 행복을 찾아내는가 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다.
파랑새를 찾아 산을 넘어간 소년은 파랑새를 찾았다. 소년이 파랑새를 찾은 곳은 높고 높은 몇 개의 산을 넘어섰을 때였다. 그 곳에서 소년은 파랑새를 보지는 못했지만 파랑새가 어디에 있는가는 알 수 있었다.
행복은 파랑새 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누구도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것이라고 그래서 어디에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누구도 모르고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결론을 내렸다. 행복은 이런 것일 거라고.

그래서 지금 창문으로 들어와 피곤한 몸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시원한 바람은 행복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중의 하나이다. 누구도 그것을 행복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기로 했다. 답이 없는 문제를 만나 스스로 답을 만들어 버렸다. 누구도 그것을 답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답으로 만들어 버리니 그것은 나에게 답이 되었다.

젊은 시절 우리가 그때까지 겪은 삶의 형태로는 누구인지 모를 그 현인이 말한 행복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청년의 시기를 지나서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힘들었다.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시간은 패기와 꿈의 무게가 더 컸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야 느끼는 행복은 그 현인이 말했던 바로 그 행복이었다. 패기와 꿈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게 사그라졌다. 그 자리는 대신 생활이라는 현실과 피곤과 곤궁함이라는 놈이 차지했다. 그것은 고개를 올려서 본 호랑이이고 고개를 내려서 본 독사와 다름 아니다. 그 가운데 삶이 있다. 호랑이와 독사에 둘러싸인 삶 속에서 맛보는 달콤한 꿀맛. 그것이 행복이다. 이제는 그것이 행복임을 알 수 있겠다.

산울림이 노래한 ‘불안한 행복’ 노랫말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그렇게 불안하게 나는 나의 행복을 본다.” 나도 그렇게 불안하게 나의 행복을 본다.

IP *.123.204.118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8.08.03 21:49:33 *.36.210.11
그래서 잘난 놈도 살고 못난 놈도 한데 얼려 살아가는 게지. 요지경 속에서.

니들 보기에 난 불행할 것 같지? 그런데 나도 즐거울 때가 제법 있단다.

그게 비단 달콤한 꿀이 아니어도 정신을 팔리게 하는 무엇들이 있지.

일찍 글을 마친 침대 위에 한 남자의 달콤한 행복을 생각하며...

오늘 저녁은 위 아래 글을 읽으며 자꾸 웃게 되네. ㅋㅋㅋ

부디 불안에 떨지말고 행복 충만하시길.
프로필 이미지
2008.08.04 23:50:47 *.180.129.173

산울림 노래 나도 좋아하는데, 그 답은 그런데 수시로 바뀌지 않나요? 마치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의 세기처럼. ^!~


프로필 이미지
현웅
2008.08.05 08:47:48 *.41.103.229
행복이란 뭘까?
잘 모르겠어 형~~ ^)^
프로필 이미지
정산
2008.08.05 11:46:51 *.97.37.242
행복은 항상 "안 행복"과 함께하지 않는가?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하면서 행복해 했는데, 출근해서 2사분기 경영평가실적 보고서를 보는 순간 안 행복해진다.

'창문으로 들어와 피곤한 몸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행복했는데, 집사람이 '쓰레기 버리라고 했는데 뭐하고 있냐'고 큰소리 치면 안 행복해진다.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 달콤한 꿀을 먹으며 행복했는데, 아래는 호랑이 위로 독사를 보니 안 행복해진다.

사소한 행복을 많이 만들고 '안 행복'을 다독이고 줄여갈 수 있으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좋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구먼. 땡큐.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